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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죄책감과 공포를 넘어서

by 낮달2018 2019.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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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프란시스 라페 외, <굶주리는 세계>, 창비

▲ 굶주리는 세계 ( 창비 , 2003)

‘세상에서 가장 비싼 책’은 ‘사서 읽지 않고 서가에 모셔 놓은 책’이라 한다. 그런 뜻에서라면 지난 연말에야 마저 읽게 된 책, <굶주리는 세계>의 값은 꽤나 나가는 셈이다. 책을 사면 속표지의 여백에다 구매한 날짜와 서명을 해 두는 것은 오래된 습관인데, 거기엔 ‘040127’이라 적혀 있으니, 이 책을 다 읽는 데는 한 달이 모자라는 2년이 걸렸다.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의 저자는 ‘미국과 전 세계의 굶주림과 빈곤의 원인을 탐구하고 이 문제를 대중과 정책결정자에게 교육하는 일을 하는, 푸드퍼스트(Food First)로 잘 알려진 비영리 연구·교육기관’인 식량과 발전정책 연구소(Institute for Food and Development Policy)와 이 기관 소속이거나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학자들이다.

 

‘죄책감과 공포를 넘어서’라는 제목을 단 서장에서 현재 거의 8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고통받는 ‘굶주림’을 ‘불가능한 선택이 주는 고통’으로 정의하면서 그것은 ‘굴욕적인 삶’이며, ‘공포’를 강요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풍요로운 세계에 굶주리는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아왔지만, ‘가장 기본적인 문제, 즉 누구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먹을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우리 스스로를 완전한 인간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적어도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인간은 그 윤리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 책은 미국을 비롯, 전 세계에 만연하고 있는 빈곤과 굶주림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분석한다.

 

“분명 먹을 것이 모자라서는 아니다. 지금 세계는 먹을 것으로 가득하다. 자연재해 탓도 아니다. 굶주림의 원인의 식량과 토지의 부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이다.”

 

그러면서 굶주림의 원인과 현상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몇몇은 편파적이고 사실이 아니’며 ‘현실적 해법을 찾는 데 장애가 된’다고 보면서 이러한 ‘잘못된 원리’를 ‘신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신화는 대체로 열두 가지로 압축되는데(1986년 초판에서는 ‘열 가지 신화’) 그것을 거칠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신화 : 식량이 충분치 않다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가용자원이 한계에 달해 충분한 식량을 공급할 수 없다는 주장인바, 오늘날 세계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루에 3,500칼로리를 공급할 수 있을 만큼의 곡물을 생산한다.

 

개발도상국에서 영양실조에 걸린 5세 이하 어린이 중 78%가 식량이 남아도는 나라에 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미국에는 3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건강한 식사를 감당할 힘이 없다. 미국 어린이 중 8.5%가 실제로 굶주리고 있으며, 20.1%는 굶주림의 위협에 처해 있다.

 

두 번째 신화 : 자연 탓이다

가뭄, 홍수 등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난 자연재해들이 기근을 발생시킨다는 주장이다. ‘감자 대기근’으로 1백만 명의 희생자를 낸 아일랜드는 그 당시 식량수출국이었다. 자연에 대한 통제력을 늘여나간 현재에 오히려 그 전 시대보다 재해의 취약성이 더 커지고 있다. 자연재해가 원인이 아니라, 다만 그것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릴 뿐이다.

▲  Food First 의 홈페이지

세 번째 신화 : 인구가 너무 많다

멜서스 이래, 많은 학자가 ‘인구폭발’로 인한 재앙을 경고했지만, 현실은 역설적으로 진행되었다. 실제 굶주림이 상존하는 제삼세계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급속한 인구 증가가 굶주림을 발생시킨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굶주림과 마찬가지로 다수 빈곤층, 특히 아이를 적게 낳겠다는 선택에 필요한 안정과 경제적 기회를 여성에게서 빼앗아가는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이다. 높은 출생률은 강요된 빈곤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다.

