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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블로그 글 1000편에 부쳐

by 낮달2018 2019.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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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 1천 편을 썼다

▲ 2006년 12월 15일, 블로그에 첫 글을 올리면서 내 일천 편의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지난 10일에 올린 글 “<오마이뉴스> ‘로마자 제호’를 다시 생각한다”로 내 블로그에 올린 글은 모두 일천 편이 되었다. 2006년 12월에 블로그를 연 지 햇수로 7년 만이다. 아직 돌이 되려면 두 달쯤 남았지만 성글게 계산해도 해마다 평균 140여 편, 2~3일에 한 편씩 글을 써 온 셈이다.

 

1천 편, 2006년에서 2013년까지

 

블로그에 첫 글을 쓴 때는 2006년 12월 15일, ‘카메라, 카메라’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처음 사게 된 디에스엘아르(DSLR) 카메라를 기다리고 그것을 받아든 기쁨과 설렘을 두서없이 적었는데, 그때 그걸 읽으러 내 오두막을 방문한 이는 하루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최초로 쓴 기사는 2006년 12월 7일에 쓴 ‘물돌이동(河回) 주변을 거닐다’였다. 하회마을 건너편의, 화산서원과 겸암정사를 둘러본 글이었다. 글보다는 디에스엘아르 카메라를 사기 전이라 똑딱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지만 거기 담긴 가을 풍경이 좋았다.

 

긴가민가하면서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등록하고 첫 기사를 송고할 때만 해도 나는 그랬다. 주변의 유적지나 명승을 찾은 그만그만한 답사기였으니 기사가 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송고하는 글마다 쉽사리 기사가 되면서 나는 꽤 고무되었던 것 같다.

 

기사 쓰기에 재미를 들이면서 편집부의 기사 청탁도 더러 받았다. 답사기로 시작한 기사는 서평, 문화, 교육, 사회 부문까지로 조금씩 보폭을 넓혀갔다. 그러나 50여 편을 넘기면서부터 기사 쓰기의 가속도가 두드러지게 줄기 시작했다. 쓰기에만 열중해 있다가 어느 날부턴 내가 쓴 기사의 가치를 저울질해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쓰는 일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 써도 그만이고 쓰지 않아도 그만인 기사, 무어 대단한 발견이나 깨달음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닌데 같은 소리를 나는 시방 중언부언하고 있는 건 아닌가. 기실 별다른 알맹이도 없는 이야기를 자가 발전하여 그럴듯하게 포장만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기사를 쓰면서 정작 내가 ‘사실(fact)을 전달’하는 것보다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런 회의를 부추겼다. 가끔 그만그만한 이야기로 귀중한 지면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도 했다.

 

시민들이 쓴 ‘그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인정해 주는 <오마이뉴스>의 편집방침은 기본적으로 ‘공적 기사’와 ‘사적 발언’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걸 무심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 저절로 기사 쓰기에 손이 뜨기 시작했다. 그게 햇수로 7년 차 뉴스 게릴라로서 내가 쓴 기사가 고작 110편에 그치는 이유다. <오마이뉴스>가 블로그 기사를 메인 면에 배치하고 거기에 원고료를 지급하는 체제로 바뀐 것도 한몫했다. 내가 쓴 천 편의 글 가운데 473편이 원고료를 받은 기사가 되었는데 그중 363편은 블로그 기사다.

 

지금도 나는 신문 기사와 블로그 기사를 나누는 기준과 경계를 그것이 가진 공공적 성격에다 두곤 한다. 개인적 소회를 중심으로 펴 가는 이야기는 블로그 기사로, 공적 성격을 지닌 사회적 관심사를 다룰 때는 신문 기사로 쓰는 형식으로 말이다. 물론 이 경계는 모호할 때가 더 많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블로그로 쓰는 글은 기사로 쓰는 것보다 훨씬 덜 무겁고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오마이뉴스>에 실린 내 첫 기사는 ‘하회’ 주변을 다룬 답사기였다.

블로그를 열고 무려 7년이 넘도록 이 오두막을 유지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나는 한 가지 일에 싫증을 잘 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일이든 집요하게 추구하는 성격도 아니다. 그런데도 일곱 해 가까운 시간 동안 꾸준히 글을 써서 일천 편에 이를 수 있었던 끈기는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무엇보다도 새내기 블로거를 환영하고 격려해 준 좋은 이웃들을 빼놓을 수 없다.

 

블로그를 유지하면서 일정한 기간마다 새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루 조회 수가 기천을 넘고, 달리는 댓글이 두 자릿수를 넘기면서 그런 강박은 심해졌다. 그러나 가능하면 그걸 강박으로 느끼지 않으려 애썼고, 억지로 글을 짜내는 건 삼갔다. 해를 넘기며 활동을 접는 이웃이 는 데다 교류가 줄어들면서 그런 압박으로부터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글쓰기, 세상을 향한 ‘말 걸기’이자 ‘성찰의 과정’

 

▲ 처음으로 머리기사로 오른 글(2007.10.8.)

무엇보다 나는 내 ‘글쓰기’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글쓰기’를 세상을 향한 말 걸기이며 동시에 내 삶에 관한 성찰의 과정이라 여기려고 했다. 자신의 눈에 비친 삶과 세상을 그것대로 그려낼 뿐, 거기 특별한 뜻을 붙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기사든 블로그 글이든 그것이 설사 자신을 한껏 만족하게한다고 할지라도 자기만족 이상의 의미를 매기지 않았다.

 

그것이 꾸준히 블로그를 유지하는 걸 놀라워하는 이에게 그냥 ‘소일거리’일 뿐이라고 정리하고 ‘책을 내지 그러냐’는 주변의 공치사를 단칼에 자르는 이유다. 나는 7년 동안이나 지치지 않고 아직도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대견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게 다다.

 

나는 이 1,000이라는 숫자를 자랑하기보다 그런 시간을 꾸려온 자신을 치하하려고 한다. 천 편의 글을 쓰면서도 허술하게, 손쉽게 끼적거린 글은 없다는 데 대해서도 다행스럽게 여긴다. 압박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설렁설렁 쓰지는 않았다. 글을 쓸 때마다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으려 애썼다. 여러 번의 퇴고 과정을 거쳤고 잘못된 글을 고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만큼 더 나아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백 편을 더 쓰든, 천 편을 더 쓰게 되든 지금까지 글을 써 오면서 느끼고 갈무리했던 마음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이 변하는 만큼 나이 들면서 그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길도 여물어가고 늙어가겠지만 그 세상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살피고자 하는 내, 글쓰기에 관한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웃들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해서 거는 약속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13. 10. 15. 낮달

 

 

 

카메라, 카메라

그저께, 그러니까 12월 8일, 금요일에야 내 오랜 기다림이 마침표를 찍었다. 그날 오전에 무려 20여 일 만에 내 첫 D-SLR 카메라 GX-10이 도착한 것이다. 연애하던 때를 빼면 기다림 따위에 이만큼 목을 늘어뜨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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