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61년 12월 15일, 예루살렘 법정 아이히만에게 교수형 선고
1961년 12월 15일, 이스라엘 정부가 연 예루살렘의 특별 3심 법정은 반인륜적 범죄로 기소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즉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군에게 붙잡혔으나,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아이히만이 중동지역을 전전하다가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것은 1958년이었다. 그러나 그가 누린 평화는 짧았다. 나치 전범 추적자 지몬 비젠탈(Simon Wiesenthal)과 이스라엘 자원봉사 단체에 의해 정체가 드러난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되어 9일 뒤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이송된 것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스라엘이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하지 않고, 주권을 침해했다고 이스라엘에 항의했고, 들끓던 여론이 잠잠해지자,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의 특별 3심 법정에 아이히만을 기소했다. 재판은 1961년 4월 11일에서 12월 15일까지 계속되었고, 8개월에 걸친 재판은 마침내 아이히만은 교수형을 선고받은 것이었다. [관련 글 :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 마침내 법정에 서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가족과 함께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린츠로 이주한 아이히만은 1932년 비밀 나치당에 입당했고 11월 하인리히 히믈러가 조직한 나치 친위대(SS) 정예부대에 들어갔다. 1933년 바이에른 레히펠트의 ‘오스트리아 군단’이라는 테러리스트 양성학교에 들어간 그는 1934년 다하우에 있는 친위대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베를린의 보안국 중앙본부의 유대인 담당 부서에서 일했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자 아이히만, 사형선고
친위대에서 승진을 거듭한 아이히만은 오스트리아 합병(1938.3.) 뒤에는 유대인 추방 임무를 받고 빈과 프라하에서 근무했다. 1939년 히믈러가 국가안전국을 창설했을 때 아이히만이 베를린에 있는 유대인 담당 부서로 전보된 것은 그가 유대인 관련 임무에서 보인 능력을 인정받았던 듯하다.
1942년 1월 베를린 교외 반제에서 나치 고위관리들이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에 필요한 계획과 병참 업무 준비에 관한 회의를 열었을 때, 아이히만은 이 문제의 책임을 맡았다. 사실상 ‘대량학살(홀로코스트)’을 뜻하는 이 ‘마지막 해결책’의 집행자가 된 것이다.
반제 회의에서 결정된 ‘마지막 해결책’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을 모아 동부로 이송한 다음 그들을 노동자 집단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애초에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옮기려고 했으나 전시에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이 계획은 극심한 고통의 노동과 열악한 생활조건으로 유대인을 ‘자연감소’시키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었다.
반제 회의에서 분명히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이 회의 몇 달 뒤에 폴란드에 첫 번째 독가스실이 설치되면서 ‘상황에 따른 처리’가 ‘학살’로 정리되었다. 마침내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시작된 것이다.
나치가 결정한 가장 효과적인 대량학살 방법은 특별히 만든 가스실로 유대인들을 밀어 넣는 것이었다. 가스실에서 나온 주검은 인근 화장터로 옮겨졌다. 이처럼 아우슈비츠·마이다네크·트레블링카·헤움노·소비보르·벨제크 등의 집단학살수용소에서 죽은 유대인은 모두 400여만 명이었다. 전쟁 기간에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 수는 총 575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관련 글 : 아우슈비츠 해방, 독일과 일본의 역사 성찰의 방식]
한나 아렌트가 본 법정의 아이히만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자신은 단 한 명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고 항변했고, 그것은 형식적으로 ‘사실’이었다. 그는 엄청난 성실성으로 빈틈없이 유대인 수송 업무를 수행했는데, 그가 이송한 유대인들은 수용소에서 모두 죽어갔다.
1932년 나치당에 가입한 뒤 나치 정보부의 유대인 업무 책임자로 일한 아이히만의 일은 유럽 각지의 유대인을 폴란드 수용소로 이송하는 것이었다. 그는 총력전 상황에서 열차를 한 대라도 더 전선에 동원하려는 다른 부서와 충돌해가면서까지 빈틈없이 유대인 수송 업무를 수행했다.
아이히만과 동갑내기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아이히만의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때 ‘악의 평범성’이라는 명제로 성가를 높이긴 했지만,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법정 연극에 속았다는 등의 논란이 있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였다.”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중에서
1962년 5월 31일 교수형 집행, 유골은 지중해에
아이히만의 교수형은 1962년 5월 31일 자정 2분 전 집행되었는데, 사망 시각은 6월 1일로 추정한다. 그의 주검은 화장되었고, 유골은 아이히만의 묘지가 ‘신나치 성지’가 되지 않게 하려는 조치로 지중해에 뿌려졌다.
2019. 12.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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