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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역사 공부 ‘오늘’] 24년 전 오늘, 첫 ‘수요시위’ 열리다

by 낮달2018 202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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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월 8일, 첫 ‘수요시위’ 열리다

▲ 1212번째 수요시위. 소녀상 옆에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 동상이 있다.ⓒ 오마이뉴스

새삼스럽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다. 지금껏 무심히 잊고만 있다가 어이쿠, 이게 그럴 일이 아니로군, 그래서는 안 되지, 하고 안타까움과 노여움으로 우리가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게 된 것은. 물론 그걸 아무도 나무랄 수 없다. 저마다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모두가 ‘헬조선’을 사느라고 힘겨웠으니 왜 지금껏 무심했냐고 타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992년 1월 8일 첫 시위에서 2016년 1212차 시위까지

 

지난 12월 28일의 한일 외교장관 회담의 “일본군 ‘위안부’합의 이후 전개되어 온 국민적 분노와 규탄 분위기 얘기다. 그러나 이번 정부간 합의를 계기로 사람들은 이 해묵은 전쟁범죄에 대한 사과와 배상 요구가 정당한 요구인 만큼 그것을 짓밟은 이 합의의 부당성을 제대로 따져본 셈이다. 그러니 더더욱 그걸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저께, 2016년 1월 6일에도 변함없이 수요시위가 열렸다. 이번 수요시위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정의로운 세계 행동”의 일환으로 일본 도쿄, 히로시마, 캐나다 토론토, 미국 뉴욕, 샌프란시스코,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독일 뮌헨 등 12개국 45개 지역에서 연대 행동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위는 1212번째 시위다. 세상에! 그 숫자의 크기에 놀랄 일은 없다. 단일한 요구와 주장을 건 최장기 시위로 수요시위는 기네스북에 오르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애끊는 주장이 펼쳐진 시간이 여전히 현재형이라는 것은 그 당사자들이 화답하지 않는 끔찍한 침묵의 세월이 그만큼이었다는 뜻으로 읽혀야 옳기 때문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주최한 첫 수요시위가 열린 게 1992년 1월 8일, 바로 24년 전 오늘이었다. 정작 그 첫 시위에는 주인공인 할머니들은 없었다. 당시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시작된 이 시위는 여성 운동가들의 집회였기 때문이다.

▲ 6일, 캐나다 토론토에서도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연대 수요 집회가 열렸다. ⓒ뉴스프로

2차 대전이 끝난 후 무려 반세기 가까이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일본의 전쟁범죄, 그 끔찍한 진실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91년 8월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 있었던 것이다. [관련 글 : <생존자 80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고백, 이후 24년

 

정기 시위로 발전한 이후 수요시위는 정대협이 주최하고, 여성단체와 시민사회단체, 학생들, 풀뿌리 모임, 평화단체, 종교계 등 시민들의 기획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서 방문한 평화활동가를 포함하여 외국인들의 참여도 많았다. 그리고 스물네 해가 지났다. 이 시위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시위’라고 불리게 된 까닭이다.

 

1200회가 넘는 수요시위로 점철된 24년. 그것은 전쟁범죄의 당사자인 일본의 침묵과 나라의 구실을 나 몰라라 한 우리 정부의 직무유기로 이어진 시간이다.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다 하나둘 숨져간 동료들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삼켜야 했던 할머니들이 인고로 삭여온 시간이다. [관련 글 : 부음에서도 밝히지 못한 이름, 말을 잃었다]

 

그러나 정작 할머니들의 아픈 과거를 드러내기까지는 그것을 밝힌 24년보다 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1945년 해방을 맞고 더러는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온 소녀’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피해자가 오히려 숨죽여야 했던 시간들, 일본군의 노예로 살아야 했던 시간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못했던 것이다. [관련 글 : 난징의 능욕’,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1992년 1월부터 시작된 수요시위는 그러니까,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갈무리 해 온 아름답고 경이로운 ‘용기’와 ‘희망’의 시간이었다. 그것은 이들이 겪었던 고통과 통한의 세월로 돌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그 오욕의 역사, 인류사적 범죄를 확인하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고자 한 날이었다. <제이티비시(JTBC)>의 ‘내일’이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이다.

