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82년 1월 5일 야간 통행금지 해제
1982년 1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0시부터 전년도 12월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통금해제안’에 따라 36년 4개월 동안 시행되었던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미군정청이 공포한 ‘미군정 포고 1호’에 따라 1945년 9월 8일부터 시행되었던 이 제도는 36년 4개월 만에 그 명운을 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6년 동안 존속되었던 제도가 폐지된 것은 1981년 바덴바덴에서 결정된 ‘88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적인 이유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비판을 받아 온 야간 통행금지 제도를 유지하면서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를 치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부는 이른바 ‘3S정책’과 함께 1981년 초 1988 서울올림픽에 대비하여 대한민국의 치안 안정과 안보 확보를 대외적으로 알리려 했다. 그래서 집권 민주정의당을 중심으로 통금 폐지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였고, 국회에서 이를 만장일치로 의결한 것이다.
이날부터 시행된 통금 해제는 경기·강원 두 도 안의 휴전선 접적지역과 해안선을 낀 면부(面部)들을 제외한 전국에 시행되었는데 해제 지역은 국토 면적의 약 82%였다. 1988년 1월 1일부터 나머지 지역에서도 통금이 해제됨으로써 24시간 통행의 자유가 모든 국민에게 주어졌다.
흔히 ‘통금’ 또는 ‘야통(夜通)’이라고 불리어 온 야간 통행금지는 보통 분쟁이나 재난이 있을 때 치안유지를 위해서, 또는 어린이나 청소년의 보호를 위해 제한적으로 시행되는 것이었다. 이 통금의 역사는 꽤 유서 깊다.
“여보시오, 장모. 춘향이나 좀 보아야지.”
“그렇지요. 서방님이 춘향이를 아니 보아서야 인정이라 하오리까.”
향단이 여쭙되,
“지금은 문을 닫았으니 바라(罷漏) 치거든 가사이다.”
이때 마침 바라를 댕댕 치는구나. 향단이 미음 상 이고 등롱(燈籠) 들고 어사또는 뒤를 따라 옥문간 당도하니 인적이 고요하고 사정이도 간 곳 없네.
- <춘향전> 중에서
고전소설 <춘향전>에서 남원에 내려온 어사또가 옥중의 춘향을 찾자고 하자 향단이가 ‘지금은 문을 닫았으니 바라 치거든 가자’라고 하는 장면이다. ‘닫힌’ 남원읍성은 ‘바라’를 친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다. 여기서 ‘바라’는 ‘파루(罷漏)’, 즉 통금 해제를 알리는 종이다.
남원에서도 통금이 실시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시대에는 국경 부근과 도성 한양의 야간통행을 금지하였다. 통행을 금지하는 시간은 인정(人定, 오후 10시 30분)에서 파루(罷漏, 오전 4시 30분)까지였다. 단, 정월 초하루, 정월 대보름에는 행사를 위해 야간통행을 허가하였다.
통금, 조선-식민지 시기 거쳐 관행으로 답습
일제도 식민지시기에 야간 통행금지 제도를 엄격하게 시행했다. 총독부가 제도적으로 개개인의 신체와 시간을 통제·관리함으로써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이나 이데올로기 통제기제로 이용했던 이 제도는 이후 미군정, 전쟁 이후 분단 상황에서 국가안보와 치안유지라는 명분 아래 관행적으로 답습되었다.(이 부분 삭제 : 아래 정보 수정 글 참고)
광복 후에는 1945년 9월 8일부터 미 제24군 사령관의 ‘일반명령’에 의하여 경성과 인천 두 지역에 밤 8시부터 아침 5시까지의 통행금지령을 발포한 것이 처음이었다. 9월 29일에는 일반명령을 개정한 야간통행금지령을 발포하여 ‘미국 육군이 점령한 조선지역 내 인민’에게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 통행금지가 포고되었다.
이 군정법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계승되어 치안 상황에 따라 시작 시간이 밤 11시로 단축되기도 하고, 또는 상황에 따라서 밤 8시부터나 10시부터로 연장되면서 지켜져 왔다. 통금제도는 한국전쟁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어 계속되다가, 1954년 4월 1일 ‘경범죄 처벌법’으로 법령화되었다.
경범죄 처벌법은 “전시·천재지변 기타 사회에 위험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때 내무부 장관이 정하는 야간통행 제한에 위반한 자”라 규정된 야간 통행금지 위반자를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
자정부터 시행되는 통금에 앞서 매일 밤 10시에 라디오 방송에서는 여자 성우의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라는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지막 버스를 타야 할 시간이 머지않았음을 예고하는 것이어서 1시간 뒤부터는 막차와 택시를 타려는 사람들로 거리는 시끌벅적해지곤 했다.
