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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다시 읽기

‘택택이 방앗간’의 추억

by 낮달2018 2019.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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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이 운영한 ‘택택이 방앗간’, 나도 방아를 찧었다

▲ 정미소 ⓒ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

마을엔 방앗간이 새로 하나 생겼다. 그것은 철이네와 같은 물방앗간이 아니었다. 강물로 바퀴를 돌리는 게 아니라 발동기로 했다. 그것이 돌기 시작하면 탁탁하는 굉장히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이 새로 생긴 방앗간을 ‘탁태기 방앗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다들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철이네의 물방앗간은 아무도 찾는 이가 없게 되었고, 따라서 쿵덕쿵덕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는 일도 영 없어져 버렸던 것이었다.
      - 이동하 장편소설 『우울한 귀향』 중에서

▲ 정미소 ⓒ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

선친께서 언제쯤 고향 마을에 방앗간을 세웠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그걸 세세하게 증언해 주실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고 나니 더욱 그렇다. 아마 내가 젖을 갓 뗄 무렵이 아니었는가 싶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대여섯 살 무렵까지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고 부모님께선 아랫마을, 면 소재지에 있는 방앗간 안의 쪽방에서 생활하셨다.

 

선친이 창업한 방앗간

 

나는 가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2Km 남짓한 시골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아랫마을로 가곤 했다. 마을 안쪽의 언덕에 올라서면 아랫마을의 강과 신작로, 그리고 아버지의 방앗간이 훤히 내려다보였으나, 어머니에게 가는 길은 얼마나 멀고 외로웠는지.

 

일곱 살 나던 해 봄에 우리는 소달구지를 타고 아랫마을로 이사했다. 아버지께서 방앗간 옆에다 당시 마을에서 가장 훌륭한 기와집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해 뒤에 나는 가슴에다 손수건을 달고 두어 집 건너 있는 초등학교에서 입학식을 치렀다.

 

집 앞 비포장의 신작로로 가물에 콩 나듯 버스나 화물차가 다녔지만, 늘 정적 속에 고여 있는 윗마을에 비기면 가로를 따라 형성된 길쭉한 마을은 내게 꼼짝없는 ‘난데’였다. 무엇보다 그것은 늘 돌아가는 방앗간의 소음과 먼지에 적응하는 일이었다. 우리 가족이 유난히 목소리가 큰 것은 타고난 것이기도 하지만 늘 방앗간의 소음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던 탓이 아닌가도 싶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우리 집은 인근에 하나밖에 없는 방앗간이어서 늘 ‘방아 거리’가 넘쳤다. 대부분의 농가에서 보리와 밀을 경작하던 때여서 여름철이면 거의 밤낮을 쉬지 않고 방아를 돌려야 했다. 밀이나 보리는 벼에 비겨 도정(搗精) 시간이 훨씬 길었다. 여름 추수철이 되면 공장 앞 길가에 밀이 백여 가마씩 쌓여 있곤 했다.

 

새 학년이 되면 학교에서 조사하는 부모 직업 조사 때마다 나는 헷갈렸다. 어느 해인가 담임선생님께서 분류해 주신 대로 나는 ‘공업’에 손을 들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농업에 손을 들었는데, 선생님이 불러주는 여러 직업군 중에 나는 아버지의 직업으로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랐던 까닭이다.

▲ 정미소 ⓒ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우리 집에서 하는 일이 ‘도정업(搗精業)’이라는 걸 알았다. 그 이후 아버지의 직업란에다 나는 필요하면 한자까지 병기(倂記)한 도정업을 써넣곤 했다. 도정업자들의 단체인 ‘도정업협회’는 후에 ‘양곡가공협회’로 바뀌지 않았나 싶다.

 

시골 부자 방앗간집의 사양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대구의 중학교로 진학했는데 그 무렵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 당시 처음 나왔던 삼륜차로 화물 운송을 시작했던 맏형의 사업이 부진한 데다 대형 사고가 났다. 사고 수습에 꽤 돈이 든 데다, 인근 마을마다 정미소가 들어서면서 우리 일거리는 거의 반의반 토막이 나고 만 것이었다.

 

빚에 쪼들리게 되면서 중학 시절 내내 나는 공납금 연체자였다. 방앗간에서 나오는 수입이 현저하게 줄고 빚쟁이에게 시달리면서 50대 중반을 넘고 있었던 선친께선 아마 크게 낙담하셨던 것 같았다. 당신 나름의 철학으로 살아오시면서 아버지는 인근에 인심 좋은 이로 ‘호(號)가 나’ 있었다.

