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의 은사 도광의 시인에게서 배우며 성장한 문인들
시인 도광의(1941~ ) 선생님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다. 그는 우리들 신입생에게 국어를 가르친, 학교 문예 동아리 ‘태동기(胎動期)’의 지도교사였다. 무엇보다 당시 내가 가지고 있었던 병아리 눈물만 한 문재(文才)를 확인해 준 분으로 그를 기억한다.
그해 가을, 선생께서 야심 차게 추진한 교내 현상문예 공모에서 별 기대 없이 내가 써낸 소설이 당선작이 되었다. 나는 포마이카 처리가 된 세련된 상패에다 고급 손목시계까지 부상으로 탔는데, 선생님께선 내 작품에 대해 은근히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듯하다.
성년으로 가는 어느 시기를 문학 소년으로 보낸 이들은 적지 않다. 사춘기의 문학에 대한 열망은 마치 운명처럼 다가와 열몇 살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지 모른다. 내게 그것이 찾아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나는 늘 허겁지겁 책을 읽어댔고, 습작 노트에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요령부득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곤 했다.
도광의 시인
· 1941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경북대 국문과를 졸업
· 196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비 젖은 홀스타인’, ‘해변에의 향수’가 당선
· 1978년 ≪현대문학≫에 ‘甲骨길’ 등 6편이 추천되어 등단
· 1982년 대구문학상 수상
· 2003년 한국예총예술문화상 수상
·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
· 시집 <甲骨길>(흐름사, 1983)
· 시집 <그리운 남풍>(문학동네, 2003)
중학교 3학년 가을이었다. 대한적십자사가 주최하는 시내 중고생 백일장에 나는 학교 대표로 참가했다. 주어진 글제는 ‘수학여행’이었다. 마침 전년도의 수학여행에 불참했던 나는 수학여행에 참가하지 못한 아이의 이야기를 썼고, 뜻밖에 그게 1등 상에 뽑혔다. 대구 적십자사 사장실에서 커다란 트로피까지 타고 돌아와 한동안 나는 거기 잔뜩 고무돼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나는 먼저 문예 동아리 ‘태동기’에 가입했다. 세상에, 고작 고등학교 동아리 주제에 ‘태동기’는 ‘문학동인회’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는데, 그게 썩 마음에 들었다. (그 당시 대구 시내의 모든 문예 동아리는 동인이라는 이름을 썼다.)
우리는 해마다 대구 YMCA의 좁고 어두운 복도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당시 우리 동아리 '태동기'는 신라문화제 등 각종 백일장에 참가하여 여러 명의 입상자를 내기도 해서 대구의 학생 문단에서 꽤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학교에는 ‘문예실’이라는 이름의 교실 한 칸짜리 동아리 방이 있어서 우리는 점심시간과 방과 후의 많은 시간을 거기서 보내곤 했다. 그러나 거기 모여서 우리가 글을 쓰거나 작품 윤독회를 했던 기억은 없다. 우리는 늘 일상적 잡담과 시건방진 요설, 문학적 일탈의 모의로 숱한 시간을 보냈다.
도광의 선생님은 180cm를 넘는 훤칠한 키의, 굉장한 귀공자형 미남이었다. 17살배기 까까머리 눈에 그는 시인이란 모름지기 이런 모습을 갖추어야 마땅하다는 어떤 ‘전형성’으로 비쳤다. 수업 시간에 그는 가끔 자신의 시를 줄줄 외면서 강의하기도 했는데 그 서정성 넘치는 시구를 들으며 나는 설익은 문학적 열정을 키워나갔던 것 같다.
불행하게도 나는 시는 습작조차 해 본 적이 없어서 학교에서의 공식적인 만남 외에 개인적으로는 선생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3학년 때 고향으로 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자연스레 소식이 끊겨 버렸다. 군에서 제대한 후 시내에서 한번 잠깐 뵙고 인사를 드린 게 고작이다. 그러고 30년이 훌쩍 지났다.
