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8월 4일- 일본 고노 관방장관,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담화’ 발표
1993년 8월 4일, 일본 자유민주당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내각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은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담화’(이하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고노 담화는 전시 일본군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관여하였다고 발표하면서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사과했다.
이는 그때까지 일본군 ‘위안부’들이 군용 성매매 업소에 종사하도록 강요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던 일본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군의 강제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고노는 일본 제국 육군이 직간접적으로 매춘소의 설치에 관여했다고 인정했다.
고노 담화, 위안부 문제에 군의 강제성 인정
고노 담화는 무엇보다도 위안부가 감언이설이나 강제 등, 때때로 모집에 직접 참여한 관리나 군인을 통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되었고 위안소의 강압적인 환경 아래 비참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정부’가 아니라 ‘군’으로 한정했지만 담화의 기본 인식은 일정 부분 진전된 것이었다.
일본 정부가 관방장관 고노의 담화를 통해서 ‘위안부’ 관련 역사적 사실을 인정한 것은 고 김학순(1924~1997) 할머니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밝힌(1991년 8월) 지 꼭 이태 만이었다. 고노 담화는 김학순 할머니가 진실을 밝힌 뒤, 1992년 1월 일본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가 한국을 방문하여 사죄 의사를 표명하고, 7월에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이 1차 정부조사 결과를 발표한 데 이은 후속 조치였다.
이듬해(1994)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 총리대신은 담화를 통해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민간 기금을 설립하여 위문금을 지급하는 구상을 발표했다. 이는 대일 청구권의 소멸을 적시한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의 이름으로 돈을 줄 수 없으므로 재단을 설립하고 정부에서 거기 기부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었다.
1년 뒤인 1995년 7월에는 총리부와 외무성 관할로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이하 ‘국민기금’)이 설립되었다. 이 기금에 참여했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기금이 “1965년 협정(한일기본조약)을 전제로, 법적 책임론이 아니라 도의적 책임론에 기초한 국민적 보상의 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들의 운동에 앞장서 온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은 국민기금에 강하게 반발했다. 정대협은 국민기금이 일본 정부 차원의 ‘보상’이 아니라 ‘위로금’이라 판단했고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들도 이에 반대했다. 대신 정대협은 1996년 10월부터 범국민 모금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계를 지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1997년 1월 일본 정부는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7명에게 의료지원금을 포함, 1인당 500만엔(약 7250만원)의 위로금 전달을 강행했다. 이후 정대협은 1998년 5월부터 자신들의 모금액과 정부 예산을 합쳐 위안부 피해자 1인당 4300만원의 생활안정 지원금을 지급했는데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로부터 국민기금을 수령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국민기금을 받은 할머니들도 정부 지원에서 제외됐다.
국민기금, 당사자 반대에도 위로금 전달 강행
국민기금 수령 여부에 대한 논란으로 인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분열은 할머니들에게 상처로 남았다. 이 문제로 일부 할머니들은 정대협에 불신하게 되었고, 일본에는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는 면죄부를 준 셈이 되었던 것이다.
국민기금은 계획된 보상 사업이 종료되는 2007년 3월에 해산되었다. ‘태평양 전쟁 중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어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 대한 보상 사업과 여성의 명예와 존엄 등에 관련된 현재의 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하여 설립되었지만 국민기금은 적어도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에게 ‘보상’도 ‘명예와 존엄’도 주지 못했다.
고노 담화는 그 내용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최소한의 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인식을 보여준 것이었다. 일본의 보수, 극우 세력으로부터 부정당하기도 했지만 아베 정부의 ‘검증 논란’이 시작될 때까지는 이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고노 담화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언급되는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와 짝을 이루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의 진전된 일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라야마 담화는 1995년 8월 15일, 내각회의의 결정에 근거하여 총리대신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발표한 것이었다.
무라야마 담화와 아베의 역사수정주의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과 전쟁 이전에 행한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뜻을 표명하고 있었다. 담화는 일본에서 줄곧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도 없는 역사의 사실’이라 지적하고 있다.
무라야마 담화는 침략 ‘전쟁’에 대해 직접 사죄한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전쟁 중에 돌발적으로 일어난 침략 ‘행위’에 한정된다는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라야마 담화는 이후의 정권에도 계승되어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역사적인 견해로 인용되곤 한다.
국민기금이 해산될 무렵, 아베 신조(安倍晋三) 1차 내각은 고노 담화와 관련한 각의(국무회의)의 결정을 발표했다. 그것은 “정부가 찾은 자료 가운데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 연행을 직접 나타내는 기술은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노 담화의 내용이 부정되기 시작하는 신호탄이었다.
