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48년 2월 10일 - 김구, 단정 반대·통일 정부 수립 호소 성명 발표
1948년 2월 10일, <서울신문> 등에는 백범 김구(1879~1949)가 동포들에게 ‘통일 정부’ 수립을 호소하는 성명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 실렸다. 같은 해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6개 항의 의견서를 보낸 데 이어 2월 10일부터 12일까지 사흘에 걸쳐 지면에 실린 이 성명은 70 고령의 노 독립운동가의 시국에 대한 절규였다.
김구의 단정 반대·통일 정부 수립 호소
그의 피 울음은 단순 명쾌했다. 1893년 열여덟에 동학에 입문, 1896년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처단하고, 1919년 마흔넷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임한 이래 임정을 지켜온 백범의 일성은 비장했다.
“나는 통일 정부를 세우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위를 위해서 단독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가담하지 않겠노라.”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수립되었지만, 임시헌법의 제정·공포에 이어 대통령 중심제의 단일 조직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된 것은 그해 9월이었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의 내각에 백범 김구는 경무국장으로 참여했다.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 누리집 연보에 이때 “국무총리 이동휘의 공산주의 운동 권유 물리침.”이라고 기술되어 있듯, 그는 우파 성향의 민족주의자였다.
임시정부의 제9·10대 국무령(1926~1927)을 거쳐, 백범이 임정 주석에 취임한 것은 1940년 10월, 65세 때였다. 1944년에는 주석으로 재선되었고, 이듬해 광복을 맞았지만, 그는 미 군정의 거부로 ‘임시정부 수반’으로서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11월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그의 소망과는 달리 이미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간의 3국 외상 회의(‘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세 나라는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 이 정부와 연합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데 합의했다. 미국의 30년간 신탁통치 주장에 대한 소련의 수정안이 통과된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주장에 의해 신탁통치를 실시하게 되었다”는 <동아일보>의 부정확한 오보로 이 사실이 알려지자 즉각적으로 광범위한 반대 운동이 시작되었다. 백범은 1946년 2월 비상 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남조선 국민대표 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되는 등 조직적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삼상회의 결정의 정확한 내용을 알게 된 좌익세력이 찬탁으로 선회하면서 좌우 세력은 충돌했고 이후 이 대립 구도는 굳어지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미소 공동위원회를 개최했지만, 이도 양국 간 견해차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1946년 6월, 지방 순회 강연에 나선 이승만은 전북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이라는 새로운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국내 정치 지도자가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첫 공식적 언급이었다. 이후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합작위원회, ‘좌우합작 7원칙’에 합의했지만
좌우 대립이 격화되면서, 이 극한 대립이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도 커졌다. 이에 중도파 세력들은 1946년 7월, 좌우 사상을 넘어서 모든 조직을 통합하여 중도적 사상의 통일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온건 중도우파인 김규식(1881~1950)과 안재홍(1891~1965), 중도좌파인 여운형(1886~1947)이 주도한 좌우합작위원회는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좌파의 5원칙과 우파의 8원칙에 따라 양보와 타협으로 ‘좌우합작 7원칙’을 합의했다.
좌우합작 7원칙은 ① 삼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② 미소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 성명을 발할 것, ③ 토지개혁 실시, 중요산업 국유화, 사회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 ④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 추진, ⑤ 남북의 정치 운동자 석방 및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 제지 노력, ⑥ 입법기구의 기능과 구성 방법 운영 방안 모색, ⑦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 등 자유 절대 보장(<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이었다.