그간 먹고사느라고, 교육운동을 한답시고 싸댄 세월이 제법이었다. 벗들을 통해 소식을 간간이 듣기만 했지 인사 한번 여쭙지 못했다. 10여 년 전에, 후배들이 선생을 모시는 만남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도 가지 못했다. 올해로 예순여덟. 오래 뵙지 못했지만, 칠순을 바라보는 풍채 좋은 노시인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수십 년간 남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니 제자는 좀 많을까. 선생께 시를 배운 제자들 가운데 안도현을 비롯한 여러 명이 시인이 되었다. 쉰이 넘어서 시집(식빵 위에 내리는 눈보라, 나남, 2007)을 상재한, 나와 동기인 홍승우(5대), 시집 <홀로서기>로 유명한 서정윤(7대), 더 설명이 필요 없는 안도현(10대), 그리고 베스트셀러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를 낸 이정하(11대) 등이 그들이다.
후배 중 서정윤은 나와 학교를 같이 다녔지만, 안도현은 내가 제대했을 때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면서 처음 만난 사이다. 어쩌다 그와는 해직과 복직 동기가 되어서 가끔 안부를 나누곤 하지만, 학창시절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니 다소 서먹하기도 한 사이다. 그러나 나는 이정하는 만난 적도 그의 글을 읽은 적도 없다.
선생께서 ‘나만큼 제자 중 시집 많이 판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라’는 농을 하시곤 할 정도로 모두 재주가 출중한 친구들이다. 소설 쪽으로도 박덕규(8대)라는 친구가 있어 장편소설을 펴냈고 대학에서 문예 창작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도 나는 꼭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제자들과는 달리 1966년에 일찌감치 등단하였지만, 선생께서 첫 시집을 낸 게 1983년이다. 그것도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2003년에 ‘문학동네’에서 두 번째 시집 <그리운 남풍>을 내셨는데 나는 지난 5월에야 이 시집의 존재를 알고 뒤늦게 이를 샀다. 사는 게 바쁘다고는 하지만 제자로서 무심했던 걸 뉘우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운 남풍>에는 30년도 전에 선생께서 수업 중에 줄줄 낭송해 주시던 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시들은 첫 시집에 실렸을 터이다. 선생의 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외람된 일이다. 선생의 시에 대한 소개로는 시집 뒤표지에 실린 김명인(시인, 고려대 교수)의 글로 대신한다.
“서정성이 한국시의 기본이라 해도 도광의 시인의 서정은 독특하면서도 편안하다. 서정을 관통하는 그의 정신이 인간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도광의 시인의 시는 늦은 가을 감나무에 높게 매달려 시리고 푸른 하늘에 대비되어 붉게 반짝이는 홍시처럼 외롭게 보이지만 아름답다. 스스로 외롭기에 오히려 그의 시가 사람의 훈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선생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갑골길’을 다시 읽는다. 인터넷에서 검색했더니 선생의 첫 시집은 헌책으로 올라 있다. 서슴없이 그걸 장바구니에 넣고 몇 번 마우스를 누르는 거로 구매를 끝낸다. 시절이 좋다고 해야겠지만 선생님께선 이런 문화에 손을 홰홰 저으실 듯하다.
함안여고 교정에서 갑골길을 바라보는 ‘사십 대 노총각 한 선생’은 아마 당신의 모습이리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선생의 우렁우렁 듣기 좋은 굵은 목소리가 귓전에 지금도 선연하다. 일흔을 바라보는 연세, 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언제쯤 벗들과 함께 선생님을 모시고 약주 한 잔 드릴 수 있을는지.
2009. 6. 28. 낮달
두어 해 전에 홍승우의 모친상 조문 때 도광의 선생님을 뵈었다. 장례식장이었지만, 큰절로 인사를 드렸다. 스물대여섯 살 때 우연히 길거리에서 한번 뵙고, 무려 30년도 훨씬 지나서였다. 선생님은 여전히 건강하시고 활동적이셨다.
첫 말씀이 예전 내 문체가 좋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참 민망하고 송구하였다. 그리고 올에 책을 내었을 때 안부 여쭙고 책을 보내드렸다. 그 사이 서정윤과 동기인 조성순이 쉰 넘어 시집 두어 권을 냈다. 조성순은 안도현, 나와 함께 1989년 전교조 해직 동기다.
글쎄, 내가 몰라서 그렇지, 시집이나 다른 책을 낸 이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번 이무열 시집 서평을 쓰면서 언급한 류후기, 약관 스물에 신춘에 당선하고도 죽은 듯 살았던 그가 시집을 내는 일만 남았다.
어쨌듯, 선생님께서 노후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보내시길 빌어 마지않는다. 재주 있는 동기 후배들도 제각기 좋은 글로 자기 세계를 꾸려나갔으면 좋겠다.
2019.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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