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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반 아이들과 함께 영화 <울지 마, 톤즈>를 보다

by 낮달2018 2019.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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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영화 전용관에서 반 아이들과 영화를 보다

▲ 학년 마무리 잔치를 대신해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영화 <울지 마, 톤즈>를 보았다. 중앙시네마에서 .

지난 금요일 오후, 시내 예술전용관에서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맞춤 영화’ <울지 마, 톤즈>를 보았다. 이 영화가 ‘맞춤 영화’인 것은 내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특별히 청한 영화인 까닭이다. 학년 말이었고 피자나 찜닭으로 1년을 마무리하는 것보다 영화를 한 편 보는 게 훨씬 나으리라고 나는 생각한 것이다.

 

학급 마무리를 고 이태석 신부와 함께

 

마지막 시험이 끝나는 날이었고, 관람료가 반액으로 할인되었으므로 나는 더 많은 아이가 이 영화를 보러 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최종 확인한 관람객은 모두 48명. 우리 반 아이들 28명 외에 이 영화를 함께 본 이는 동료 교사 다섯을 포함 스무 명 남짓. 이는 몇 해 전, 독립영화 <우리 학교>를 본 아이들 100여 명의 꼭 반에 그치는 숫자다. 나는 아이들이 새로운 시청각 경험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실망했다.

 

오후 1시에 상영할 예정이었지만 지각한 아이들 때문에 영화는 15분쯤 지나서 시작되었다. 영화에 대한 기본 정보는 내가 일러준 몇 토막의 얘기뿐, 아이들은 긴가민가하면서 스크린을 주시하였다. 그리고 1시간 30분. 영화관 안의 관객은 우리뿐이었다. 모두가 서로의 숨소리와 떨리는 어깨 따위를 아주 미세하게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 영화는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한 남자의 이야기다.”

 

 

아나운서 이금희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조곤조곤 뇌어주는 한 사나이의 삶을 따라가면서 나는 미소지었고 눈물을 찔끔거렸고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화면에서 펼쳐지는 한 인간이 선택한, 예사롭지 않은 삶과 죽음이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뇌리를 날카롭게 찔러왔기 때문이다.

 

<울지 마, 톤즈>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헌신적 봉사의 삶을 살다간 고 이태석 신부(1962~2010)의 삶과 현지인들의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남부 수단의 톤즈는 국제 구호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가장 열악한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곳인데 이태석은 톤즈에 들어간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2001년 로마 교황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톤즈에 온 이태석 신부는 내전과 질병과 절망의 땅 톤즈에 부임하여 그 땅에 새로운 희망을 심기 시작했다. 그는 톤즈 사람들의 아픈 마음과 몸을 치료하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거기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그는 내전의 틈바구니에서 소년병으로 끌려갔다 돌아온 상처 입은 아이들 손에 총 대신 악기를 들려주고 그들만의 브라스밴드를 조직한 지휘자였으며, 병원과 학교를 지은 건축가이기도 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그의 헌신을 다 표현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의 헌신이 여느 봉사자들과 다르지 않으면서도 그것과 구별되는 ‘무엇’을 아주 강렬하게 느꼈다.

 

봉사자들의 헌신과 희생이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낡은 모범답안 같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화면 속에서 그는 늘 웃고 있었다. 내전과 전염병으로 앓고 있는 나라, 지독한 가난 때문에 인간의 존엄조차 버려진 땅에서 그가 보여준 희망과 용기는 놀라웠다. 그가 보여준 헌신의 원천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지인들의 마음을 열었다.

 

쫄리 신부, 톤즈 아이들 마음속에서 부활하다

 

그는 어떤 치료로 받지 못한 채 버림받은 한센병 환자들에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샌들을 신기겠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백신을 보관하기 위한 냉장고를 쓰기 위하여 태양열로 전기를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또 스스로 연주법을 공부해 가며 아이들에게 악기를 쥐어 주고 그들을 훌륭한 밴드로 만든 사람, 현지어인 딩카어를 열심히 배웠고 밤잠을 줄여가며 환자들을 돌봤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이 계신다면 ‘교회와 학교’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세웠을까를 고민하다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친 사람이었다.

 

그의 그러한 헌신이 ‘눈물을 보이는 것은 부끄럽게 여기는 톤즈의 딩카족’을 울렸다. 그의 부음을 듣고 오열하는 그의 어린 학생들과 톤즈의 주민들, 한센인들의 모습은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일시 귀국했던 이태석 신부는 톤즈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그 병마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 올 1월 14일, 톤즈의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냈던 의사 이태석은 자신의 육신에 깃든 종양을 이기지 못하고 마흔여덟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그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는, 한센인들을 돌보다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마흔여덟에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간 다미앵 신부처럼.

