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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쇠고기의 ‘위대한 모순’

by 낮달2018 2019.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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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시공사

▲ <육식의 종말>. 2002년 초판 1쇄.

간행된 지 6년이나 지난 구간(舊刊) 1권을 이른바 ‘쇠고기 정국’이 불러냈다. 미국의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1993년에 쓴 <육식의 종말(Beyond Beef)>(시공사, 2002)이 그것이다.

 

내 서가에 있는 리프킨의 이 책은 2002년 1월에 발행된 초판 1쇄다. 인류의 육식 문화를 광범위한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맥락으로 천착했던 이 책은 그동안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읽혀 왔다.

 

광우병 정국이 이 구간을 불러냈다고 했지만 정작 리프킨은 이 책에서 광우병을 직접 다루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육식을 위해 소비되는 곡물에 주목했고, 그것이 수많은 사람을 기아와 영양실조로 몰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육식의 종말’이 무엇인지 궁금한 독자라면 책을 읽는 동안, 차근차근 진행되는 역사적 고찰과 그 정치·사회·경제적 의미들에 대한 정교한 해석에 조바심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리프킨은 소와 인간의 관계를 ‘특별한 관계’로 묘사한다.

 

· 젊은 황소신은 새로운 이집트 제국의 정신적인 권좌에 올랐으며, 자랑스러운 그 지위로부터 천상과 사회의 관심사를 지배했다.
· 그들(소)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은 인간 역사의 온갖 중요한 시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관련을 맺어왔다. 우리는 그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했고, 우리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 그들을 이용했다. 어떻게 보면 서구 문명은 수소, 그리고 암소와 함께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소’를 뜻하는 ‘cattle’은 ‘자본’을 뜻하는 ‘capital’과 동일한 어원을 갖고 있다. 많은 유럽어에서 ‘소’는 ‘자본’ 및 ‘동산’(chattel)과 동일한 어원을 갖고 있다.
· 소는 인간과 문화 사이에서 표준적인 교환 매체로 이용될 수 있는 최초의 유동 자산 중 하나였다.
        - <육식의 종말> 본문 중에서

 

식량에서 사료로 바뀐 곡물

 

소는 때로는 신의 모습으로, 때로는 교환 매체로도 이용되는 자본의 한 형태로 인류의 삶과 함께 해왔다. 오랫동안 ‘신이 내려준 선물’로 인식되었던 소는 인류 역사의 진전에 따라 ‘새로운 생명체’로 변화되었다. 사람들은 소의 육체에 깃든 ‘신성함’ 대신 ‘부를 낳는 경제적 생산성’이라는 세속적 개념으로 소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 제레미 리프킨(1945∼ )

인도에서 소는 ‘토지를 놓고 인간과 경쟁하지 않’는다. 또 간디가 지적한 것처럼 ‘암소는 풍요의 제공자’요, ‘우유를 제공하고 농사를 가능하게’ 해 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소는 여러 대륙의 원주민과 영토를 식민화하고 착취하기 위해 훨씬 세속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대륙이 광대한 소 사육장이 되는 이 시기로부터 오늘날의 축산문화가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서부 정복기는 소 사육을 위해 광대한 초원에서 버팔로와 인디언을 쫓아내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지방 많은 쇠고기를 선호하는 영국의 소비자들을 위해 목초지뿐 아니라 옥수수로 사육하는 육우정책이 시행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새로운 육우 정책은 1세기가 지난 오늘날 ‘미국에서 가축들, 그것도 주로 소가 소비하는 곡물이 전 국민이 소비하는 곡식의 두 배에 육박’하는 결과를 낳는다.

 

‘미국 평원이 때 묻지 않은 초원에서 상업적인 목초지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통해서 유례없는 쇠고기의 산업화가 이루어졌다. 효율을 목표로 한 쇠고기의 도축 과정은 역설적으로 헨리 포드의 자동차 종합공정에 대한 발상을 제공하기도 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메리카 대륙은 전 세계적 ‘육우 기지화’를 완성하게 된다.

 

저자가 길고 지루하게 진행해 온 소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고찰은 현대적인 육식 문화가 인간에게 끼친 영향을 검토하고자 함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난 가장 극적인 변화는 ‘전 세계 곡물이 인간을 위한 식량에서 가축을 위한 사료로 전환’된 것이었다.

 

부와 지위 드러내는 특권이 된 쇠고기

 

저자는 쇠고기 소비가 단순한 ‘입맛’의 차원이 아니라 인류의 가장 복잡한 문제인 ‘사회정의와 평등의 차원으로 확장’된 것으로 이해한다. 즉, 쇠고기 소비가 소득 수준과 연관됨으로써 대부분 나라에서 부와 지위를 드러내는 특권의 한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유럽과 북 아메리카의 거대한 육식 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인위적인 ‘단백질 사다리’(protein ladder)를 구축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리고 그 사다리의 맨 위에 곡물사료로 사육된 쇠고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축우를 포함해 다른 가축들이 미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곡물의 70%를 소비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전체 곡식의 1/3을 축우와 다른 가축들이 먹어치움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위대한 모순’이 창조되는 것이다.