 

열여섯에 장가를 들고 몇 년 후,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셨다. 거기서 익힌 기술 덕분에 기술자로 평양에 초빙되기도 했으니 부친은 그 시대로 치면 ‘하이칼라’였던 셈이다. 강 건너 이웃 고을에서 시작한 조그만 공장을 화재로 잃고, 해방 후 부친은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아마 농사짓는 일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신 부친이 새로운 사업으로 선택한 게 ‘정미소’였던 것 같다.

 

정미소가 호황을 누리는 동안에 아버지는 지역의 유지로 발돋움하셨다. 워낙 호인인 데다가 신식교육을 받지 못한 대신 어릴 적 배운 한학에 소양이 있었고, 특히 글씨를 잘 쓰셨다. 거기다 60년대의 시골에선 방앗간은 술도가(양조장)와 함께 가장 빵빵한 부자였으니 말이다.

▲ 발동기. 이 기계의 힘으로 방아를 찧었다. ⓒ충남발동기박물관

방앗간의 쇠퇴와 함께 양친도 노쇠해졌다. 외지에 나간 형님을 대신하여 내가 방앗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주로 방학 때에,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아예 붙박이로 나는 방앗간에서 일했다. 젊고 힘이 좋을 때였고, 방아 거리를 져 나르는 일부터 도정(搗精)의 전 과정을 내가 맡아서 했다.

 

뒤에 형님이 돌아와 전력으로 공장을 돌리기까지는 방앗간은 발동기를 돌려서 동력을 얻었다. 지금은 사라진 원동기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거대한 쇳덩어리다. 사진 오른쪽 휠에다 스타팅 핸들을 걸어서 여러 번 돌려서 시동을 걸었다. 평상시엔 혼자 힘으로 너끈히 돌렸으나 온도가 떨어지는 겨울이면 거기에다 방아를 찧으러 온 사람들이 밧줄을 걸어서 당겨 주어야만 했다.

 

‘방아쟁이’의 추억

 

시동이 걸리면, 사진 왼쪽의 보조 휠에다 주 피댓줄을 걸어서 다른 현미기·정미기·맥기·롤러 등을 가동했다. 각종 기계에 부하가 많이 걸리면 메인 샤프트(shaft, 축) 쪽의 도정 기계를 잇는 피댓줄이 벗겨지곤 하는데, 이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벗겨진 피댓줄을 다시 거는 일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쉽게 익힐 수 없는 일인 데다가 그건 적잖이 위험한 일이었다. 거기에 올랐다가 예비군복의 바짓가랑이가 샤프트 이음매 부분에 감기는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주변의 지지대를 붙잡고 버텼고 잔뜩 낡은 바지가 길게 찢어지면서 간신히 위험에서 벗어났다. 밑에서 상황을 지켜본 아주머니는 내가 죽는 줄로만 알았다고만 했다. 굴대는 바지를 펄럭이면서 돌아갔고, 나는 사색이 되어 있었다고 했다.

 

뒤에 형님이 현대식으로 정비하기까지, 벼 도정의 마지막 단계는 수동식이었다. 커다란 멍석을 깔고 다 찧은 쌀을 일일이 말로 되어서 가마니에 담는 과정을 되풀이하는데, 한창 바쁠 때는 그 말질을 무려 수백 번을 해야 했다. 나일론 부대가 나오기 전까지 가마니를 썼고, 그걸 만지는 것도 만만찮았다. 경운기나 달구지에 실린 볏가마를 등에 져서 부리는데 하루에 백여 가마를 져내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 정미소 내부. ⓒ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
▲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의 정미소 내부. 영화 <동주>를 찍은 마을이란다.

설날이 가까워지면 가래떡을 뽑았다. 사나흘쯤 거의 밤늦게까지 롤러와 떡 기계를 돌리는데 수고롭기는 하지만 수입이 꽤 짭짤했다. 어머니께서 롤러를 맡아 떡쌀을 갈아내면 이를 시루에다 안치고 쪄낸다. 요즘 도회에서야 기름이나 가스를 때지만 우리는 주로 왕겨나 장작을 땠다.

▲ 떡방앗간. 롤러로 떡쌀을 갈고 있다. 어머니는 수십 년 동안 이 롤러로 곡물을 갈았다.
▲ 떡방앗간. 시루에 떡을 쪄서(위) 기계에 넣어 가래떡을 뽑고 있다 .

