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0주년 맞은 정태춘·박은옥... 그와 함께한 우리의 젊은 날
정태춘(1954~)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는 정태춘·박은옥은 공영방송 무대로 초청되고 각종 인터뷰 등으로 . ‘아이돌 못지 않은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고 한다.
정태춘·박은옥 40 프로젝트로, '붓글전’을 포함한 전시 <다시, 건너간다>가 베풀어졌고, 전국 순회 ‘날자, 오리배’ 공연도 곳곳에서 펼쳐졌다. 두 번째 시집 <슬픈 런치>(천년의시작)도 출간되었다.
40주년, 정태춘의 소환
그러나 서울에서 벌어지는 부산한 움직임은 지방 소도시에 사는 이들에게 좀 먼 이야기다. 내가 정태춘을 다시 만난 것은 지난 4월 6일 <한국방송(KBS)> 1텔레비전에서 특별 편성해 방송한 ‘열린음악회’의 정태춘-박은옥 부부 편이었다. 나는 무심코 채널을 돌렸다가 거기 나온 정태춘·박은옥 부부가 함께 노래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채널을 고정했다.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부부가 노래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노래를 통해 언제부턴가 잘 상상되지 않는 1990년대를 수월하게 떠올렸는데 그 느낌이 슬픔이었는지, 회한이었는지, 한갓진 추억의 환기였는지는 알 수 없다.
거실에서 내가 혼자서 노래를 듣는 동안, 아내는 안방에서 같은 채널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방송이 끝나고 안방 문을 여는데, 아내가 상기된 표정으로 정태춘 특집방송을 넋을 잃고 보았다고 말했다. 그래, 나도 봤어...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정태춘 40주년 기념 공연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 3월 초 1989년도에 해직된 전교조 동료들의 단체대화방에서였다. 정태춘이 KBS 열린음악회 관객으로 특별히 해직교사를 초청하여 자리를 배정받았는데 대구에서는 전세버스로 녹화방송에 참석할 희망자를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부러 전세버스를 타고 공연에 쫓아갈 정도는 아닌지라, 나는 공영방송 KBS에서 정태춘 특집방송을 한다니 세상 참 좋아졌다며 웃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텔레비전에 나온 게 수십 년 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나는 열린음악회는 이내 잊어버렸다.
내가 정태춘의 노래를 처음 만난 게 언제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기억의 선후가 꼬여 있기는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시골 여학교에 근무할 때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시인의 마을’을 듣고 ‘원 세상에, 저런 노래도 있었나’ 하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그만큼 그의 노랫말이 주는 느낌은 새롭고 신선한 것이었다.
나는 대중가요에선 흔치 않은, 그가 쓴 노랫말에 매료되었다. 일찍이 ‘먼 대지 위를 달리는 사나운 말’과, ‘말발굽 소리’를 노래한 이가 어디 있었던가 말이다. ‘고독’과 ‘방황’을 노래한 유행가야 넘쳤지만,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번민의 시인’을 이야기하고, ‘고행의 방랑자’를 노래한 이는 아무도 없었지 않은가.
‘북한강에서’의 서정도 만만찮다. ‘해가 뜨는 새벽 강’도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는 화자의 모습은 정희성의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와 묘하게도 겹친다.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도 ‘그 텅 빈 거리’의 울림도 예사롭지 않다.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려 하는 화자 앞으로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는 것이다.
이는 시인 아닌 가객(歌客) 정태춘이 ‘대중음악계의 음유시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러나 그의 노래와 삶은 단순히 ‘음유(吟遊)’로 한정할 수 없다. 그는 저 어두운 1980년대와 90년대에 우리 사회의 모순에 맞서 투사 못지않게 싸우며 살아온 이기 때문이다.
비합법 음반 발표로 '사전심의 폐지' 이끌다
1991년인가, 그는 "더는 ‘촛불’ 따위의 노래는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경찰로 포위된 대구 경북대학교 대강당에서 베풀어진 <단결 투쟁을 위한 시와 노래의 밤> 같은 공연에서 목메어 불렀던 노래들로 그를 기억한다. 그 어두운 시대를 관통하면서 그의 노래는 칼이었고, 방패였고 우리는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힘과 용기를 얻었다.
