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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의열단원 김지섭, 일본 궁성에 폭탄을 던지다

by 낮달2018 202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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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의열단원 김지섭 니주바시(二重橋) 의거

▲ 뒤늦게 김지섭 의거를 보도하고 있는 당시 <시대일보> 기사(1924.4.25.)

1924년 1월 5일 오후 7시, 김지섭(金祉燮, 1884~1928)은 일본 궁성(宮城)의 다리인 니주바시(二重橋) 부근에서 궁성의 문인 사쿠라다몬(櫻田門)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가슴에 품고 있는 폭탄의 무게를 가늠해 보면서 자신의 동선을 계산해 보았다.

 

김원봉의 의열단이 1924년 초 도쿄에서 제국의회가 열려 일본 수상을 비롯한 고위 관료와 조선 총독이 참가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은 1923년 12월이었다. 의열단은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구들을 처단하고 일제의 만행을 온 천하에 알리고자 했다.

 

김지섭, 폭탄을 품고 석탄선을 타다

 

결사 대원으로 선발된 김지섭은 12월 20일, 상하이 푸둥에 정박 중인 미쓰이(三井) 화물 소속의 석탄선 텐조야마마루(天城山丸)을 타고 일본으로 밀항하기로 했다. 아편 밀수업자인 나카무라 히코타로(中村彦太郞)로 신분을 위장한 그는 폭탄 3개를 행낭에 숨긴 채 배의 밑창에 숨어 있어야 했다. 그는 그 열악한 상황에서 자신의 결의를 한시 한 수에 담았다.

 

평생에 품은 뜻

표연히 이 한 몸이 천릿길 떠나갈 때
배 안엔 모두 원수이니 벗할 이 뉘 있는가.
기구한 나라 앞길 촉보다도 험난하고
분통한 겨레 마음 진나란들 더할쏘냐.
오늘날 몸 숨기고 바다 건너는 사람은
그 몇 해를 참으면서 와신상담을 하였던가.
이미 걸은 이 걸음은 평생의 뜻이기에
다시는 고국을 향해 돌아갈 길 묻지 않으리.

 

그는 햇볕 구경도 못 한 채 하루 한두 번 주는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열흘을 버텼다. 상하이를 떠난 배가 일본 규슈 후쿠오카의 야하타(入幡) 항에 닿은 것은 10일 만인 12월 31일이었다. 김지섭은 바로 도쿄로 향하지 못하고 며칠 동안 현지에서 머물러야 했다. 그가 가진 것 가운데 돈 될 만한 것을 팔아서 자금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1924년 1월 5일 새벽, 도쿄에 도착한 김지섭은 이미 기차 안에서 의회가 휴회 중이고 또한 의회가 언제 개회될는지도 모른다는 신문 보도를 읽고 거사 계획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래 계획은 제국의회에 돌입해 정부 위원석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조선 강점의 원흉들을 일거에 폭살하려는 것이었다.

 

터지지 않은 3개의 폭탄

 

그러나 여비도 넉넉지 않은 데다가 언제 개회할지 모르는 제국의회를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차선책으로 그는 일본 궁성에 잠입하여 일왕을 폭살하면,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한 세상에 알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거사 대상을 변경하기로 했다.

▲ 김지섭 의사의 거사가 이루어진 니주바시(二重橋) 전경. 일본 궁성 앞 다리로 지금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 김지섭 의거를 소상히 전하고 있는 <조선일보> 호외. 1924.4.24.

김지섭은 일본인 관광객을 따라 니주바시 앞으로 나아갔다. 궁성 경비 경찰이 다가와 밤에는 궁성 관광을 금하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일본인은 돌아섰으나 김지섭은 현장에 그냥 남아 있었다. 수상하다고 여긴 경찰이 누구냐고 묻자 김지섭은 폭탄 하나를 꺼내 그에게 던지고 쏜살같이 다리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다리 저편에서 군인 한 명이 나와 총을 겨누고 길을 막았다. 김지섭은 이내 두 번째 폭탄을 니주바시 한복판에 던졌으나 폭탄은 정문 석책 밖에 떨어졌는데 역시 불발이었다. 김지섭은 군인과 격투를 벌이며 남은 폭탄 하나를 던졌으나 그것마저도 불발이었다.

 

김지섭은 곧 체포되었고 그의 밀항을 도운 일본인들도 잇달아 검거되었다. 그는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거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그는 무죄면 무죄, 사형이면 사형이지 무기징역이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공소를 제기했다.

▲ 지바(千葉) 형무소. 김지섭은 1928년 2월 20일, 여기서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인 1925년 8월, 도쿄 공소원 판결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고, 1927년에는 20년으로 감형되었다. 김지섭은 1928년 2월 20일, 지바(千葉) 형무소에서 뇌일혈(뇌내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4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는 의열단원이자 고려 공산당원이었다

 

김지섭은 안동시 풍산읍 오미동의 풍산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호는 추강(秋岡). 어릴 때부터 재주가 남달라 학문에 출중했다. 21세 때에 경북 상주보통학교 교원을 거쳐 금산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김지섭은 약산 김원봉, 곽재기(1893~1952, 1963 독립장) 등 동지들과 교유했다. 그는 국내보다 해외로 나가 구국 활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1920년에 중국 만주로 들어갔다. 연해주, 북경, 상해를 돌며 독립의 길을 모색하던 그는 1922년 여름 상해에서 의열단원이 되었다.

