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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추억으로의 시간 여행

by 낮달2018 2019.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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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혼(銀婚) 여행 - 남해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

▲ 보리암에서 내려다본 한려수도. 산 위는 맑았지만, 지상은 안개처럼 흐렸다.

‘흐르는 물’[유수(流水)], 더러는 ‘살(화살)’과 같다고 한다. ‘세월’ 이야기다. 아주 케케묵은 비유지만 그 진정성은 그 시간의 부피와 무게를 몸으로 이해하는 이들에게 뻐근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귀때기’가 새파란 청년이, 솜털이 보송보송한 처녀가 시나브로 희끗희끗해진 귀밑머리, 굵게 팬 주름살의 중년으로 몸을 바꾸는 시간이다. 성마르고 강퍅한 성정이 니글니글한 여유와 너그러움으로 닳고 닳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세월에 힘입어 아내와 내가, 지아비와 지어미로 만난 지 스물다섯 해가 되었다. 이른바 은혼(銀婚)의 시간에 닿은 것이다. 결혼기념일 따위를 따지는 것은 나라 밖에서 들어온 풍습이다. 이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에서 매년 결혼한 날에 축하예배를 하던 것에서 유래된 풍습으로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니 말이다.

 

요즘 젊은 남편들은 결혼기념일을 잊고 지나가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겠지만, 우리네 어버이들은 금혼(金婚)이라는 50년 정도가 아니라 60년 70년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살았다. 일흔에 세상을 버리신 내 선친은 열여섯에 어머니를 만나 54년을 함께 사셨으나 미욱한 자식들은 금혼식 하나 치러 드리지 못했다.

▲ 보리암에서 내려다본 남해 바다. 상주 해수욕장과 미조항이 보인다.
▲ 보리암 부근의 전망

그러나 세상은 많이 변했다. 이제 장성한 자식들이 금혼식을 챙겨 드리고 호호파파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턱시도와 면사포를 입고 쓴 채 ‘없어 하지 못한 모양’을 잔뜩 내고 있는 것이다. 그 금혼을 반 뚝 분지른 게 은혼이니, 그 의미도 결코 가볍지는 않겠다.

 

특별히 은혼을 기념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이왕 이름 붙은 날 어디 여행이나 떠나자고 나선 게 아내와 나의 은혼 여행이 되었다. 동료에게 빌린 내비게이션을 달고 길을 떠난 건 1월 11일 목요일 아침이다. 코스는 저 남도를 한 바퀴 도는 거였다.

 

첫 목적지는 남해 금산 보리암. 남해 최고의 명산으로 불리는 금산(錦山)의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이 절집은 양양 낙산의 홍련암, 강화 석모도의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 기도처다. 아내는 물론이거니와 내게도 초행길이었다. 보리암을 내게 추천한 후배 교사는 “거기 사는 스님들은 아마 수행을 못 할 것 같다.”고 했다. 주변의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서.

▲ 보리암 뒤편의 기암괴석.  금산은 한려해상국립공원 가운데 유일한 산악공원이다.

대저 여행의 즐거움은 길 위에 있다. 목적지가 아니라 거기 이르는 여러 갈래의 길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 가운데 ‘떠남의 미학’이 있는 것이다. 이번 여행의 동반자는 내비게이션이라는 장치다. 이 기계는 아주 친절하게 내 초행길의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놈을 신뢰한다면 운전자는 꼭두각시가 되어도 무방하다.

 

보리암 주차장에서 자리가 다 차야 떠나는 셔틀버스를 타고 오르는 산길, 산 중턱 곳곳에 곧게 선 편백이 아름다웠다. 편백은 심폐기능 강화와 항균, 이뇨, 거담효과가 뛰어난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수종인데, 금산 동쪽 자락에는 편백 자연 휴양림이 있다고 한다.

▲  보리암으로 내려가는 돌계단 주변에 선 편백과 대나무 .