내게 정태춘의 노래로 각인된 것은 ‘아, 대한민국'이다. 80년대의 끝에서 90년대의 중반까지 우리는 그가 이 음반에서 노래한 한국의 현실을 공유하고 같이 아파하면서 공동의 적을 향한 분노를 나누곤 했다. 같은 음반에 실린 어린 남매의 안타까운 화재 사고를 다룬 ‘우리들의 죽음'은 또한 얼마나 큰 슬픔과 분노로 다가왔던가.
그 정태춘이 부인 박은옥과 함께 노래 인생 40돌을 맞았다. 그래서 공영방송 KBS의 두 채널이 그의 특집을 마련하고 그가 살아온 지난 시대와 그의 노래를 기린 것이다. ‘열린음악회'에서 두 사람은 각각 ‘시인의 마을’, ‘북한강에서’(정태춘), ‘회상’, ‘윙윙윙’(박은옥) 같은 초기의 서정성 가득한 노래들을 솔로로 불렀다. 또 듀엣으로 ‘92년 장마 종로에서’와 ‘사랑하는 이에게’에게 함께 노래했다.
특별손님으로 나온 전인권이 ‘떠나가는 배’를 불렀고, 정태춘은 ‘정동진3’에 이어 ‘5·18(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과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를 유주현의 창, 바리톤 박정섭과 함께 노래했다.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는 들은 노래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막이 열리며 환호하던 관객들은 이내 두 사람의 노래가 이어지면서 차분하고 진지해졌다. 나이 지긋한 관객들의 얼굴에는 정태춘과 그의 음악을 통해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읽혔다. 주의해서 살폈지만 나는 객석에서 아는 얼굴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가 ‘5·18'을 부를 때 관객들은 어떤 고통을 환기하는 듯하거나 노래하는 이의 격동하는 마음에 공감하는 표정으로 화답했다. 정태춘 부부만이 아니라 관객들도 40년 세월과 그 갈피에 펼쳐진 기억을 돌이켜보고 있는 듯했다.
정태춘·박은옥의 40주년은 형식적으로는 건조한 몇 줄의 이력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는 1978년 정규 앨범 <시인의 마을>로 데뷔하여 이듬해(1979) MBC 가요대상 신인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 부문상 수상했다. 이때만 해도 그는 여느 가수와 같은 입문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정태춘이 일반 가수의 길을 버리고 예술문화운동 진영으로 옮긴 것은 1989년 전교조를 지지하는 모금 공연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의 전국 순회공연을 계기로 해서였다. 1990년 그는 가요의 ‘사전심의’를 거부하며 비합법 음반 <아, 대한민국> 발표하면서 사전심의 폐지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합법 음반을 낼 수 있는 정태춘이 비합법 음반을 발표한 것은, 거기 수록된 노래 대부분이 사전심의를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여느 대중 가수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는 명백한 표지였다.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노래들을 수록한 비합법 음반의 제작과 배포는 기존의 음반 유통 경로와 가수로서의 통상적 활동을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해 6월에 정부가 음반법 처벌 규정을 강화한 개정안을 내놓았는데도 그가 비합법 음반을 발표한 것은 민예총의 음반법 개악 저지 투쟁, 음반법 개정 투쟁의 선봉장으로 나서겠다는 명백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1993년 그는 두 번째 비합법 음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발표했다. 1996년, 헌법재판소는 음반법에서 규정한,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의무화하고 이를 어길 경우, 형사처벌하도록 한 것은 헌법이 금지한 검열에 해당한다고 보고,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그해 정태춘은 민예총에서 주는 민족예술상을 받았다.
그는 2007년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을 받았다. 비평가들과 음악인이 오직 음악성으로만 선정하여 상을 수여하는 권위 있는 이 상을 받음으로써 정태춘의 자신이 선택한 삶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그의 앨범 <시인의 마을>, <아, 대한민국>, <92년 장마, 종로에서> 등은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었다.