 

김지섭은 같은 해 4월에 장건상(1882~1974, 1986 대통령장)과 상의하여 소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이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충당할 의도로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당원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민족대회에 참석하였으며 그 뒤 국민대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 김지섭의 젊은 시절. 아직 앳된 티가 역력하다.
▲ 금산법원 서기 시절의 김지섭 부부(왼쪽)와 고향의 친구들
▲풍산읍 오미리의 오미광복운동기념탑. 김지섭과 김재봉, 김순흠 등 이 마을 출신 24명 독립운동가의 약력과 업적을 새겼다.

그의 본격적인 의열단 활동은 1923년 3월 국내 일제 기관들을 파괴하기 위해 폭탄을 반입하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폭탄 36개를 상해에서 톈진(天津)으로 수송하여 이를 국내로 가져오기 위한 이 작전에는 김시현(1883~1966), 유석현(1900~? 1977 독립장), 일제 경찰 황옥(1885~?) 등이 참여하였다. (영화 <밀정>의 중심 소재가 된 거사, 관련 글 : 의열단 김상옥,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 1920년대의 의열투쟁은 1920년부터 1926년까지 이어졌다.

조선총독부와 경찰서 등 일제의 통치기관을 파괴하려는 이 거사는 사전에 일제에 탐지되어 김시현 등 동지 3명이 검거되었다. 김지섭은 교묘한 변장술로 위기를 모면하고 김원봉·장건상 등과 함께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이 사건은 총독부 밀정정책의 하나로 경기도 경찰부장 시라카미 유키치(白上佑吉)가 한인 경부(警部) 황옥을 상해로 밀파하여 극동민족대회의 회의내용과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탐지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일망타진코자 하였던 가공할 음모였다.

 

황옥은 독립운동가로 가장하고 김시현 등과 동지가 되어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였다. 안둥(安東)에서 서울로 폭탄을 수송할 때에는 그가 국경 시찰이란 명목으로 공용출장의 허가를 받아 폭탄을 포장한 궤짝에 ‘총독부경부공용하물(總督府警部公用荷物)’이란 표찰을 달아 무사히 운반할 수 있었다.

 

일경은 황옥의 정보제공으로 계획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일거에 전원을 체포·투옥하였다. 이 사실은 이 사건으로 붙잡혀 법정에 선 유석현·이현준·황옥의 법정 진술로 드러났다.  [관련 글 : 영화 <암살>, 혹은 역사에 대한 성찰]

 

니주바시에 폭탄을 던진 거사가 기획된 것은 1923년 9월 도쿄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 시기의 조선인 학살 때문이었다. 대지진으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일제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우리 동포 6,600여 명이 학살한 것이다.

▲ 경북 안동시 영호루 앞에 세워진 '추강 김지섭 선생 기념비'

그러나 사전 준비도, 훈련도 없었던 이 거사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으로 밀항하는 과정에서 열흘 동안 바다의 습기에 노출된 폭탄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거사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일제에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이 의거는 일본인에게 신성 불가침적 존재인 천황에 대하여 폭살을 기도했다는 점에서 일본인들을 경악시켰다. 일제는 내각이 사퇴하고 새 내각이 들어서면서 책임 관료를 징계하고 경찰 수뇌부를 파면했다.

 

김지섭은 이 사건으로 부쳐진 공판에서 장문의 진술서로 일제의 침략정책을 통박한 다음 이어서 “이번에 내가 취한 행동은 침략 정치에 도취되고 있는 왜국(倭國) 관민을 각성시키고 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당당하게 소신을 밝혔다.

 

그는 이어 총독 정치의 악랄성과 비인간성을 폭로하고 동양척식회사의 착취와 동포 생활의 빈곤을 들어 일제의 학정을 통박한 다음 “한국 사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선언서에도 명시한 바와 같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항쟁할 것이다”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끝으로 그는 자기에게 사형이 아니면 무죄 석방하라고 주장하였다.

 

궁성 공격은 이봉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의 상징인 일왕에 대한 한국인의 공격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는 8년 후 이봉창(1900~1932)의 의거로 이어진 것이다.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사쿠라다몬(櫻田門) 부근에서 히로히토 일왕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다행히 터지긴 했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수류탄 폭발로 마차가 부서지고 일본 고관대작 두 명이 부상하였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 청년이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사건은 이후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관련 글 : 1928년과 1932년 오늘, 조명하와 이봉창의 순국]

 

일제 강점기 내내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등이 조직해 낸 의거들 가운데 폭탄 불발로 실패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거사의 성패와 무관하게 그것은 영화 <암살>의 명대사처럼 ‘끝까지 싸우고 있다’는 걸 우리 자신과 일제에 끊임없이 깨우쳐 주는 것이었다.

 

 

2017. 1.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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