 

네 번째 신화 : 식량이나 환경이냐

굶주리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토양침식이 우려되는 한계토지에서까지 농작물과 가축을 생산하고 열대우림을 파괴하며, 농약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왜 농민들이 생산성이 좋은 농지를 두고 경작되어서는 안 될 땅과 열대우림으로 옮겨가는가, 농약은 누구에 의해 확산되는가에 대한 질문은 생략되어 있다. 정답은 거대 사업자들. 필리핀과 니카라과를 비극의 땅으로 만든 건 다국적 기업 돌(Dole)과 미국 농장주들이었다.

 

다섯 번째 신화 : 녹색 혁명이 해결책이다

생산증대에만 협소하게 초점을 맞추면 토지에 대한 접근성과 구매력에 관한 집중구조를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굶주림을 줄일 수 없다. 기술의 혜택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새로운 농업기술을 도입하는 것은 불평등만 심화할 뿐이다. 식량을 생산할 토지나 구매할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굶주림은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여섯 번째 신화 : 정의냐 생산이냐

토지개혁은 대규모 생산자들의 식량 수확을 줄어들게 할 것이며, 결국은 굶주린 사람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정의’와 ‘생산’은 서로 경쟁하는 목표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주장과 달리 ‘소농들이 대농들보다 더 집약적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생산성이 더 높다.’ 전통적인 영농체계는 생산에 소비된 칼로리당 5~15배의 칼로리를 생산하는 반면에, 미국 같은 자본집약적 체계에서는 10칼로리를 써서 1칼로리만을 생산해 낸다.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MST)은 아래로부터 시작된 토지개혁에 대한 요구 운동이다.

▲ '무토지 농민운동' MST(Movimento dos Trabalhadores Rurais Sem Terra) 의 깃발

일곱 번째 신화 : 자유시장이 굶주림을 끝낼 수 있다

그러나 내버려 두면 시장은 단지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반영할 따름이다. 시장은 개인의 필요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돈에 반응하고, 생산에 드는 사회적 비용과 자원비용에 대해 무관심하다. 시장은 먹을 것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달하지 않는 것이다.

 

여덟 번째 신화 : 자유무역이 해답이다

수출로 번 돈으로 빈곤을 줄일 수 있는 물건을 수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수출이 굶주림을 끝내지는 않는다. 수출에서 이윤을 얻는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쓰지 않으며, 수출 농업이 식량 작물을 대체하면서 식량 작물을 재배하는 소농들을 몰아내 버리기 때문이다.

 

미국 소비자가 온두라스의 멜론에 지출하는 1달러 가운데 9센트가 온두라스에 돌아오는데 그중 농민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2센트도 안 된다. 가장 큰 이익은 보는 것은 미국에 근거를 둔 중개업자, 도소매업자들인 것이다.

 

아홉 번째 신화 : 너무 굶주려서 저항할 힘도 없다

빈민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현실에 무지하고 수동적인 상태에 놓여 있어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빈민들은 ‘경제체제의 작동에 대하여 알고 있으며 착취가 일어나는 과정(임금 착취, 정치차금 공여, 뇌물, 가격 차별)을 상세히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수동적이고 무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들보다는 덜 가난하지만 역시 불공평하고 비민주적인 경제정책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치고 이들을 변혁의 대열에 동참시키고 있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활동이나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은 그 본보기다.

▲ 브라질 무토지 농민운동

열 번째 신화 : 미국의 원조가 굶주림 해결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미국 대외원조의 목표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었고, 나중에는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의 증진’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미국의 식량 원조는 굶주림의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90년대 총원조의 5%만이 긴급구호용이었다.

 

원조는 실제 농업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 보조금을 등에 업은 값싼, 혹은 공짜 미국 곡물은 지역에서 생산된 식량 가격을 떨어뜨림으로써 지역 농민들을 농토에서 도시로 내모는 역할을 한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한국을 세계 제 3위의 미국농산물 수입국이 되게 하고, 밀에 대한 수요를 창출해 한국인들의 식습관을 급격하게 바꾸어 놓았다.

 

열한 번째 신화 : 그들이 굶주리면 우리가 이득을 본다

굶주린 사람들이 저임금 노동에 종사해야 우리가 커피, 바나나에서 배터리와 컴퓨터에 이르는 모든 물건을 헐값에 살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실제는 정반대이다. 우리의 복지를 위협하는 것은 굶주림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굶주린 사람들이 계속 궁핍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열두 번째 신화 : 식량이냐 자유냐

굶주림의 종식을 위해서는 사회에 급진적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 사람들의 자유가 줄어들 것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시민적 자유가 보호되는 사회에서 더 쉽게 굶주림을 끝낼 수 있다.

