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부관연락선 이키마루[일기환(壹岐丸)], 한국과 일본을 잇다

by 낮달2018 2024. 9. 11.
728x90
SMALL

[역사 공부 ‘오늘’] 1905년 9월 11일, 부산과 시모노세키, 이키마루 취항

▲ 1905년 9월 11일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연락선 '이키마루'호가 취항했다. ⓒ 부산대 로컬리티 아카이브
▲ 부관연락선 이키마루.  이 연락선은 부산의 앞 글자(‘부’)와 시모노세키의 뒷 글자(‘관’)을 따서 ‘부관연락선’이라고 부른다.

1905년 오늘, 부산과 시모노세키[하관(下關)] 사이의 240km 바다를 잇는 최초의 연락선 이키마루[일기환(壹岐丸)] 호가 시모노세키에서 취항하였다. 한국과 일본을 잇는 이 연락선은 부산의 앞 글자(‘부’)와 시모노세키의 뒷 글자(‘관’)을 따서 ‘부관연락선’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종종 순서를 바꾸어 ‘관부연락선’ 또는 ‘관부 항로’라고 불렀다.

 

침략과 조선인 강제동원의 연결창구

 

두 달 후에 체결된 을사늑약(11. 17.)으로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대한제국은 자주권을 잃게 되지만 이미 대한제국은 빈사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같은 해 1월 1일, 경부선 열차가 운행을 시작한 데 이어 이날 정기 뱃길을 엶으로써 일본의 식민지 수탈 시스템은 구색을 갖추어가고 가고 있었다.

 

부관연락선의 운항은 일본이 한국을 비롯한 중국의 동북지방·몽고 등지로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만든 국책해운회사였던 산요(山陽)기선주식회사가 맡았다. 이 연락선은 시모노세키와 고베(神戶), 고베와 도쿄(東京)를 잇는 일본 철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또 한국에서는 경부선·경의선 그리고 만주의 안봉선(安奉線)·남만주철도·시베리아철도 등과 이어짐으로써 동아시아 일대가 이 교통망을 통해 일제의 영향권 내로 편입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부관연락선은 ‘일제의 대륙침략과 조선인 강제동원의 연결창구’였다. 이 배편은 신천지를 찾아 조선과 만주로 이주하려는 일본인들뿐 아니라 징용에 끌려가거나 일제의 수탈로 농토를 잃고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 수탈의 대상이 되어 이른바 ‘내지(內地)’로 건너가려는 숱한 조선인들을 실어 날랐기 때문이다. [관련 글 : 사도광산 세계유산등재 강제동원문제 해결에 왕도는 없다]

▲ 부관연락선으로 취항한 금강환과 흥안환을 홍보하는 엽서(1937). ⓒ 민족문제연구소
▲ 연락선은 노동력 수탈의 대상이 되어 '내지(內地)'로 건너가려는 숱한 조선인들을 실어 날랐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무위키, 민족문제연구소 자료 등을 참고함.

첫 연락선 이키마루는 1,680톤급으로 승객 정원은 317명, 화물 적재량은 300t이었다. 선실은 일등실부터 삼등실까지 나뉘어 있었는데, 객실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일등석은 호화로운 휴게실과 레스토랑까지 완비된 공간이었던 반면, 삼등석은 비좁아 승객과 짐이 뒤섞인 형편없는 공간이었다. 배가 목적지에 닿는 데는 11시간 반이 걸렸다.

 

“아스팔트 칠을 담았던 통에 썩은 생선을 담고 석탄산 수를 뿌려서 저리는 듯한 고약한 악취에 구역질이 날 듯한 것을 참으며 제각기 앞을 서려고 우당퉁탕 대는 틈을 빠져서 겨우 삼등실로 들어갔다.”
      - 염상섭, 중편소설  <만세전(萬歲前)>  중에서

 

연락선으로 떠났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뒤이어 3천 톤급의 쇼케이마루[창경환(昌慶丸)]·도쿠주마루[덕수환(德壽丸)]·쇼토쿠마루[창덕환(昌德丸)] 등이 운항되었다. 1935년부터는 북중국, 만주, 몽고 등지로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여객과 화물의 격증에 대비하여 7천 톤급의 대형 여객선 공고마루[금강환(金剛丸)]·고안마루[흥안환(興安丸)] 등을 투입하면서 운항 시간도 7시간 반으로 단축되었다.

 

1926년 8월 4일, ‘사(死)의 찬미’를 노래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윤심덕(1897~1926)이 29살 동갑내기 애인인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대한해협에 몸을 던졌다. 미혼의 신여성과 유부남의 비극적 연애 사건으로 당시 조선 사회가 떠들썩했는데 두 사람이 뛰어내렸던 배가 바로 부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였다. [관련 글 :  1920년대식 ‘애정 증명’? 김우진과 윤심덕, 대한해협에서 지다]

 

대한해협의 연락선에서 이루어진 이 비극적 로맨스는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지만, 부관연락선은 어디까지나 일제 강점기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인적, 물적 자원의 독점적 수송 수단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뱃길이 열린 1905년부터 1945년까지 부관연락선은 대략 3천만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으니 이 배편이 일제의 식민지배와 대륙침략을 위한 대동맥의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 이병주 장편소설 <관부연락선>, 기린원

일제의 패망 이후, 부관연락선은 당시 80만 명에 이른 조선 거주 일본인과 200만 명에 육박했던 재일조선인들이 각각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배편 구실을 톡톡히 했다. 패망해도 일본인들은 제 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겠지만, 일제에 끌려나가 대한해협을 건넜던 숱한 조선인들 가운데 돌아오지 못한 이들은 또한 얼마였던가.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미군의 어뢰와 기뢰 공격이 계속되자 일본은 결국 1945년 6월 부관항로를 폐쇄하였고 이는 광복 이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이어졌다. 부관항로가 재개된 것은 1964년 1월, 우리나라 여객선 ‘아리랑호’가 취항하면서였다.

 

1970년 6월부터는 부산과 시모노세키까지 이틀에 한 번씩 오가는 부관페리(Ferry)가 다니기 시작하였다. 엄밀히 보면 ‘연락선’이라는 명칭은 일제 강점기 전후에 일본이 운항한 배편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항로를 이어받아 운행하는 부관페리를 ‘부관연락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부관 페리호’가 그 항로를 이었다

 

현재 부관항로에는 1998년에 도입된 일본 국적 하마유(Hamayuu)호(16,187t) 1척과 2002년에 들여온 한국 국적 성희(Seonghee)호(16,665t)가 각각 매일 1회씩 다닌다. 부산에서 저녁 8시에 출발하면 시모노세키에서는 저녁 7시에 출발하는 것이다.

▲ 부관연락선을 대신해 오늘날에는 부관 페리호가 양 도시를 잇는다. 사진은 한국 국적 성희호.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는 끝났고 이제 부관페리를 호를 통해 양국을 오가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를 즐긴다. 부관페리를 타고 큐슈(九州) 온천여행을 떠나는 한국인 가운데 71년 전까지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제 식민지 시대 대한해협을 잇던 이 연락선은 작가 이병주의 장편소설 『관부연락선』으로나 간신히 기억된다. 1940년에서 1950년까지, 해방 전후 10년간을 다루며 관부연락선’의 상징적 의미와 함께 중세 이래, 한일 양국 관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이 소설로 한일관계사라도 더듬어 볼까.

 

 

2016. 9. 11. 낮달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