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혁명의 완수-쿠바혁명군, 아바나에 진입

by 낮달2018 2019. 12. 31.
728x90
SMALL

[역사 공부 ‘오늘’] 1959년 1월 1일, ‘7월 26일 운동’ 주력부대 아바나에 진입

▲ 1960년 3월 5일 쿠바 하바나에서 La Coubre 폭발의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 행진을 하고 있는 쿠바혁명의 주역들.

산타클라라 전투의 승리 이어 아바나 진입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라울 카스트로 등이 이끄는 쿠바의 청년 게릴라 전사들은 1958년 12월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독재자 바티스타는 포르투갈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1959년 1월 1일, 마침내 ‘7월 26일 운동’ 세력의 주력 부대가 아바나에 진입하였다. 그것은 1953년 7월 26일 시작된 쿠바혁명의 완수였다.

 

당시 쿠바는 1933년 9월 ‘하사관들의 반란’으로 불리는 쿠데타 이후 최고 권력자가 된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1901~1973)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1940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44년까지 재임한 바티스타는 1952년 6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 또 출마해 패배할 확률이 커지자 1952년 두 번째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다시 정권을 장악한 그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사실상 1940년 헌법을 폐기했다.

 

“되살아난 마르티의 투쟁 몇 시간 후면 그대들은 승리를 거두거나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와 상관없이 ‘7월 26일 운동’은 결국 승리할 것이다. 우리가 오늘 이긴다면 마르티의 희망은 좀 더 일찍 이루어질 것이다. 100주년을 맞아 1868년과 1895년에 독립운동을 도모한 이들처럼 여기 오리엔테에서 처음으로 ‘자유 아니면 죽음’을 부르짖기로 하자.”
―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기 몇 시간 전에 한 카스트로의 연설 중에서

 

1953년 7월 26일, 몬카다 병영 습격으로 혁명이 시작되다

 

혁명은 1953년 7월 26일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2016)는 그를 따르는 좌익 단체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 운동(MSR) 세력과 함께 쿠바 동남부 산티아고에 있는 몬카다 병영의 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카스트로는 몬카다 병영 습격을 쿠바 독립의 영웅 호세 마르티(José Martí, 1853~1895)의 전통을 잇는다고 자리매김했다. 1953년은 마르티 탄생 100주년이었다.

 

이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 카스트로는 쿠바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피델은 체포된 뒤 기소되어 징역 26년을 구형받았다. 변호사였던 그는 비공개 최후 진술에서 바티스타의 불법적인 권력 장악과 대조적으로 ‘7월 26일 운동’의 저항은 철저하게 합헌적인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쿠바의 문제는 쿠바를 독립시킨 선조들이 공화국을 창건하기 위해 기울였을 때와 똑같은 힘과 의지와 애국심을 쏟을 때만 해결될 것”

“나는 오늘날 모든 법정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점을 폭로하려고 한다. (중략) 온갖 협박과 비열한 광기 탓에 위축된 인간에게는 감옥이 혹독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동료 70명을 살육한 야비한 독재자의 광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라,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역사는 내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La historia me absolverá).”

 

15년 형을 선고받은 피델은 ‘이슬라 데 피노스’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55년 5월, 여론을 의식한 바티스타의 사면령으로 석방된 뒤 바로 멕시코로 망명했다. 망명지에서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를 만나 쿠바 해방에 매진하기로 의기투합했다. [관련 글 : 체 게바라, 투쟁과 해방의 삶 마감하]

▲ 카스트로는 망명지에서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를 만나 쿠바 해방에 매진하기로 의기투합했다.

1956년 11월 24일, 카스트로가 이끈 공격대원 82명은 그란마(Granma, ‘할머니’를 뜻하는 말로 ‘그란마’는 혁명의 모태이자 쿠바 사회주의의 초상(肖像)이 되었다.)라는 작은 요트를 타고 두 번째 해방 전쟁에 나섰다. 이들은 쿠바 동부에 상륙하여 이동한 지 사흘 만에 바티스타 군대의 공격을 받아 일행 대부분을 잃었지만,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의 산악지대에 거점을 확보한 뒤 게릴라 활동을 통해 정부군에 맞섰다.