자정이 되면 사이렌 소리와 함께 거리 곳곳에 철제 바리케이드(방어벽)가 설치되고, 곧이어 2인 1조 방범대원들의 호각 소리, 이들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통금 위반자가 방범대원에게 잡히면 즉결심판에 넘겨져 과료나 구류 처분을 받아야 했다.
죄목은 ‘야간 통행 금지법 위반’이었다. 1980년대 이전에 젊은 시절을 보낸 이라면 이 ‘야통’으로 즉심에 넘겨져 과료나 구류 처분을 받은 기억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통금은 크리스마스이브, 석가탄신일, 12월 31일 제야(除夜)에는 반짝 해제되어 그날엔 모처럼 밤거리가 젊은이들로 붐비기도 했다.
이 제도 시행 당시에는 항공기도 김포나 김해공항에 밤늦게 도착하면 착륙할 수 없어 일본이나 대만, 홍콩, 알래스카, 하와이 등지로 회항하기도 했다는데 지금으로선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수 배호의 노래 ‘0시의 이별’(1971)은 발표하자마자 금지곡이 됐는데, 그것은 ‘남녀가 0시(자정)에 다닐 수도 없는데 헤어지는 것은 통금 위반’이기 때문이었으니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다.
국민기본권으로 돌려받은 ‘4시간의 자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있어 통금 제도의 폐지는 여러 차례 논의되었다. 1964년에는 ‘비교적 치안이 평온하다’는 제주도와 울릉도가 해제되었다. 1965년에는 충청북도, 1966년에는 경주시, 온양시, 부산 해운대구, 경기·충남 지역을 제외한 전 도서 지역, 수출산업과 관련된 수송 수단과 일부 관광지가 해제되었다.
37년 만에 통금이 해제되면서 자정 이후까지 버스와 지하철이 연장 운행됐고, 택시 영업도 철야를 할 수 있었다. 범죄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큰 혼란은 없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돌려받은 4시간의 자유’를 소화하지 못할 만큼 시민들의 의식과 역량이 낮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유증도 없지 않았지만 기대 이상의 경제적 효과도 있었다. 서비스 부문의 고용이 늘고 얼어붙은 기업 마인드와 소비심리가 살아났다. 비행기의 이착륙 시간의 제한이 없어지면서 바이어와 관광객의 입국도 늘었다. 우리 경제는 1982년 7.2%, 1983년 10.7%라는 고성장을 기록하며 2차 오일쇼크와 10·26 사건의 여파로 인한 침체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한편, 통금 해제 무렵부터 디스코텍과 카바레, 룸살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대형 폭력조직이 생겨났으며 퇴폐 향락문화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에너지 사용량이 증가하였고,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한 청소년 범죄의 발생 등 사회적인 문제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역기능 측면에도 불구하고 야간 통행금지 해제로 국민의 기본권과 자율성 회복이 이루어진 것의 상징적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특히 그간 유보되었던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회복되고, 인신구속 수단이 줄어든 것은 긍정적인 작용이었다.
통금의 본질은 ‘사상의 통제와 저항 억압’
1980년 이후 세대들에겐 만화 같은 얘기지만 현실적 자유를 박탈하는 제도로서 통금은 일상적으로 사회 공공질서 유지와 질서 확립의 책임을 담당했지만, 근본적으로 사상 통제, 국가안보 수호, 정치적 저항 세력 억압을 위해 국민의 시·공간을 제한하는 기능을 맡았다.
일제가 시행한 식민지 국가폭력은 야간 통행금지 제도의 처벌과 감시로 이어져 해방 후에도 사회 전반의 자유를 규율했고 이후 계엄법과 국가보안법으로 분화·적용되는 주요한 동력이 되었다. 국가가 강제하는 시간 규율은 한국인의 일상에 만연한 ‘빨리빨리 문화’, ‘새치기’ ‘조급증’ 등의 사회적 관습에 영향을 미쳤다.