이어서 2012년 8월, 아베 자민당 총재는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재집권하면 고노 담화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천명했다. 2년 뒤인 2014년 2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고노 담화 ‘검증 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한 달 뒤, 아베 총리는 “고노 담화 수정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아베가 공개석상에서 담화 수정 의지가 없다고 밝힌 것은 취임 후 처음으로 이는 역사인식과 관련해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과 일본에 대해 관계 개선이 긴요하다는 미국의 요구를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베 정부는 6월 20일, 고노담화 검증 결과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보고하는 형태로 공개했다. 보고서의 요지는 담화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한일 정부 간의 문안 조정이 있었다.’는 것과 양국 정부가 문안 조정 사실을 공표하지 않기로 했다는 점 등이었다.
이는 고노 담화의 내용이 사실에 근거했다기보다는 외교협상의 결과물이었다는 점을 시사하며 담화의 의미를 깎아내리자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사실 관계가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서둘러 발표한 것은 또 다른 역사 왜곡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
고노담화 검증은 아베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역사 수정주의’ 작업의 일환이다. 아베가 일관되게 천착해 온 것은 ‘일본의 패전으로 형성된 질서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처벌받은 14명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평화헌법 수정, 위안부 문제로부터의 탈출은 따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한겨레(2014.6.20.)> 사설)
아베의 고노담화 검증 1년 6개월 후인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협상을 타결했다. 한국정부는 이 문제를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했다. [붙임 한일 외교장관회담 공동기자회견문 참조]
그리고 2016년 8월, 현재 이 합의는 ‘피해자가 빠진 일방적이고 불완전한 합의’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불가역적 해결’이라고 규정했지만 그것은 문제의 종결이기는커녕 새로운 불씨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난 7월 28일, 정부는 당사자들과 시민단체, 대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해·치유재단’의 출범을 강행했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시민단체 등은 이에 맞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으로 맞섰다. 화해와 치유를 위해서라도 ‘정의’를 세우고 그것을 '기억'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의기억재단의 입장이다.
‘화해·치유 재단’은, 1995년 설립했다 실패한 일본의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보다 여러 모로 후퇴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국민기금이 위안부 문제를 역사에 남기는 자료 발굴 작업 등도 진행한 데 반해 화해·치유 재단은 10억 엔을 의료비·위로금 등으로 직접 나눠주는 ‘피해자 직접 수혜 사업’에 집중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참조]
일본이 출연하는 10억 엔을 위안부 피해 사실을 신고한 238명(생존자 40명)한테 일괄분배하면 1인당 4277만 원꼴인데 이는 국민기금 당시에 정부가 특별지원금으로 지급한 4300만원보다 적은 액수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요구해 온 기념관을 세울 돈도 없는 상태고 재단의 운영비용도 우리 정부가 대야 할 판인 것이다.
재단 설립에 맞추어 일본의 10억 엔 출연이 이어지겠지만 일본의 ‘평화의 소녀상’ 철거 요구도 커질 것이다. 그러나 오는 9일 경기도 군포시에 서른 번째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질 예정이니 이미 평화의 소녀상은 ‘기억투쟁의 상징물’이 된 셈이다. 당사자를 빼고 진행된 졸속 한일합의의 덫에 빠진 정부는 이제 일본이 아니라 피해 당사자와 여론을 상대로 싸우게 되었다.
해방 48년 만에 불완전하나마 진전된 식민지 인식을 표명했던 고노 담화는 2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의를 위한 기억의 일부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위안부' 문제로 우리는 일본과 싸우면서 동시에 정부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해방 71년, 한 분 두 분 유명을 달리하고 있는 피해자 할머니들 앞에서 우리는 다만 부끄럽고 부끄러울 뿐이다.
2016. 8. 3. 낮달
[참고] 요시다 세이지의 거짓 증언과 <아사히(朝日) 신문>의 입장
일본의 진보 일간지 <아사히>는 1991년부터 ‘종군 위안부’ 문제의 연재 캠페인을 전개했다. <아사히>는 과거 제주도에서 많은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갔다는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의 증언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러나 요시다 증언을 허위라고 판단한 <아사히>는 2014년, 요시다 증언에 관한 모든 기사를 취소했다. 연말에는 요시다 증언이나 종군위안부 보도를 둘러싼 일련의 허위 날조 보도의 책임을 지고 사장이 사임했다.
이에 대해 보수·우익 세력은 고노 담화의 근간이 무너졌다며 <아사히>를 공격했지만 <아사히>는 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즉 <아사히>는 강제적인 성 노예가 인신매매의 형태로 존재했다는 핵심적 사실이 아직 유효하며 거짓 증언의 확인으로 오해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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