기름통을 개조한 보일러 밑에다 왕겨나 장작 따위로 불을 때면 보일러의 물이 끓으면서 발생한 김으로 떡을 쪄냈다. 날씨는 추웠지만, 시루에서 오르는 김과 떡 기계에서 뽑아내는 하얀 가래떡의 구수한 냄새로 가득 찬 실내는 따뜻하고 정겨웠다.

 

이제 ‘포남정미소’는 흔적도 없다

 

나는 주로 불을 때거나, 쪄낸 떡을 떡 기계에 집어넣는 일을 하면서 가끔 벗겨진 피댓줄을 새로 거는 일을 맡았다. 끼니를 챙길 틈도 없이 바빠도 떡을 뺀 사람들이 집어주는 가래떡을 한입씩 먹다 보면 시장기도 느끼지 못했다. 명절은 코앞, 어쨌든 설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넉넉하고 푸근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형님이 집에 들어와 공장을 현대식으로 바꾸면서 일은 훨씬 수월해졌다. 원동기를 돌리기 위해 용을 쓰는 대신, 전원을 넣는 거로 기계는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미(精米) 단계에서도 저울 위에 얹은 용기에 쌀을 받아서 80kg이 되면 옆의 문을 터서 나일론 부대를 채우면 끝이었다.

 

형님마저 50대 중반에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만 남았다. 마침 그 무렵에 나는 학교를 떠나 있었다. 며칠 동안 방아 거리를 모아 놓고 형수가 읍내에 살고 있던 내게 전화를 하면 집으로 가서 한나절씩 방아를 찧어주곤 했다.

 

1994년에 복직을 하면서 결국 우리 집 방앗간은 문을 닫았다. 삼십몇 년 동안 인근 마을의 벼와 보리, 밀을 찧어주던 ‘포남정미소’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듬해인가 살림집까지 포함해서 우리 방앗간은 구미 사람에게 팔렸다.

 

새 주인은 방앗간과 묵은 집을 밀어 버리고 거기에다 반듯한 양옥을 세웠다. 그 집은 갈빗집으로, 흑돼지 구이집으로, 계속 간판을 갈면서 운영되고 있다. 어쩌다 성묘를 위해 시골에 들를 때마다 나는 그 집을 짐짓 외면하면서 지나가곤 한다. 그게 내 옛집 터라는 걸 새기는 거야 대수가 아니지만, 거기 서린 우리 가족사를 생각하는 것은 마음이 불편해져서다.

 

아버지께선 1985년에, 형님은 1992년에, 그리고 어머니께선 그 10년 후에 돌아가셨다. 결국, 포남정미소를 세우고 운영했던 주역들은 모두 가신 셈이다. 역사도 그렇다. 이제 시골에 예전 같은 방앗간은 거의 사라졌다. 집집이 간이 정미기를 마련하고 이를 돌려서 방아를 찧어 먹는 것이다.

▲ 집에서 운영하던 '포남정미소'는 지금 흔적도 없다. 전북 진안에 있다는 이 박물관에 가고 싶다. ⓒ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

정미소와 양조장은 5, 60년대의 시골을 풍미했던 일터가 아니었는가 싶다. 우리 집에서도 한창때는 두 명의 일꾼을 썼는데, 평균 서너 명의 건장한 배달꾼을 쓸 만큼 술도가는 호황이었다. 그러나 70년대를 넘기면서 두 업종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향의 술도가가 문을 닫은 건 아마 우리 방앗간보다 일렀을 것이다.

 

결국, 두 업종은 이 땅의 근대화를 넘기면서 그 명운을 다한 것이다. 시골 부자는 ‘방앗간’과 ‘술도가’ 집이라는 얘기도 결국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보릿고개를 힘들게 넘던 사람들은 우리 방앗간에서 가끔 허기를 면했다. 양친께선 방아를 찧으러 온 이들에게 늘 점심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점심은 적당하게 보리를 섞은 고봉으로 올린 밥 위에다 무나 배추의 생채 따위를 얹은 약식 비빔밥이었다. 된장으로 비빈 그 밥을 볼이 미어지게 먹는 동네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방아쟁이’ 아버지를 둔 덕분에 나는 배곯지 않는 넉넉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의 사진창고에서 추억의 ‘정미소’ 사진을 나는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꼼짝없이 나를 저 60년대의 안개와 먼지 속으로 데려간다. 그게 역사가 되었듯이 우리의 기억도 이제 우리 세대에서 시나브로 잊히고 있는가. 나는 귓전에 아주 분명하게 우리 집 방앗간이 택택택, 하며 돌아가는, 그 추억의 시간을 흔들던 방앗소리를 듣는다.

 

 

2008. 11.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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