 

1212차 수요집회까지

그녀들은 ‘과거’를 물은 게 아니다.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여성과 약자를 어떻게 착취하는지

전쟁하는 국가를 왜 반대해야 하는지

그녀들 삶을 통째로 희생해

 

우리에게 ‘미래’를 묻고 있는 것이다.

 

    <제이티비시(JTBC)>의 ‘내일’(2016.1.7.) 중에서

졸속 합의, 정치적 담합·…

 

그러나 지난 2016년 세밑에 한일 정부 사이의 합의는 그저께 수요시위 참여자들이 성명서에서 밝힌 대로 “24년이라는 세월 동안 수요시위에서 외쳐 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요구를 철저히 무시한 채, 졸속합의와 정치적 담합으로 끝나버렸다.”

 

그것은 1993년 8월 4일, 일본 자유민주당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내각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이 발표한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담화’(이하 ‘고노 담화’)에 오히려 미치지 못한다. 고노 담화는 전시 일본군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으로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관여하였다고 발표하면서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사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관련 글 : 1993년 오늘, 고노 담화 - ‘정의의 기억’, 그 행방을 묻는다]

 

양국 정부 간 합의에 정작 피해자의 목소리는 없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위한 합의라고 강변하고 일본에게는 ‘국제사회에서의 비판과 비난 자제를 약속’했다. 이는 ‘정치적 담합’으로 끝난 이 협상을 피해자들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는 ‘가해 행위’로 규정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여성가족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모두 238명이다. 그건 물론 피해자 전체 숫자가 아니라 고통스런 과거를 마주하겠다는 용기를 낸 할머니들의 수효일 뿐이다. 수요시위가 1212회에 이르기까지, 24년이 흐르면서 통한을 안고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이 192명이다. 살아계신 할머니는 46명이지만 이들의 평균 연령은 89세고 아흔이 넘은 이들이 20명이나 된다.

 

더 이상 문제 해결을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이유다. 가까운 시일 안에 그걸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을 수 없다. 89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앞장 서기 딱 좋은 나이’(이용수 할머니)라는 할머니들의 의지가 여전하고 전쟁 범죄를 규탄하고 인권과 정의를 추구하는 여론과 세계적 연대는 굳건하기 때문이다.

 

수요시위는 매주 수요일 낮 12시 정각에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열립니다. 참가하실 분들은 사전 참가신청 없이도 시간에 맞춰 오시면 됩니다. 수요시위 현장에서 단체 참가 방명록 작성과 자유발언 순서 참여 신청이 가능하며, 수요시위 주관을 희망하실 경우 미리 정대협으로 연락주세요.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3호선 안국역(6번 출구)이며, 5호선 광화문역을 이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누리집'에서

 

한 번이라도 수요시위에 참여하겠다는 생각은 늘 생각에 그치기만 했다. 학교를 떠나는 3월 이후에는 언제 맞춤한 시간에 상경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 시위가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시간을 다시 아프게 상상해 본다. (2015년에는 대구에도 위안부 역사관이 문을 열었다. [관련 글 : 눈물로 희망을 꽃피우다(희움), 일본군 위안부역사관]

 

 

2016. 1. 8. 낮달

 

 

윗글을 썼던 2016년으로부터 3년이 흘렀다. 수요시위는 계속되고 있지만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수요시위를 시작했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과 조직과 사업을 통합하여 운영하기로 하고 2018년 7월 조직의 명칭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누리집 바로가기)로 정하고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를 신임 이사장으로 선출하였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간의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진 뒤, 2016년 6월 정부는 일본이 출연한 10억 엔으로 여성가족부 산하에 화해 치유재단을 설립했다. 피해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시민단체들은 정부 조치에 즉각 반대했고, 학생들은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이제 25분만 남았다

 

그리고 2017년 박근혜 정부가 탄핵으로 퇴진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3년여에 걸친 투쟁의 결과로 정부는 2018년 11월에 화해 치유재단 해산을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합의 폐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2019년 1월 2일, 제1368차 수요시위는 이화여고 역사동아리 주먹도끼 주관으로 열렸다. ⓒ 정의기억재단

2016년에 피해자 할머니 46분이 생존해 있었지만, 2018년에만 8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 25분밖에 남지 않았다. 소녀상 농성 공동행동이 농성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히고, 정의기억연대가 화해 치유재단 해산 절차를 진행하라고 촉구하는 이유다.

