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26년 8월 4일, 부관연락선에서 동반 투신
김우진과 윤심덕, 대한해협에서 정사
1926년 오늘(8월 4일) 새벽 4시,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발 부산행 관부(關釜)연락선[관련 글 : 1905년 오늘, 부관연락선 이키마루, 현해탄을 잇다] 도쿠주마루(德壽丸)가 쓰시마(對馬島) 섬을 지날 무렵이었다. 순찰 급사가 일등객실에 승선했던 남녀 승객 두 명의 실종을 선장에게 보고했다. 배는 항로를 거슬러 오르며 수색을 거듭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실종자가 남긴 것은 “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 주시오”라 쓰인 객실의 메모 한 장뿐이었다. 항해 중인 여객선에서 사라진 두 사람이 갈 곳은 바다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른바 ‘현해탄(玄海灘)’이라 불리는 대한해협의 어두운 심해로 뛰어든 것이었다.
실종된 남녀는 극작가 김우진(1897~1926)과 배우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1897~1926)이었고 이들은 서른 살의 동갑내기였다. 김우진은 기혼자고 윤심덕은 미혼이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여 ‘선상 정사(情死)’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지난 3일 밤 11시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가 4일 오전 4시경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승객명부에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30세),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2정목 273번지 윤수선(30세)이라고 씌어 있지만, 본명이 아니고,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으로 밝혀졌다. 관부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情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춘남녀의 정사’, <동아일보>(1926.8.5.)
윤심덕이 실종된 직후 그녀가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 레코드에서 취입한 마지막 노래 ‘사의 찬미’가 유성기에 실려 곳곳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헝가리의 민족 작곡가 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그녀가 가사를 붙인 이 노래는 두 사람의 죽음과 이어지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이 노래는 사회적 유명 인사였던 두 사람의 스캔들과 결합하면서 이들의 미래를 예언한 듯한 염세 비관적 가사로 대중을 흡인하였다. 이 음반이 당시로써는 경이적인 1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목포 거부의 아들 김우진은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도쿄 유학 시절부터 연극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와 연극동우회를 조직하여 국내 순회공연을 하는 등 신극 발전에 힘썼다. 그는 윤심덕과 동반 자살한 이로만 기억되지만 5편의 희곡과 20편의 평론을 남긴 1세대 연극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시대적 고통을 희곡 속에 형상화하여 계몽적 민족주의나 인도주의, 감상주의 머물렀던 기성문단을 뛰어넘은 선구적 극작가였다. 특히 그는 신파극 일색의 연극계에 전위적 실험극을 시도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정오(正午)’, ‘산돼지’, ‘이영녀(李永女)’가 있다.
윤심덕은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최초의 조선인 유학생이었다. 1921년 윤심덕은 순례극단 동우회에 들어가 김우진을 만났고, 조선에서 두 달여 순회공연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1923년 귀국한 윤심덕은 성공적 공연을 통해 이름을 날렸지만, 서양 성악으로는 곤궁을 벗어날 수 없게 되자 대중가수의 길을 선택했다. 이 현실과의 타협 이후, 윤심덕은 각종 스캔들에 시달려야 했다. 1926년 윤심덕은 닛토 레코드의 음반 녹음의뢰를 받아 일본으로 갔다. 연극을 하고 싶었으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고민하던 김우진도 일본으로 건너왔다.
윤심덕, '사의 찬미' 듣기
음반 녹음을 마친 윤심덕은 사장에게 특별히 한 곡을 더 녹음하고 싶다고 했다. 그 노래가 바로 ‘사의 찬미’였다. 윤심덕은 김우진에게 오사카로 오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쳤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8월 3일 부관연락선에 함께 올랐다. 그리고 그것이 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끝이었다.
두 사람의 동반 자살은 명확한 사실이지만, 이 정사가 이루어지기까지 그들의 비극적 사랑의 행로는 별로 밝혀진 것이 없다. 김우진은 남매를 둔 유부남이었지만 그게 두 사람의 사랑에 결정적인 장애라고 할 수만은 없었다. 중혼(重婚)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던 시기였고, 그의 집안은 막강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의 정사는 뜻밖의 방향으로 튀었다. 그들이 정말 죽음을 같이 할 사이였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죽음을 가장하고 이들이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였다는 소문은 1931년 11월 이탈리아 주재 일본영사관의 조사 결과가 도착할 때까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정사, 1920년대 사랑의 증명 방식
1920년대는 비관과 퇴폐적 정서가 지배적인 시대였다. 1919년 3·1운동의 실패가 근대의 세례를 받았던 지식인, 문인들을 좌절케 했고 그들은 낭만주의와 허무주의에 침잠했다. 일본 경제도 전후 공황에 빠져 있었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들도 고등룸펜으로 살아가야 했던 시절이었다.
두 연인이 선택한 죽음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절망, 비관의 정서와 이어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대의 윤리와 도덕을 뛰어넘지 못한 식민지 치하의 지식인이 자신들의 사랑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동반 자살을 선택한 것이었을까.
그 3년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기생 강명화와 경북 칠곡의 대부호 장길상(한말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아들이자, 해방 후 수도경찰청장,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형)의 아들 장병천의 정사가 이들의 선택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명월관 권번 기생 강명화와 결혼하려 했던 장병천은 집안의 반대로 좌절했다. 1923년 6월 온양온천에서 강명화가 먼저 음독자살하자, 장병천은 한 차례 음독에 실패한 뒤 10월에 강명화가 선택했던 방법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죽음 이후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독신이었던 윤심덕과 달리 기혼자 김우진은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 방한은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다. 시신 없이 쓴 김우진의 무덤은 전남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 몰뫼산에 있다고 한다.
뒤늦게 목포시가 목포문학관을 세워 지역 출신의 소설가 박화성(1903~1988), 극작가 차범석, 문학비평가 김현 등과 함께 김우진관을 열어 그의 문학을 기리고 있다. 2000년에는 3권으로 된 <김우진전집>이 간행되기도 했다.
윤심덕은 빛바랜 사진 속의 얼굴과 함께 ‘사의 찬미’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만이 남았다. 너무 오랜 세월 저편의 목소리여서일까. 나는 그의 노래에서 가곡과 대중가요의 경계조차 모호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2017. 8. 2. 낮달
* 참고
· <위키백과>
현해탄(玄海灘)은 일본의 조그만 바다, ‘겐카이나다’일 뿐
많은 한국인이 ‘현해탄’을 쓰시마 해협이나 대한해협(Korea straits)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한다. 현해탄은 대한해협을 지칭하는 일본식 지리용어이므로 ‘식민지 언어의 잔재’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다음 한국어사전』은 현해탄을 “대한해협의 남쪽과 일본 규슈(九州) 북서쪽 사이에 있는 바다. 우리나라와 규슈를 잇는 해상 교통로로, 수심이 얕고 풍파가 심하다. 일본어 ‘Genkainada[玄海灘]’를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현해탄은 쓰시마 해역의 일부인 ‘후쿠오카 앞바다의 오시마(大島)와 그 서쪽의 이키시마(壹岐島), 이 두 섬 사이의 해역’이다. 즉 현해탄은 쓰시마 해협에 속하는 작은 바다, 또 쓰시마 해협은 대한해협에 속하는 작은 해협인 것이다. 따라서 현해탄을 ‘대한해협’ 대신으로 쓸 수 없는 것이다. [관련 글 : ‘그 바다’, ‘현해탄’이 아니라 ‘대한해협’이다]
* 참고 : 서현우, “대한해협을 현해탄이라니”,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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