백범은 같은 해 10월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했지만, 그와 임정 세력은 반탁을 강조하면서 좌우합작 운동에 대해서는 관망하고 있었다. 이듬해(1947) 1월, 백범은 반탁 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제2차 반탁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성과를 내지 못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 총회에 상정했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미국이 제안한 한국통일안, ‘한반도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실시,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아래 위원단) 파견’을 결의했다. 1948년 1월, 호주와 캐나다, 중국 등 8개국 대표로 구성된 위원단이 한국에 들어왔지만, 소련이 위원단의 38선 이북 지역 입북을 거부하여 한반도 전역의 선거 시행은 무산되었다.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조속한 선거 시행을 주장했지만, 김구는 먼저 김규식과 ‘남북정치요인의 협상’과 ‘전국 총선거’에 합의한 뒤 자신의 주장을 6개 항으로 정리한 의견서를 공개하였다. 그의 의견은 ‘미소 양군 철수 후 유엔 감시하 남북 지도자들 간의 합의에 따른 전국 총선’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미국 제안 한반도 통일안 유엔 총회 통과
백범의 의견서는 당시 전국의 최대 이슈로 우익 진영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김규식 등 중도 진영에서는 그의 의견을 지지했지만, 김구를 ‘용서할 수 없다’거나 ‘조선 민족의 지도자’가 아닌 ‘크렘린궁의 한 신자’로 비하하는 극단적인 비난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서울신문>에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눈물로 고함’은 바로 이러한 상황 가운데 나왔다. 백범은 당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세력 등에 의해 단독정부 수립의 가능성이 커지자 이에 저항하는 의미로 남북회담을 제안한 것이었다.
삼천만 동포에게 눈물로 고함
(전략)
삼천만 자매 형제여!
한국이 있어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 독립적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 집단의 사리사욕에 탐하여 국가 민족의 백년대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우리는 과거를 한번 잊어버려 보자.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의심하지 말며 타매(唾罵)하지 말고 피차에 진지한 애국심에 호소해 보자! 암살과 파괴와 파공(罷工)은 외군(外軍)의 철퇴를 지연시키며 조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조출(早出)할 것뿐이다. 계속한 투쟁을 중지하고 관대한 온정으로 임해 보자!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70유(有) 3인 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 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물을 탐내며 영예를 탐낼 것이냐? 더구나 외군(外軍)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냐? 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지(主持)하는 것도 일체가 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는 일신이나 일당의 이익에 구애되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전 민족의 단결을 위하여서는 삼천만 동포와 공동 분투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는 누가 나를 모욕하였다 하여 염두에 두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이번에 마하트마 간디에게서도 배운 바가 있다. 그는 자기를 저격한 흉한(兇漢)을 용서할 것을 운명하는 그 순간에 있어서도 잊지 아니하고 손을 자기 이마에 대었다 한다.
내가 사형 언도를 당해본 일도 있고 저격을 당해본 일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 있어서는 나의 원수를 용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지금도 부끄러워한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단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도는 원비(怨卑)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삼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抑塞)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明察)하고 명일(明日)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심사(深思)하라. (전문 보기)
1948.2.10.~2.12. <서울신문>
그러나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는 격론 끝에 소련 등 공산 진영의 불참과 기권이 이어진 가운데 31개국의 찬성으로 위원단이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감시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어서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은 논란 끝에 ‘1948년 5월 선거 안(案)’을 의결했다.
북행, 분단을 막으려는 마지막 시도도 실패
3월에 김구는 김규식·김창숙·조소앙·조성환·조완구·홍명희와 7인 공동 성명을 발표하여 ‘남한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다음 달에는 북으로 가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했지만, 그는 5월에 빈손으로 서울에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북행은 분단을 막기 위한 마지막 민족적 시도였다.
7월에 그는 북한의 단정 수립에도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고 이듬해인 1949년 1월에는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남한만의 단독 5·10 총선거가 시행되었고 그 결과로 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원했다.
6월 26일, 백범은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격을 맞아 운명했다. 향년 74세. 7월 5일 거행된 백범의 국민장은 우리가 기억하는 한, 전근대와 근대를 아우르며 살았던 세대, 견위치명과 선공후사 따위의 덕목 앞에 옷깃을 여미고 살던, 이른바 풍찬노숙 세대의 마지막 장례였다.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해 대중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경의와 존엄의 의례로 기억될 장의로 겨레는 그를 보냈다. [관련 글 : 백범 김구,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스러지다]
그가 떠난 지 꼭 364일 만에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전쟁이 일어났다. 그것은 “남한 단독선거는 동족상잔을 만들 것”이라고 했던 백범의 섬뜩한 예측이 불행하게도 맞아떨어진 비극적 역사의 진전이었다. 그리고 백범김구가 막고자 했던 민족의 ‘분단’은 지금 75년째 이어지고 있다.
2020. 2.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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