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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세상의 모든 ‘자식들’, 모든 ‘어버이’

by 낮달2018 2020.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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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뵐 어버이 계시지 않은 어버이날에

▲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카네이션

낫는가 싶던 기침이 어제부터 다시 슬슬 잦아지기 시작했다. 간밤에 깰 때마다 소리 죽이고 기침하느라 힘이 들었다. 5시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다시 병원엘 가야 하나 어쩌나 하고 궁싯거려야 한다는 사실이 좀 짜증스럽다.

 

지난 어린이날은 방송고의 중간고사 시험날이었다. 더는 어린이가 없는 집에서는 ‘어린이날’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날일 뿐이다. 우리 집뿐 아니라, 주변에 어린이가 있는 친지도 거의 없다. 장성한 아이가 혼인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는 이상 당분간 어린이날을 챙길 일은 없을 터이다.

 

어버이날도 다르진 않다. 어제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랬다. 친가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처가에도 장모님 한 분만 살아계시니 ‘어버이날’을 챙기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고. 양가 부모님이 생존해 계실 때 ‘어버이날’은 선물의 경중이나 우선순위 따위를 내외가 다투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세상도 많이 변했다. 뉴스에 따르면 어버이날 대표 선물인 ‘카네이션’은 찬밥 신세가 되었고, 한 백화점이 고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여성과 남성 모두 외가 쪽에 더 고가의 선물을 할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니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외가란 필경 ‘아이들 외가’일 터이다.

 

‘뉘우침’으로만 남은 ‘어버이’에 대한 기억들

 

객쩍은 얘기를 주절대다가 나는 문득 돌아가신 양친을 생각했다. 선친께선 1985년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가신 지 어언 30여 년이 가깝다. 막내아들이 경주 지역의 한 여학교로 부임한 지 이태째였다. 갓 서른, 철도 없었고 살림살이도 어설프기 짝이 없을 때였다.

 

그래서였던가. 첫 봉급을 받아 내복을 사드렸고, 명절에 찾아뵙는 게 고작이었을 뿐이었다. 적으나마 용돈을 드려본 적도, 맛있는 음식 대접을 해 드린 적도 없다. 황망히 영결한 뒤에 두고두고 나는 아버지께 못다 한 사랑을 뉘우치고 뉘우쳤다.

 

늘 기억에 남아 있는 게 병환이 중해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지신 당신께서 낡고 후줄근한 양복을 걸치고 계신 모습이다. 아, 왜 나는 당신께 양복 한 벌 못 해 드렸는가. 주변에서 양복을 차려입은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양복을 갖춰 입은 풍채 좋았던 당신을 기억하면서 아픈 마음을 달래곤 한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건 지난 2002년이다. 그러고 보니 10년이 넘었다. 우리 내외가 7년 가까이 모셨고 임종도 했다. 객지에서 장례를 치르고 고향의 산골짜기, 아버지 곁에다 모셨다. 만년에 치매가 중하셔서 당신은 자식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돌아가시기 전, 따뜻한 말 한마디 당신께 건네지 못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살아남은 자식들은 뉘우침으로 가슴을 찧는다. 그건 세상의 모든 자식이 피할 수 없는 업보일까. 살아생전에 못다 한 사랑은 자식이 자식을 기르면서 하나씩 깨우치게 된다. 자신이 낳은 자식을 바라보는 마음이 곧 떠나신 어버이가 평생을 지니셨던 마음이라는 그 평범한 진리를 말이다.

▲ <다음> 과 구글 로고에 쓰인 어버이날(아래).  카네이션이 웃고 있다 .

마지막 8교시 수업을 하다가 문득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내일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 있니?”

 

아이 두엇이 손을 들었다.

 

“무슨 선물?”

“편지요.”

“그래 편지도 좋겠다. 편지를 읽으면서 부모님께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컸구나 하시면서 행복해하실 거야.”

 

좀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버이날이라고 안 하던 말과 행동을 하는 게 어색하긴 하겠지만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에는 꼭 이 말씀은 드려보자. ‘낳아주셔서,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거나 ‘사랑한다’고 말씀드려 보자. 너희들에겐 쑥스러운 일이겠지만 부모님은 그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받아들이실 게다.