 

피델은 자신을 바티스타의 대안으로 내세우기 위해 군사 투쟁과 정치 투쟁을 연계시키면서 1957년 2월 중순 《뉴욕타임스》 기자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한바 있는 허버트 매튜스(Herbert Matthews)와 대담했다. 게릴라 대원의 숫자를 과대평가한 매튜스는 카스트로를 “애국심을 지닌 혁명가이자 사회민주주의자”로 묘사하면서 혁명세력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체 게바라는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 1932~1959), 라울 카스트로(Raúl Castro, 1931~ )와 함께 산악 전투에서 탁월한 전과를 올리면서 농민층을 규합하기 위해 애썼다. 1958년 중반께 피델의 무장 병력은 300명에 불과했으나 연말에 이르러선 3000여 명으로 늘었다. 그중 200명 정도는 미국인을 비롯한 외지인이었다.

 

“우리는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그 길은 험난하고 길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있다. 이번에 혁명은 실패하지 않고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
― 1959년 1월 1일, 피델 카스트로

 

바티스타의 독재 정권을 축출할 때 혁명세력은 ‘사회주의 혁명’을 표방하지 않았다. 대신 반제국주의적 민족주권의 회복,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의 실현이라는 투쟁을 지향했다. 그것은 1895년 ‘제2차 독립전쟁’ 도중 사망한 호세 마르티의 투쟁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1956년 11월 쿠바 침투 작전을 앞두고 멕시코에서 정리된 ‘7월 26일 운동’의 강령에 따르면, 혁명세력은 정치적 주권과 자유, 경제적 독립, 그리고 문화적 특성의 통일과 조화를 추구했다. 입법·행정·사법부의 상호균형에 입각한 공화국을 염두에 둔, 그들의 민족주의는 한마디로 독립적 지위를 지니는 ‘쿠바의 재탄생’이었다.

 

1959년 1월의 연설을 통해 ‘휴머니즘적 혁명’을 주창한 카스트로는 곧이어 임금 인상, 임대료 인하, 국유화, 농업개혁을 통해 바티스타 체제와 결별했다. 처음 6개월 동안 혁명 정부는 ‘반혁명분자’(주로 돈에 매수된 부패 관리) 550명을 숙청하고 토지 개혁(소작농에게 토지 소유권 양도, 토지 소유 상한의 법제화와 초과분의 몰수, 대단위 조림지 조성, 대가족 가정에 우선적인 토지 분배, 협동조합을 통한 농민들의 소득 증대와 장비·숙소의 제공, 교육 혜택)을 시행하고자 했다.

 

혁명의 급진화와 대미관계 악화, 미국의 경제봉쇄와 고립

 

이 과정에서만 해도 혁명 정부는 미국에 대해 뚜렷이 적대적 태도를 드러내진 않았다. 그러나 미국인이 쿠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절반과 제당 공장의 75% 정도를 소유한 상황에서 쿠바 혁명세력이 표방한 주권 회복은 불가피하게 미국의 기득권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혁명 정부는 미국 자본 통제 하의 대농장 시스템을 해체하고, 1960년 2월, 소련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자본주의 미국을 등지고 소련산 원유를 들여오는 데 합의했다. 이에 미국은 쿠바 내 미국인 소유 정유 공장들에 정제를 거부하라고 요청했는데, 피델은 즉시 이 정유 공장을 국유화하는 방식으로 맞받아쳤다.

▲ 쿠바의 국회의사당(위)와 거리의 연주자들

이는 이후 미국의 쿠바산 사탕수수의 수입을 전면 중단 → 쿠바의 미국인 소유 기업 국유화 조치, 미국의 쿠바에 대한 무역 봉쇄 → 쿠바, 쿠바 내 미국 소유 은행 국유화 조치로 각각 이어졌다. 결국, 1961년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국가 선언을 하면서 소련과 정식으로 국교를 맺었다.

 