 

북반구의 육식 문화, 즉 쇠고기 과잉 섭취로 인한 지방 소비문화가 비만과 ‘풍요성 질병’으로 발전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의 증가가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사막화의 주된 요인이며 지하수 오염의 원인이면서 지구온난화의 주범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감고 있다.

 

351쪽에 달하는 본문과 100쪽이 넘는 주석을 통해 이 미래학자는 ‘육식의 종말’을 제안하고자 인간과 소의 관계를 회고한다. 인간과 소의 첫 번째 관계에서 인간은 ‘번식의 힘’을 숭배했고, ‘신성한 번식의 힘을 존재 속에 합일시키고, 재생의 주기에 동참’하기 위해 쇠고기를 먹었다. 그리고 두 번째 관계에서 소를 ‘조작 가능한 자원으로 탈바꿈’시키고 자연과 동료들을 지배하는 힘을 얻기 위해 쇠고기를 먹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인간과 소의 세 번째 관계 앞에 서 있다. 저자는 ‘쇠고기를 먹지 않는 선택’을 제안한다. 그는 ‘현대식 초대형 비육장과 도살장에서의 고통과 모욕에서 소를 해방시키는 것은 위대한 상징적 실천적 의미를 지닌 인도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또 ‘육식의 종말은 자연을 대하는 적절한 태도에 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면서 그는 ‘육식을 끊는 행위에는 모든 대륙의 자연을 대대적으로 회복시키는 생태계적 르네상스가 동반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종적으로 그는 ‘육식 문화를 초월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원상태로 돌리고 온전하게 만들고자 하는 징표이자 혁명적인 행동’이라 규정함으로써 그것이 새로운 인류의식을 향한 중요한 발걸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 미국의 육우 농장 16 ∼18주 동안 소들은 이런 형태의 우리에 갇혀 지내야 한다.

육식 중단, 자연을 대대적으로 회복시키는 생태계의 르네상스

 

어떤 사람에게 육식은 단지 식단의 변화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제레미 리프킨은 문명사적으로 그것이 인류의 삶과 역사에 얼마나 크나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아울러 그의 해박한 논변은 2008년 현재, 한국에서 벌어진 쇠고기 정국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환기해 주는 듯하다.

 

‘검역주권 포기’에 대한 저항을 폭력시위로 몰아가고 있는 한국사회의 퇴행은 단순한 식품위생에 관한 사항의 문제만이 아니다. 천문학적 숫자로 도배되곤 하는 광우병 발병의 확률 여부는 오히려 일부의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는 자국산 쇠고기를 수출하여 더 안정적인 부를 창출하려는 미국 축산기업의 이해가 어떤 형식으로 관철되는가 하는 농산물 유통의 시스템에 관한 문제다. 또 이는 ‘소와 자연의 번식력에 대한 지배’를 획득함으로써 우리가 상실한 ‘다른 창조물과의 신성하고 친밀한 교류’의 결과가 ‘광우병’이라는 가공할 질병으로 발전했다는 자연의 경고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부와 지위의 척도가 되는 ‘쇠고기 소비’는 적어도 ‘값싸고 질 좋은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기 시작한 한국 사회에서는 매우 ‘역설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수백 만분의 1에 불과한 발병 확률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기득권 계급은 ‘비싸지만 안전한’ 한우를 선호하겠지만, 그만한 대가를 지급할 능력이 없는 다수의 저소득층은 그 값싼 쇠고기를 즐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10년이나 30년 후’에 발병할 수도 있는 질병의 문제는 그들의 기약 없는 미래만큼이나 먼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2008. 7. 15. 낮달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쇠고기의 '위대한 모순'

[서평]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www.ohmynews.com

**여섯 해 전에 읽은 책을 새로 꺼내 읽게 한 것도 이 빌어먹을 쇠고기 정국이다. 다행히 책을 읽을 때마다 청색 펜으로 밑줄을 그어두는 버릇 덕분에 새로 정독해야 하는 수고는 덜었다. 바야흐로 식량으로 쓰이던 곡물이 가축들의 사료로 쓰인다는 이 변화는 요즘 새롭게 대두된 ‘식량 위기’를 환기해 준다.

 

리프킨이 이 책을 쓸 때만 해도 광우병은 그리 큰 화두는 아니었던가. 광우병은 열악한 사육환경과 함께 일부만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소와 자연의 번식력에 대한 지배’를 획득함으로써 우리가 상실한 ‘다른 창조물과의 신성하고 친밀한 교류’의 결과”로 오늘의 육식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숙제하듯 쓴 이 글은 지금 <오마이뉴스> 메인에 걸려 있다. 말썽 많은 ‘쇠고기’여서 그런지 뜻밖에 독자들이 클릭이 잦다. 여전히 고장 난 스크랩 기능 때문에 통째로 옮겨오지 못하고 새로 올리면서 요즘 나오는 표지를 옛 표지 옆에다 붙였다.

 

얼마 전 오랜만에 제법 여러 권의 책을 구매했다. 공연히 벌써 저걸 언제 다 읽어내나, 하고 은근히 걱정하면서도 내일모레면 방학이라는 사실에 아이처럼 들뜨기 시작한다. 그다음 주부터 끔찍한 보충수업이 시작되긴 하지만, 그래도 방학은 방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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