 

부모님은 어떤 사람일까?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기 살을 베어서 팔 수 있는 사람들이다. ‘딸 바보, 아들 바보’라는 말을 들어봤지? 자식 사랑 앞에서 당신들은 바보가 되는 것을 서슴지 않는 분들이지. 바보가 되면서도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이들이 이 세상의 어버이들이거든.

 

작지만 소액의 선물이라도 드리는 것도 좋다. 그게 아무리 값싼 것이라도,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는 물건이라 해도 상관없다. 어버이는 단지 자식이 마음으로 마련한 그 선물을 자식을 낳을 때의 기쁨과 사랑으로 받아들이실 테니까. 부모님께 받은 용돈이라도 괜찮다. 그걸 그렇게 쓸 수 있는 자식을 부모님들은 대견하게 바라보실 테니까.

 

오늘 저녁 돌아가면 마음먹고 부모님 발을 씻겨 드리겠다고 말해 보는 것도 괜찮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굳은살 박인 발을 씻겨 드리면서 당신들이 겪어온 고단한 세월을 떠올려보고 그것이 너희들의 삶과 어떻게 이어졌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지…….

 

나는 잠깐 부모님을 보내고 나서야 깨닫게 된 내 ‘불효’도 고백했다. 세상의 모든 자식이란 부모님과 이별하고 나서야 자신의 무심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라고. 이건 뒤늦게 그걸 깨닫게 된 사람이 너희들에게 간절하게 전하는 충고이고 부탁이라고…….

 

아이들 몇몇은 자못 심각해져 있고 또 몇몇은 여전히 뜨악한 표정 그대로였다. 아이들은 내 조언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까.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열여덟 살 선머슴아이들이 부모님께 안 하던 말과 행동을 하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아이들의 어버이 역시 그것 그리 기대하지는 않을 터이고.

 

모든 ‘자식’들은 ‘어버이’가 된다

 

▲ 어버이의 자식사랑은 모든 사랑 가운데 가장 본질적 사랑이다.

그러나 그렇게 아이들은 커 갈 것이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어버이의 한숨과 눈물보다는 저들 앞에 놓은 청춘의 기쁨과 슬픔이 더 커 보이는 나이니까. 그러면서 그들도 머지않아 어버이가 될 것이다. 살과 피를 갈라 아이를 낳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깨달으면서 그제야 늙어가고 있는 어버이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병원에 입원했던 장모님께선 매우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지난주에 퇴원하셨다. 부산에서 경산에서 번갈아 가며 온 딸네들의 간병을 받으면서 당신께서는 모처럼 딸들의 효도를 기꺼워하셨을 것이다. 3주가 넘는 입원 기간에 딸들에게 신세를 졌다고 여기는 노인은 내일은 절대 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셨다.

 

그러나 안다. 마음은 그렇지만 노인은 또 자손들을 기다릴 것이다.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해서 장모님을 모시고 와서 식구들과 함께 맛있는 저녁밥이라도 나누어야겠다고 아내와 이야기했다. 딸애가 아침에 건네준 봉투 속에 든 현금으로 노인의 용돈을 드리면 맞춤하겠다.

 

문득 한 이삼십 리 건너 고향 산골짜기에 잠들어 계신 부모님을 떠올리고, 나는 주말에는 거기를 들러야겠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큰누님과 함께 우리 내외는 한나절 내내 산소 주위에 뿌리박은 칡과 아까시나무, 그리고 잡풀들을 손보았다. 한결 산소 주변이 훤해졌지만, 해를 넘기면서 다시 주변은 우거지고 있으리라. 풀이 더 짙어지기 전에 거기 가자고 아내와 약속을 하면서 어버이날 아침, 출근길에 나선다.

 

 

2013. 5. 8. 낮달

 


새벽에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꼴사납게 잠깐 흐느꼈다. 기억 속의 어버이를 마음속에 불러내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건 다 허망한 뉘우침에 그칠 뿐이다. “나무가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나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씀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진실이다.

 

아이들은 관례에 따라 전화를 걸어왔고, 저들이 마련한 선물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아비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깨우치려면 아직도 숱한 세월이 필요하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명징한 의미로 아이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우리가 어버이를 영결하고서야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았던 것처럼. 그것은 가혹하지만, 인간이 감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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