그의 40년, 혹은 민주시민이 함께한 시대
매체별로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정태춘은 “노래로 나의 존재와 실존적 고민, 세상에 관한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었다, 노래는 내 인생의 전부였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아, 대한민국…>은 저항하는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이나 계획에서 나온 게 아니라 내 안의 분노에서 나온 앨범”이라고도 했다.
그는 또 “시장이 모든 것을 장악했”다면서 “이윤이 발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니 “시장 밖에서 뭔가를 만들어보자는 얘기를 나누고 있”다고 했다. 40년 노래 끝에 그는 “시장 밖 예술이란 화두”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또 자기 노래가 이룰 수 있는 한계를 발견한 듯, 40주년 기념 음반에 새 노래 두 곡을 싣는 것을 끝으로 더는 노래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붓글’이라는 형식의 작품을 전시하고 시집을 내는 것은 그러한 인식의 결과처럼 보인다.
“열차는 달리고 나는 거기서 내렸다.”(시집 <슬픈 런치>의 '시인의 말’)는 그는 “앞으로 조용하게 소진되자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싸움에서 졌다”고 하는데도 그의 비관적 언사가 예사롭지 않되 우울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그의 치열한 삶의 아우라 덕분일지도 모른다. (이상 인용 부분은 <한겨레> 인터뷰)
그는 또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열정적으로 노래한 1990년대 초반을 이르면서 그런 시대를 지나온 것을 ‘행운’이라고 말했다. “지리멸렬하게 모순이 쭉 이어지는 그런 시대를 사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것보다 역동적인 시대를 산 게 예술가로서 인간으로서 감사한 일”이라면서.
“사적 정의로 치열하게 살 수도 있지만 공적 이상과 가치를 가지고 사람들과 연대해서 실천하고 움직인다는 건 인간의 여러 매력 중에서 아주 특별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공적 이상과 가치’, ‘연대’와 ‘실천’을 이야기하는 이 진술은 어쨌든 저 어두운 시대를 정면으로 돌파해온 그이기에 할 수 있는 진술이다. 그것은 시대의 모순에 맞서 싸워온 자기 삶에 대한 긍정과 추인으로 읽힌다.
정태춘이 아니라도 그 시절에 저항의 삶을 선택했던 이들이 그 과거의 고통을 후회하지 않는 것은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일상의 권태로 고여 있는 삶이 아니라, 비록 고통스러웠을지라도 자신의 존재 조건에 맞서 살았던 역동의 삶은 우리네 삶에서 빛나는 훈장 같은 것이 아닌가 말이다.
정태춘은 1954년생, 나와 같은 베이비붐 세대다. 나는 그가 살았던 역동적 삶의 일부를 함께했다. 열린음악회에서 그의 노래를 들으며 저 뜨거운 시대를 떠올렸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는 노래로, 우리는 함성과 구호로 거리를 메우며 싸웠다. 그리고 좋든 싫든 우리는 그 투쟁의 결과인 현재를 살고 있다.
정태춘의 40주년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그의 시대’를 생각한다. 그가 건너온 1980, 90년대 군부독재의 질곡과 격랑을 헤쳐온 한 가객의 연대기를. 그러나 우리는 잊고 있다. 그의 시대가 그의 것이기만 하지 않다는 것을. 그것은 어두운 분노의 시대를 함께한 모든 민주시민의 날들이기도 했다는 것을.
열린음악회는 두 사람이 함께 부르는 ‘사랑하는 이에게’를 관객이 따라 부르며 끝났다. 나는 무심코 흘려들었던 박은옥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신비하다고 느꼈다. ‘열차에서 내렸’으니 노랫말의 마지막 구절처럼 두 사람이 서로에게 “떨리는 내 손을 잡아주”고, “더운 가슴 안아주”면서 남은 날들을 함께 하였으면 좋겠다.
2019. 05. 0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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