통금 해제 이후의 세대들은 그것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일상을 규율하는 것은 이전의 권위주의 시대에 배태된 사회적 관습과 문화라는 점에서 그것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국가가 강제로 회수한 ‘야간 4시간’은 한 사회의 관습을 바꾸어낼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2018. 1. 4.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국가기록원, ‘야간 통행금지와 해제’
이 글의 ‘정보 오류’를 수정합니다
이 글은 2018년에 썼다. 관련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 이른바 ‘팩트(fact)’를 중심으로 쓰되, 객관적 평가에 꽤 신경을 쓰는 편이다. 자료도 여러 개를 교차 검증하는 방식으로 확인하고,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배제하기도 한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옮겨 쓰는 건 매우 무책임하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올 1월에 어느 독자께서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시대에는 통행금지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근거 자료를 제시’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아, 이게 오류였던가 싶어서 몇날 며칠을 검색해 봐도 쓴 글의 출처를 찾지 못했다. 단, 주요 자료로 인용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당 항목을 보고 썼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일제강점기에는 ‘통금’이 시행되지 않은 게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으로 간신히 답을 달았다.
[관련글 : https://qq9447.tistory.com/guestbook]
야간통행 금지제도는 일상적으로 사회 공공질서 유지 및 질서 확립의 책임을 담당하는 역할로 작용했으나 근본적으로 사상 통제, 국가안보 수호, 정치적 저항 세력 억압을 위해 국민들의 시·공간을 제한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야간통행 금지제도 시행 아래 일반 시민들은 일상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일제의 감시와 처벌 방식은 야간통행 금지제도의 처벌과 감시 양식으로 이어져 식민지 국가폭력은 해방 후에도 사회 전반에 지속되었고, 이후 계엄법과 국가보안법으로 분화·적용되는 주요한 동력을 제공해 왔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야간통행 금지’ 중에서
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야간통행 금지’ 항목의 기술은 내가 일제강점기에도 야간통행 금지제도가 있었다고 오해하게 한 부분이다. 집필자의 의도는 ‘일제의 감시와 처벌 방식’이 ‘야간통행 금지제도의 처벌과 감시 양식’으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나는 이를 ‘제도의 계승’으로 이어진 것으로 오독(誤讀)했다.
이 오독은 다음의 기술에서 결정적으로 굳어졌다. “일제에 의해 탄생하여 답습되어 36년 이상 시행”했다는 기술을 달리 해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의 경우 국가비상사태에 한하거나 미성년자 안전을 위해 일시적이고 보호적인 성격의 야간통행 금지를 실시하는 데 반해, 36년 4개월간 우리 사회에서 시행된 야간통행 금지제도는 집행 기간이나 시행상 매우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에 의해 탄생하여 답습되어 36년 이상 시행한 야간통행 금지제도는 식민지, 미군정, 전쟁 이후 분단 상황, 군부독재 등의 상황으로 계속되었다. 냉전체제 안에서 국가안보와 치안유지라는 명분 아래 불가피하게 도입된 이후 점차 국가가 제도적으로 개개인의 신체와 시간을 통제·관리함으로써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이나 이데올로기 통제기제로 변형하여 사용한 것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야간통행 금지’ 중에서
이후, 일제강점기의 통행제도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자료가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국회도서관에서 논문으로 검색해 발견한 자료에서 일제강점기의 제도를 설명한 부분을 발견했다. 이 자료에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에 야간통행을 전면 금지하지 않은 이유”를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조선의 갑오개혁 시기에 야금이 철폐된 이후에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에 야간통행을 전면 금지하지 않은 이유는 식민지 조선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근대화의 이름으로 조선에 식민지 체제를 공고히 하고, 일본제국주의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함을 표방하기 위함이었다. 근대적 제도와 근대적 시간체제 등은 그를 뒷받침하는 도구였고, 근대화와 합리화의 명분 하에 식민지 조선인의 일상 전체가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1982년에 행해진 야간통행 금지제도의 해제는 신군부 정권이 스스로를 정상화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대내외적으로 개방과 대화합을 표방하면서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국민 동원을 하기 위한 통치 기술이었다. 야간통금 해제가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탓에 발생할 치안 문제와 파행성까지 ‘자율’을 새로운 통치 규율로 내재화하기 위한 조건으로 고려되었다. 시간 이용의 금지와 해제는 통치 권력이 그것을 통해 지키고 표방하려고 하는 바에 따라, 그리고 안전장치의 확보 여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 김학선, 금지와 해제의 통치성 : 야간통행 금지제도를 중심으로, <역사 연구> 제40호(2021.1.)
따라서, 위의 글에서 빨간색으로 표시한 문단은 삭제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야간통행 금지제도가 시행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간 불명확한 자료로 말미암아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점에 대해서는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앞으로 정보를 다루는 데 좀 더 유의할 것임을 약속드린다.
2024. 8.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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