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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아름다운 우리 말글 맵시’, 위당 정인보를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19.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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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자 위당 정인보가 쓴 아름다운 우리 ‘말글 맵시’

▲  위당 정인보 (1893 ∼ 1950) 선생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선생을 처음 만난 건 개천절이나 광복절의 노랫말을 통해서였다. 그는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등의 국경일 노래의 가사를 썼다. 위당은 정부 수립 후 국가 사정(司正)을 맡은 감찰위원장을 지냈는데 이들 노랫말을 지은 것은 이 시기였을지 모르겠다.

 

위당이 다듬은 아름다운 우리 말글의 맵시

 

위당의 노랫말은 좀 다르다. 그가 한말의 대학자 이건방(李建芳)의 제자로 10대 시절부터 문명을 날렸던 한학자였다는 사실은 그가 쓴 아름답고 전아한 의고체(擬古體)의 한글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 듯하다. 그가 쓴 노랫말에는 우리 고유어의 단정한 아름다움이 넘친다.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한강 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3·1절 노래)

“삼천만 한결같이 지킬 언약 이루니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맞추리라.”(제헌절 노래)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광복절 노래)
“오래다 멀다 해도 줄기는 하나 다시 필 단목(檀木) 잎에 삼천리 곱다.”(개천절 노래)

▲ 1943년 위당 서간. 위당 정인보 선생이 스승인 난곡 이건방 선생의 시를 생각하며 친구에게 보낸 친필 편지

그러나 노랫말이 아닌 제 모습을 갖춘 위당의 글은 만나게 된 것은 초임 교사 시절이었다. 당시 4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나는 그가 쓴 이충무공 비문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치게 된 것이었다.

 

군데군데 한자어를 쓴 걸 굳이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글에 나직하게 깔린 우리말의 맵시는 그런 한자어의 걸림을 메꾸고도 남음이 있다. ‘바다를 버리면 적은 바로 한강에 닿을 것이니, 어찌하리까.’ ‘일곱 해 만에 뭍과 바다가 처음으로 맑았다.’, ‘뒷사람들이여, 부끄럽다.’ 등의 글귀가 주는 울림은 남다르다.

 

특히 ‘그 밤에 달이 밝았다.’는 구절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는 특별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일체의 수식을 벗은 건조한 문장이건만 그 문장이 가진 함의는 녹록하지 않다. 그 짧은 문장은 한 인간의 죽음이 연출하는 풍경 속에 처연한 비장미를 은은히 되 비추고 있지 않은가.

 

(……) 순천을 거쳐 보성 지나 회령포에 오니, 전선(戰船)이라고 겨우 열이다. 깨어진 나머지를 모아서 거북선 두 척을 더 만들었다. 조정에서 공에게 임무를 맡기기는 하고도, 공 역시 어찌할 수 없으려니 하여, 다시 육지에 오르라고까지 하는 것을, 공은 “만일 바다를 버리면 적은 바로 한강에 닿을 것이니, 어찌하리까. 남은 배가 아무리 적어도 신이 죽지 아니하였으니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오리다.”고 곧 장계(狀啓)하였다. 그러나 잔선(殘船) 열둘을 가지고 바다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어찌 누군들 슬퍼하지 아니하였으랴.

(……) 공이 순천서 나올 도적들의 길에 복병을 늘어놓고 몸소 마주 나와, 들어오는 적을 노량에서 만났다. 그 밤에 달이 밝았다. “이 원수가 없어진다면 죽어 한이 없겠나이다.” 하늘을 우러러 빌고 나서, 적선 200여 척을 무찌르는 동안에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한창 독전하는 가운데 적탄이 좌액(左腋)에 박혀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다. 나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하고는 그만 숨이 끊기었다.

(……) 만일 명군(明軍)의 내통이 없었던들 순천 있던 적마저 살아가지 못하였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이 지난 뒤는 여러 군데의 적이 한 번에 씻은 듯이 없어져서, 일곱 해 만에 뭍과 바다가 처음으로 맑았다.

지난해 어머니를 여의고 울면서 이 앞길을 지나던 공이, 8도 노소 남녀로 하여금 당신을 울게 하면서 상여로 이 앞길을 접어들었더니라. 뒷사람들이여, 부끄럽다. 노량 달밤에 공이 마지막으로 무엇을 빌었기에 300년을 얼마 넘지 아니하여 나랏일이 어떠하였던가?

   - '나라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이충무공 사적비(충남 온양)

[나라 사랑하는 마음 전문 보기]

 

한글과 그것으로 깁고 짓는 그의 아름다운 글은 비단 산문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1925년에 발표한 ‘자모사(慈母思)’는 40수로 된 연시조다. 섬세하고 전아(典雅)한 품격의 우리말로 형상화하고 있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회고와 그리움’은 눈물겹다.

 

위당의 본관은 동래. 자는 경업(經業), 호는 위당(爲堂), 담원(薝園), 미소산인(薇蘇山人)이다. 증조부가 서른 해 가까이 정승으로 다섯 임금을 섬긴 명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열세 살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하였다. 위당의 문명은 이미 10대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가 1912년에 신채호·박은식·신규식·김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교포의 정치적·문화적 계몽 활동과 광복 운동에 참여하였다.

 

일제 강점기 실학연구 주도, 일제 협력 거부 절필

 

부인의 돌연한 죽음과 노모를 위로하고자 귀국한 뒤에는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연희전문학교·협성학교·불교중앙학림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며,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족 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1931년에는 민족문화 유산인 고전을 널리 알리고자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 고전 해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1935년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 사후 100주년을 맞아 실학을 소개하기 위한 학문행사를 주도, 실학연구를 주도하였다. ‘실학(實學)’이라는 역사적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1936년 위당은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학·국사학·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친 강좌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식솔을 이끌고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 산중에 은거하였다. 그는 일제에 협력하지 않기 위해 절필하고 은거하는 것을 택한 것이었다.