 

2019년 1월 9일에는 1369차 수요시위가 열린다. 매주 차수를 더하는 수요시위는 언제쯤 종료될 수 있을까. 한일 위안부 합의와 강제징용 배상 판결로 인한 과거사 갈등이 군사 분야로까지 번지면서 한일관계가 나날이 악화하고 있는 2019년 현재, 시야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2016년 2월에 학교를 떠나 얽매이는 일상에서 벗어났건만 수요집회에 참석하겠다는 다짐을 아직도 이루지 못했다. 두어 차례 서울에 들렀을 때마다 다른 일이 겹치고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서다. 올에는, 하고 마음을 추스르지만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2019. 1. 8.


2023년 현재,  재판결과를 떠나 ‘정의연’의 30년 헌신이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 지난해 12월 28일, 2022년도의 마지막 시위, 1576차 수요시위가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렸다. ⓒ 정의기억연대

지난 6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정의기억연대 후원금을 빼돌려 쓴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무소속 윤미향 의원에게 징역 5년의 중형을 구형했다. 검찰은 구형 이유로 “고통받아온 할머니들을 위해 모인 자금을 자신의 쌈짓돈처럼 쓰는 등 비난 가능성이 크고, 범행을 주도했음에도 반성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이에 윤 의원은 기부금 사용 과정에서 사익을 추구하지는 않았다며 재판부의 합당한 판결을 청원했다. 그는 최종변론에서 “2년간의 재판을 통해 행정과 회계상 미숙함이 있었음을 뼈저리게 확인했다”라며 그 책임은 모두 대표인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검찰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익을 추구할 의도를 갖고 정대협에서 일하지 않았다”라며 자신과 동료가 다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한 약속을 지키고 평화의 날갯짓을 힘껏 펼칠 수 있도록 지혜로운 판결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이 재판은 다음 달 7일 선고된다. 검찰이 중형을 구형한 대로, 지난 2년간 끊임없이 여론의 질타를 받아온 윤미향과 정의연에 씌워진 혐의의 실체적 진실은 선고일에 일정하게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의 판단이 어떻게 내려지든 간에 그와 정의기억연대가 30여 년 가까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배상을 위해 수행한 헌신과 열정은 부정될 수 없다.

 

나는 윤미향은 물론, 정의연과도 아무런 연고도 없는 평범한 시민이다. 다만, 일제 식민 지배의 역사를 올바르게 청산하는 데 위안부 피해자들의 희생과 착취의 진실이 엄중하게 밝혀지고, 가해자 일본이 인류 앞에 사죄하고 배상하여야 함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왔다.

 

나는 이 재판을 둘러싸고 정치권을 비롯한 여론이 그런 사실조차 희석하는 일방적인 공격으로 일관함으로써 정의연의 활동과 위안부 피해의 진실조차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만약 윤미향에게 죄가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단죄되어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 정의연의 30년 헌신과 위안부 피해자들의 정당한 요구가 왜곡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 1576차 시위에서 2022년에 돌아가신 할머니 3분의 영정 앞에 참가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이제 생존 할머니는 10분뿐이다. ⓒ 정의연

형식적으로는 해방 78년이 가까워지지만,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 역사 때문에라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참 해방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생존자는 10명뿐이다. 일본 정부는 ‘2015년 합의’를 놓고 ‘이미 해결되었다’라고 하며 버티고 있고, 윤석열 정부는 ‘한일관계 개선’을 명목으로 ‘피해자를 배제’한 채,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준수’를 공식 입장이 되었다.

 

정의연을 비롯한 관련 시민사회단체, 야당 등에서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는 가해자 일본기업이 아닌 한국기업 돈으로 보상금을 지급하는 안이 추진되고 있다며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는 이유다. 아직 식민지 역사 청산과 일제 피해자에게 진짜 해방은 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관련 기사 : 평균 94’ 위안부피해 생존자그 절박함 외면하는 정부]

 

2023.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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