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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장준하, 월간 <사상계> 창간하다

by 낮달2018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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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4월 1일 - 장준하, 피난 수도 부산에서 <사상계(思想界)>를 창간

▲ < 사상계 > 는 해방 후 인쇄 매체로 지식인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잡지였다 .

1953년 4월 1일, 장준하(1918~1975)는 피난 수도 부산에서 월간 종합잡지 <사상계(思想界)>를 창간했다. 장준하는 애초 1952년 8월, 당시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원장 백낙준)의 기관지였던 <사상(思想)>을 단독 인수하여 본격 종합 교양지를 발행하게 된 것이었다.

 

<사상>은 6·25전쟁 중 국민사상의 통일, 자유민주주의의 확립 및 반공정신 앙양 등 전시하 지식인층의 사상운동을 주도하며 통권 4호까지 발행한 잡지였다. 연구원으로 잡지의 책임 편집을 맡고 있던 장준하가 이를 인수하여 <사상계>로 제호를 바꾸어 창간하게 된 것이었다.

 

독립 잡지 <사상계> 양심 세력을 대변하다

 

<사상>은 정부 기관지였지만 이를 바탕으로 창간된 <사상계>는 백낙준과 장준하가 사재를 털어 만든 독립적 잡지였고, 이후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양심세력을 대변하는 잡지가 되었다.

 

<사상계>는 편집의 기본 방향을 ① 민족통일 문제, ② 민주사상의 함양, ③ 경제발전, ④ 새로운 문화 창조, ⑤ 민족적 자존심의 양성으로 잡았다. <사상계>는 편집후기에 ‘동서고금 사상을 밝히고 바른 세계관·인생관을 수립’하고 ‘종으로 5,000년의 역사를 밝혀 우리의 전통을 바로잡고, 횡으로 만방의 지적 소산을 매개하고 공기로서 자유·평등·평화·번영의 민주사회 건설’에 이바지한다고 밝혔다.

 

처음에는 A5판 100쪽 안팎으로 발행되던 <사상계>는 나중에 400쪽 내외로 증면하였으며, 창간호 3천 부가 발간과 동시에 매진되는 등 1950년대 지식인 사람들에게 이 잡지는 사상적 자양을 공급한 셈이었다.

 

<사상계>는 남북통일 문제와 노동자 문제 등 당시로는 매우 논쟁적인 주제에서부터 정치·경제·문화·사회·철학·교양·문학·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권위 있는 글을 실었다. 특히 문예면에 큰 비중을 두어 당시 문인들의 활동무대를 크게 넓혀 주었다.

 

이후 사세 확장에 따라 ‘동인문학상’, ‘사상계 논문상’, ‘사상계 번역상’, ‘신인문학상’ 등을 제정하여 사상과 문예활동의 본산으로서 역할을 다했다. 그러나 장준하의 <사상계>가 동인문학상을 제정한 점과 최남선이 사망하자 추모특집을 싣고 그를 극찬한 점 등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승만 정권 당시에 자유 언론 투쟁에 앞장서 1962년 막사이사이상을 받기도 했던 장준하와 <사상계>는 박정희의 제3공화국에서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저항적·정치 비판적 민족주의 논조에 비중을 둔 정치평론이 빈번하게 지면을 채우면서 <사상계>는 지속적인 정권의 탄압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장준하가 7대 국회(1967)에 진출한 뒤에는 발행인이 부완혁으로 바뀌었다. <사상계>는 1961년 통권 100호 기념호 등 여러 차례 특집호를 펴냈으나, 재정난이 계속되던 중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을 실어 그해 9월 29일 당국으로부터 폐간 처분을 받았다. [관련 글 : 1970년 오늘, <오적> 필화사건…, <사상계> 폐간]

 

계몽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이념지

▲ <사상계> 창간호와 폐간호

통권 205호를 마지막으로 <사상계>는 폐간되었지만, 당시 최장수 잡지로 학계·문화계에 수많은 문필가를 배출한 공적을 남겼다. ‘1950~1960년대의 계몽적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기초를 둔 이념 지향적 월간지’로서 <사상계>는 한국잡지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해방 후 인쇄 매체로 지식인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잡지가 <사상계>라는 걸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사상계는 월간지로서는 드물게 2만여 정기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었고 4·19혁명을 전후한 시기에는 최대 7만여 부까지 발행한 유력지였다. 1950년대 후반의, ‘사상계를 들고 다녀야 대학생 행세를 하던 풍속’은 <사상계>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화였다.

 

<사상계>가 폐간되고 2년 뒤에 박정희는 영구집권 쿠데타로 유신독재를 시작하였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하여 박정희 정권에 맞섰던 장준하는 이듬해 의문을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사상계>도 장준하도 없는 1970년대를 유신독재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 1980년대에 간행된 <사상계> 영인본. 이 책은 잡지를 당대에 읽지 못한 뒷사람들에게 전 시대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었다.

 

 

2017. 3. 3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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