 

그의 부음을 전해 들은 톤즈 브라스밴드는 마을을 행진한다. 밴드의 선두에 선 소년들은 이태석 신부의 사진을 들고 눈물을 흘렸다.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이태석은 마치 그들 마음속에서 부활한 예수 같았다. 아이들이 연주하는 사랑과 평화의 하모니 속에서.

 

그는 먼저 의사가 되었고, 뒤에 신부가 되었다. 그에 앞서 신부의 길을 택한 형과 수녀가 된 누이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그가 사제가 되는 걸 반대했다. 홀로 되어 10남매를 삯바느질로 길렀던 어머니의 반대를 넘는 게 이태석에게는 가장 힘들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뜻을 좇아 아들을 배웅했다.

 

어머니의 배웅은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못했다. 끝내 여든다섯의 노모는 마흔여덟의 아들을 먼저 그 가슴에 묻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의 눈물과 슬픔을 나는 아들딸을 둔 아비로서 읽고 느꼈다. 그의 삶을 이끈 것도 역시 어머니의 고귀한 희생이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nbsp; 이태석 신부의 부음을 전해 들은 톤즈의 아이들은 그의 초상을 앞세우고 이별의 행진을 시작했다 .

“신부가 아니어도 의술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아프리카까지 갔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내 삶에 영향을 준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 어릴 때 집 근처 고아원에서 본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헌신적인 삶 마지막으로 10남매를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어머니의 고귀한 삶, 이것이 내 마음을 움직인 아름다운 향기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마태 25, 40)이라는 성경 말씀이 그가 전 생애를 통해서 실천한 화두였던 것일까. 그는 자신을 삶의 가장 낮은 곳에 내림으로써 가장 높은 사랑을 증명했다.

 

영화가 끝나고 엔드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관객들을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침묵 속에 교차한 온갖 생각들을 밝히며 조명이 들어왔다. 아이들은 눈물에 젖어 있었고, 교사들은 눈시울도 충혈되어 있었다.

 

무언가를 섣불리 말하기가 두려웠다. 나는 아이들에게 극장 바깥에 구세군 자선냄비가 쓸쓸하다고 말하면서 여유가 되면 거길 들렀다 가라고 말하고 아이들과 작별했다. 아이들 몇이 쑥스러워하면서 천 원권 지폐를 냄비에 넣었다. 영화의 여운으로 아직도 상기된 아이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어디서 아이들은 삶의 전범을 배울까

 

어저께 나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백지 몇 장을 건네주었다. 아이들은 거기다 깨알같이 <울지 마, 톤즈>를 보고 느낀 점을 썼다. 대체로 아이들은 글은 ‘감동’과 ‘경이’를, 그리고 그를 본받고 싶다는 희망을 썼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시대에는 삶의 전범, 교훈을 찾는 일도 그리 쉽지 않다.

 

“감동적이고 충격적이었어요. 좋은 영화를 보게 되어서 좋았고 슬픈 영화 보고 처음 울어 봤어요.”

“암 투병 중인 이태석 신부님의 미소는 역설로 나를 울렸다. 까만 아름다움, 누구보다 밝은 웃음들, 감사할 줄 아는 한센 환자, 돈보다 값진 노동……. 지독한 역설의 연속이지만,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보다 값진 ‘진실’이었다.”

“<울지 마, 톤즈>를 보고 나서 울었다. 감동적이어서 울었고 나도 앞으로 그렇게 봉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울었다. 한 시간 삼십 분 동안 영화를 보면 정말 많은 것을 느꼈다. 이태석 신부님처럼 보장된 길을 가지 않고 가난한 나라,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수단으로 갈 수 있구나. 그리고 이태석 신부님의 어머니도 존경스러웠다. 이미 자식 둘을 성직자로 보내놓고도 이태석 신부님을 신부로 만드셨다. 나중에 암에 걸리셔서 수단에 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자신을 걱정하기보단 그 아이들을 걱정하는 마음을 닮고 싶다.”

 

어느새 아이들도 아주 단단한 현실주의자가 되어 있다. 승자독식의 이데올로기가 유일무이한 삶의 목표일 수밖에 없는 이 황당한 세상이 아이들의 스승이다. 정말,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전범이 될 삶은 또 어디 어디에 가면 찾을 수 있을까.

 

 

2010. 12.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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