가는 날이 장날이더라고 눈비 소식이 없는 대신 날씨는 새해 들어 가장 찼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보리암으로 가는 완만한 산길을 우리는 마치 첫 나들이를 나온 연인처럼 걸었다. 나는 내내 사진을 찍느라 바빴고, 아내는 연신 탄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아내에게는 너무 오랜만의 여행이어서 풍경을 받아들이는 감각이 다소 넘치고 있었을지 모른다.

▲  보리암의 전각.  뒤편의 괴석이 위태로워 보인다 .

보리암에서는 납자(衲子)가 수행의 뜻을 잃어버리게 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눈 아래 펼쳐지는 한려해상공원의 망망대해, 초승달 모양의 상주 해수욕장과 미조항의 둥그런 해안선은 산 아래 몽롱하게 깔린 안개 속에서도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바다를 굽어보는 길옆에 세운 이성복 시인의 시 “남해 금산”의 시구가 무색했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돌 속에 들어갔네 나도 
어느 여름 비 오고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그 여자 
떠나가는 그 여자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나 혼자 잠기네

 

보리암은 원래 이름이 보광사(普光寺)다. 신라 신문왕 3년(683년) 원효대사가 여기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했기 때문이다. 산 이름도 보광산이었다. 이성계가 여기서 기도를 올리고 새 왕조를 열자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만큼 큰 비단을 구할 수 없어 비단이란 이름으로 산을 덮어주었으니 금산(錦山)이 된 것이다. 보광사가 보리암이 된 것은 현종 때 왕실의 원당이 되면서부터이다.

▲ 보리암 전 삼층석탑. 파사석으로 지었다지만 고려시대에 세운 화강암 탑이다.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관음 기도처인 데다 왕실의 원당이고, 천혜의 절경에 자리한 보리암이 거듭된 불사로 사세를 넓히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거기 걸맞은 전설도 윤색된다. 좁은 정상 중턱에 여러 채의 전각이 날아갈 듯 서 있고 보리암 앞 3층 석탑 뒤에는 웅장한 해수 관음보살상이 남해를 굽어보고 있다.

 

높이 1.8m에 불과한 보리암 앞 돌탑은 금산 절벽에 세워진 절집에 대한 비보(裨補)의 성격이 짙다. 김수로 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파사석으로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기실은 고려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화강암 탑이다. 이 탑 앞에서는 나침반이 제구실을 못 한다는 사실과 함께 보리암을 둘러싼 전설적 윤색의 일부이다.

▲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해수 관세음보살상.
▲  보리암 주변의 바위와 나무 .  저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날아갈 듯한 새 전각들이 여기저기 섰지만, 절집은 차분하다. 한데 모여 있지 않고 기암괴석과 숲과 나무 사이에 얌전히 들어앉아 있는 까닭이다. 마음이 번잡하고 어지러우면 산 아래 바다를 굽어보면 된다. 여기서 바라다보는 해돋이는 금산 38경 중 마지막 절경이라 하는데, 그 장엄미의 본질은 관세음보살이 가진 대자비심, 생명에 대한 경외일 터이다.

 

우리는 마치 데면데면한 사이처럼 절집 여기저기를 기웃거렸고, 가끔 마주 보며 웃었다. 어느 해 늦가을, 가야산을 함께 찾았을 때를 나는 불현듯 떠올렸다. 절집 뒤편의 키 큰 전나무 숲에서 불던 산산한 바람의 결들, 그때 우리는 몇 살이었던가. 시간은 그 말 없는 발걸음으로 우리를 앞질러 지나갔다.

▲ 하산길.  쨍한 하늘과 찬 공기는 아득한 시절의 산산한 바람의 결을 떠올리게 한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우리는 익숙하게 손을 잡았다. 어땠어, 볼 만했지? 그래요, 아주 좋았어. 고마워요. 아내의 공치사에 나는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25년을 부대끼며 사는 동안, 나는 얼마나 자주, 아내의 마음을 고단하게 하였던가.

 

때늦은 점심을 돼지국밥으로 때우고 섬을 빠져나오는 연도에는 남해의 난지형 마늘밭이 파랗게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내비게이션에 다음 목적지로 순천 조계산 선암사를 입력했다.

 

 

2007. 1.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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