 

여기서 자유란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말하고 함께 뭉치고, 억압과 착취, 부당한 차별에서 벗어나고 굶주림에서 해방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생계권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빈곤과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지적 발전, 정신적 통찰, 음악적 재능, 육체적 성취를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라는 거대 이념의 경제적 독단’을 캐묻는다. 그리하여 “두 이념은 독단이 되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적 가치들을 타락시킨다. 도처에 널린 굶주림은 이러한 타락을 보여주는 가장 비극적인 증거”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존엄하게 사는 데 필요한 자원에 대한 권리를 확립하고 나아가 자유를 더 확산시키기”를 우리의 책임으로 이해한다.

 

근 2년에 걸쳐 찔끔찔끔 읽다가 간신히 완독한 책이지만, 책을 덮으면서 이 책이 가진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집요한 천착, 그리고 결론을 이끌어내는 도덕적, 윤리적 논리 앞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정말 놀라운 책이야, 그런데 왜 난 이걸 붙들고 2년이나 씨름을 한 거지?

 

모두 384쪽의 만만찮은 두께 탓은 아니었던 듯하다. 아마 처음, 이 책을 펴면서 나는 그것을 관념과 이론의 문제로만 바라보지 않았던가 싶다. 사회과학 서적을 펼 때마다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 탓도 있었으리라. 모든 모순은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와 사회의 존재 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씁쓸하다.

 

이 책의 미덕은 각 장마다 별지로 우리의 농업 현실과 과제들을 자료 등의 방식으로 삽입하고 있다는 점에도 있다. 재생지로 만들어서 아주 가볍다는 것도 미덕이다. 중요한 대목마다 푸른색 펜으로 밑줄을 그을 때 펜이 잘 미끄러지지 않는 점은 별로지만 안방에 큰 대 자로 누워 읽어도 팔이 아프지 않은 점은 그걸 상쇄하고도 남는다.

▲ wtomc6기간중 설치된 멕시코 칸쿤에서 신자유주의와 무역자유화 정책에 항의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농민운동가 이경해 추모단.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은 “한국의 농민들과 고 이경해 씨에게 바친다.”로 시작되고, ‘그의 정신은 굶주림을 종식하려는 전 세계의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며, “우리는 이 한국어판 서문을 이 투쟁에 삼가 바치고자 한다.”로 끝난다. 고 이경해 씨는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신자유주의와 무역자유화 정책에 항의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농민운동가이다.

 

그리고 2005년 한국에서는 농민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쌀 관세화 유예 협상 비준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이에 항의, 시위를 벌이던 두 농민이 경찰의 폭력에 희생되었다. 그에 대한 여론의 질타 앞에 경찰청장이 사퇴했는데, 이를 두고 한 논객은 “한 인간의 존엄이나 생명의 가치는 대한민국 모든 고위공직자의 자리를 합해놓은 것보다 훨씬 무겁다.”고 말했다.

 

세계 십몇 위의 경제력을 자랑한다고 하지만, 오늘의 우리 농업과 농촌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그 앞에 우리는 한없이 왜소해지기만 하고 있다.

 

 

2006. 1. 4. 낮달

 

 

* 옛 블로그에서 올렸던 글 중에서 서평(별로 마땅한 낱말은 아닌데 달리 표현하기가 어려워 썼다.)은 따로 살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들꽃푸른 님의 블로그 <길 바깥의 희망>(http://blog.ohmynews.com/smallnuri/)에서 라페의 저작 <희망의 경계>를 읽고(이 글은 한겨레에 실린 <아깝다, 이 책>의 저자가 직접 올린 글이다.) 망설이다 올린다. 나이 들수록 우리의 일상과 상식을 지배하는 것은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굶주리는 세계 by 프란시스 무어 라페 / 조지프 콜린스 / 피터 로쎗 / 루이스 에스빠르사 / 식량과발전정책연구소 (지은이) / 허남혁

굶주림의 원인이 식량과 토지의 부족, 인구의 과잉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임을 치밀하게 분석한 책이다. 기근의 정치적.경제적 맥락을 해설하고 나아가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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