▲ 위당의 저작들. <조선사 연구>(1947), <담원시조집>(1948), <담원국학산고>(1955)

광복되자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가려졌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올바른 국사를 알리고자 1946년 9월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펴냈다. 위당은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의 전통을 이었지만, 독립투쟁의 방도로써 민족사 연구를 지향하던 신채호의 그것과 달리, 엄밀한 사료의 추적으로 사실을 인식하고, 그 민족사적 의미의 부각을 꾀하는 신민족주의 사학을 지향했다.

 

1947년 국학의 최고학부를 표방하고 설립된 국학대학(國學大學) 학장에 취임, 일제 식민지배 당시 일시 단절된 듯하던 국학을 되살리고자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 이승만의 간청에 신생 조국의 관기(官紀)와 사정(司正)의 중책을 지닌 감찰위원장을 맡았다.

 

해방 뒤 공직 참여, 한국전쟁 때 납북

 

그러나 1년 후 정부의 간섭으로 의지를 펼 수 없다고 판단, 미련 없이 자리를 내놓았다. 은거하며 오로지 국학연구에 몰두하던 그는 1950년 7월, 서울에서 공산군에게 납북되었다. 시문과 사장(詞章)의 대가로 광복 후 전조선문필가협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서예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집은 4, 5백 석지기 전답을 가진 넉넉한 집안이었다 한다. 그러나 경술년 나라가 망하자 그는 중국에 망명, 독립운동하느라 대부분 팔아 버려 뒷날엔 집은커녕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선비로 일생을 마쳤다.

 

이 강골의 선비는 ‘강직’과 ‘청렴’의 삶을 살았다. 그는 창씨개명은 물론 일본에 대한 일체의 협조를 거부했다. 훼절하지 않기 위해 제자의 집인 전라도 익산으로 옮겨 살기까지 해 그는 부끄럽지 않게 해방을 맞을 수 있었다 한다.

 

선비로서, 민족으로서의 뜻을 지키고자 한 그의 강직한 태도가 빚은 일화는 적지 않다. 지기였던 사학자 최남선이 일제의 괴뢰국가 만주국의 엘리트 양성기관인 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하자 그의 대문 앞에 술을 부어놓고 대성통곡하며 벗인 ‘육당의 죽음을 조문’했다. 그에게 ‘훼절’과 ‘변절’이란 ‘죽음’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학자로 위당의 공적은 민족문화의 유산인 고전의 소개와 실학연구에서 두드러진다. 위당은 이러한 연구를 통해 한문학·국사학·국문학 등 국학 진흥의 바탕을 열었다.

 

위당의 ‘청렴’한 공직생활은 국학대학장과 감찰위원장 재임 기간에 두드러졌다. 그는 학장에게 주어진 승용차도 거부하고 전차로 출근하였고, 감찰위원장 시절에도 셋방살이를 면하지 못하고 자녀들이 학비를 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 평양 재북인사릉에 있는 위당의 무덤. ⓒ 연합뉴스

위당은 한국전쟁 중에 북으로 납북되어 11월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향년 58세. 나라 빼앗긴 통한의 세월이 끝나기 무섭게 이 땅을 갈라놓은 이데올로기의 칼바람이 결국, 한 국학자의 삶도 온전히 이루지 못하게 하였던가. 1990년 정부는 위당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민족’과 ‘자존심’을 지켜낸 일생

 

6월 8일 자 <한겨레>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는 위당이 1947년 8월 24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남한을 방문하는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보낸 ‘미국에 보내는 진정서’(Appeal to the United States)를 소개하고 있다.

 

정용욱은 “번역된 영문으로도 유려한 문체에 비장미마저 느껴”지게 하는 200자 원고지 43장 분량의 장문의 이 편지의 핵심은 “민족적 자존심이 신탁통치를 허용하지 않으니 하루빨리 한국인 손으로 정부를 수립하게 하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관련 기사 : 신탁통치안 왜곡의 출발은 날조 전문미국 기자]

▲ 연세대에 세운 정인보 흉상 출처: 연세대공식블로그

위당은 편지 앞부분에서 한국인은 민족적 자존심이 유난히 높은 민족이고, 그것을 미국 시민들에게 설명하고자 편지를 쓴다고 밝히면서 이를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 이전 상황과 이후 상황을 비교해서 설명했다고 한다.

 

위당은 점령 이전에는 “가장 외진 마을에서도 도둑과 강도가 없었고, 어떤 거리에서도 싸움이 관찰되지 않았다. 이는 모두 대중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민족적 자존심 때문”이라고 썼다. 기사는 해방 뒤 신탁통치 관련 정국을 다루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사에서 그가 쓴 ‘민족’과 ‘자존심’은 그가 평생 탐구한 ‘국학’과 ‘나라 사랑’의 전제이고 고갱이였으리라는 걸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그가 이룬 학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가 쓴 숱한 명문의 문장 갈피마다 담긴 것이 바로 그러한 태도와 관점이었다는 걸 말이다.

 

그러나 그가 줄곧 이르는 ‘나라 사랑’은 이른바 ‘국뽕’류의 저열한 국수주의·국가주의·민족주의와는 격을 달리함은 말할 것도 없다. 위당이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가르쳐주는 ‘강직’과 ‘청렴’의 삶과 함께 그가 쓴 글을 다시금 읽어보길 권하는 까닭이다.

 

 

2007.11.17. 쓰고, 2019.6.9. 깁고 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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