미국은 즉각 쿠바와 국교를 단절하였고 이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모두 쿠바에 대한 외교 관계를 단절하게 되면서 쿠바는 고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1960년 8월 마피아 조직을 통해 카스트로의 독살을 꾀한 것을 비롯해 수십 차례 암살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1962년 10월에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뻔한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쿠바를 볼모로 미국과 소련이 벌인 힘겨루기였다. 이 위기는 미국이 쿠바 개입을 중단하고 터키 배치 미사일을 철수하며 소련은 쿠바에 설치한 중거리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케네디와 흐루쇼프가 극적으로 타협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두 강대국이 주도하는 냉전 대립 속에서 쿠바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방증한다. 이후에도 미국의 적대감이 쿠바의 혁명 정부에 대한 위협으로 기능하면서 이어졌다. 한편, 적대 세력의 상존과 냉전 대립의 고착이 역설적으로 혁명 체제의 안정화에 도움을 준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후 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피델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구현보다는 권력의 집중을 선택했다. 그는 기존의 입법부를 해산하면서 정치적 다원주의의 틀을 제거하는 대신 혁명 정부가 인정하는 각종 위원회와 연맹을 장악하거나 새로운 단체의 창설을 지원했다. 또한, 1961년부터 문맹 퇴치 캠페인과 보건의료 체제의 개편을 추진해 큰 호응을 얻으면서 본격적으로 대중 동원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한편 카스트로의 혁명 동지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의 급진화에 이바지했다. 게바라는 산업의 국유화를 통해 정부의 직접 개입으로 국가 주도 경제 발전이라는 사회주의적 방식을 선택했지만, 그의 산업화 정책은 미국의 봉쇄 정책과 소련의 미흡한 지원 탓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 후 혁명의 급진화에 이바지한 후 라틴아메리카의 혁명투쟁에 참여하고자 쿠바를 떠났다. 쿠바 시내 담벽의 게바라.

게바라는 1950년대 후반 추진된 소련의 ‘경제 개혁’이 ‘제2의 미국’ 건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사회 공헌보다는 물질적 보상과 이윤에 민감하게 된 소련인들도 ‘양키’와 다를 바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개인의 의식에 남아있는 자본주의적 심성과 물질 우선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과 사회 체제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쿠바 정부가 추진한 ‘도덕적 장려 운동’(1965)과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 캠페인’(1966)의 밑거름이 되었다.

 

체 게바라는 혁명의 현장으로 떠나고

 

1965년, 체 게바라는 소련의 패권적 태도를 비난하고 모든 공직과 심지어 쿠바 시민권을 반납한 뒤,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와 남아메리카 볼리비아의 혁명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떠났다. 그리고 그는 1967년 10월 볼리비아에서 사살되어 “게릴라 전사의 신화이자 ‘혁명의 순교자’로서 제3세계 반제국주의 투쟁의 정신적 지도자”, “저항 문화의 표상”(이상 박구병)이 되었다.

 

▲ 피델 카스트로(왼쪽)와 라울 카스트로 형제

미국이 20세기 내내 라틴아메리카 우익 독재의 지원본부 노릇을 했듯 혁명 이후 쿠바는 반제국주의 혁명의 수출기지가 되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1961)이나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1979)과 같은 게릴라 조직의 결성에 자양분을 공급했다. 그것이 한편으로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으로부터 고립을 고착화했다.

 

‘자본주의의 바다에 사회주의의 섬’ 쿠바는 미국 오바마 정부 때 53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했지만,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트럼프는 60년 전 쿠바 피델 카스트로 정권에 자산을 빼앗긴 미국인이 이 자산으로 수익을 낸 외국기업을 상대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헬름스 버튼 법’을 발동하려 한 것이다.

▲ 쿠바 하바나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의 쿠바 의사들(2018). 쿠바는 제3세계 국가 1백여 곳에 의료진을 10만 명 이상 파견해왔다.

쿠바는 미국의 경제봉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의료 체계를 발전시켜 와 국제적 찬사를 받고 있다. 의사 1인당 환자 수를 미국의 3분의 1, 영국의 절반 수준으로 유지하고 제3세계 국가 1백여 곳에 의료진을 10만 명 이상 파견해 8천5백만 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한 것 등은 그 성과였다. 물론 공공의료의 질 저하, 지나친 정부의 통제 등 쿠바의 무상의료 문제는 적지 않다. [관련 글 : 지속 가능한 사회’, 그리고 인간의 걸음]

 

쿠바는 혹독한 경제 제재 속에서도 대안적 발전 모델을 제시하면서 나름의 발전을 유지해 왔다. 혁명 이후 쿠바를 이끌어 온 피델 카스트로 사후, 2011년부터 국가평의회 의장을 맡아온 라울 카스트로가 2018년 물러나고 미겔 디아스카넬(Miguel Díaz-Canel, 1960~ )이 의장이 되었다. 라울이 공산당 제1서기직을 유지하기로 한 2021년 4월 이후, 쿠바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2019. 12. 31. 낮달

 

참고

· 박구병(아주대 인문학부), 쿠바혁명의 짧은 연대기, 웹진 트랜스라틴

· 김준효, 쿠바혁명 진정한 변화를 위한 교훈, 노동자연대

· <위키백과>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