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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조세희,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쏘아올리다

by 낮달2018 2023.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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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78년 6월 5일, 조세희 연작소설집 『난쏘공』 초판 제1쇄 발간

작가 조세희(1942~ )는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으로 산업사회의 그늘에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공장 노동자이면서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도시 빈민을 상징하는 보통명사 ‘난쟁이 일가’를 창조해냈다.

그는 당시 제한되었던 표현의 자유 때문에 상징적인 형식으로 이들 난쟁이 일가의 삶을 서술했는데, 정작 독자들은 그러한 표현의 방식을 통해 역설적으로 1970년대 산업사회의 모순에 정서적으로 다가가고 그것을 내면화할 수 있었던 듯하다.

이 책이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 널리 읽히면서 의식화 교재 역할까지 한 것은 서정적 문체로 형상화된 난쟁이 일가의 삶을 통하여 ‘시대의 아픔’을 추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출간된 지 41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꾸준히 팔려 2017년에는 300쇄를 찍었다. 여느 베스트셀러와는 달리 총 발행 부수는 137만 부에 그쳤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40년 넘게 꾸준히 팔리고 있음은 소설로 제기된 ‘역사에의 분노 혹은 각성의 눈물’(김병익)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의미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세상은 산업화시대에서 멀찌감치 나아왔지만, 난쟁이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2016년에는 지하철 구의역에서 숨진 19살 젊은 노동자를 추모하는 숱한 시민들의 애도로 분출했던 우리 사회의 공감과 분노는 죽음의 작업장에 내몰려 숨진 숱한 ‘청년 김용균’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는 또 다른 ‘난쟁이’를 양산하는 이 비정규직 시대의 비열하고 가증스러운 자본의 민낯인 것이다.

2016년에 쓴 글을 읽으며 2016년과 2019년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지를 곰곰히 생각해 본다.

                                                           2019. 6. 4.

<난쏘공> 38년과 그 여자의 칼날

▲ 용산참사 현장을 찾은 작가 조세희. 그는 책이 나온 지 30년이 지났지만, 전혀 변한 게 없다고 했다.

38년 전 오늘, <난쏘공> 초판 제1쇄 발행

 

1978년 오늘, 작가 조세희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초판 제1쇄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그해 가을쯤에 나는 근무하던 병영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 책을 읽었었다.

 

그리고 29년, <난쏘공>은 2007년 9월, 100만 부를 넘기면서 기념으로 228쇄를 찍었다.[관련 글 : <난쏘공> 백만 부, "난쟁이 일가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2007/09/06)]

 

70년대에 내가 병영에서 읽었던 책은 물론 지금 내게 없다. 전역 후 복학해서 새로 산 <난쏘공>은 초판 25쇄(1983), 세로쓰기 본이었다. 2013년에 새로 구매한 책은 이성과힘에서 발행한 초판 143쇄(2012)이다. 그걸 확인하면서 보니 책 앞 서지사항에 간기(刊記)가 실려 있다.

▲ <난쏘공> 서지사항 아래 실린 이 책의 간기. 문지에선 모두 4판 134쇄가 나왔다.
▲ 내 서가의 <난쏘공> 초판본(오른쪽, 문학과지성사 간)과 이성과힘에서 발행한 초판 143쇄 본(2012)

38년,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사회가 풍요롭고 자유로워진 것 같지만, 〈난쏘공〉을 처음 내던 때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봅니다. 난쟁이 가족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거죠.”
      - <한겨레>(2007. 9. 3.) 조세희 작가 인터뷰 중에서

 

작가가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한 때로부터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2009년 1월이었다. 용산4구역 세입자들이 이주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강제 퇴거에 항의하며 철거 예정인 빈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튿날 새벽, 경찰특공대를 투입한 진압 작전 개시되었고, 건물 옥상 가건물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대형 화재가 발생해 농성중인 철거민 세입자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사망했다.

 

시민사회는 경찰의 성급하고 무리한 진압이 부른 참사라며 사건의 진상규명과 진압 작전을 지휘한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지만, 검찰은 경찰의 작전이 정당했다며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법원은 철거민들에게만 책임을 지워 중형을 선고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이 사건이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용산참사)’이다.

 

이 참사의 현장을 찾은 조세희 작가는 “<난쏘공>이 출간된 지 30주년 됐는데, 그 30년 동안 달라진 게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국의 뉴타운도 집 문제고 <난쏘공>도 집 문제”라며 “그러나 한국이 부족한 것은 집이 아니라 지혜”라고 꼬집었다고 했던가.

 

그리고 다시 7년이 지났지만 2016년 현재, 한국의 시간은 멈춰 있다. 생존권을 빼앗겼던 철거민들은 중형을 선고받고 감옥으로 가야 했지만, 진압 책임자였던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은 참사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진 적이 없다. 그는 경찰청장 사퇴 후 공기업 사장을 거쳐 마침내 지난 총선에서 여당 국회의원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난쏘공> 초판 제1쇄가 나온 지 어느덧 38년……. 그것은 병영에서 그의 소설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던 스물셋 병사가 예순하나, 회갑을 눈앞에 둔 초로가 된 세월이다. 그러나 아직도 폭력적인 방식의 재개발은 계속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철거민으로 내몰리고 있다. 2016년 동아시아 강제 퇴거 국제법정에 제소된 ‘한국 강제 퇴거 사례’에서 그것을 아프게 확인한다.

<난쏘공>은 산업화 시기를 살아간 도시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서정적 연대(連帶)의 기록이다. 난쟁이 일가로 표상되는 소외 계층의 삶이 역설적으로 환기하는 우리 자신의 안일한 삶에 대한 치열한 반성이다. 그것은 폭력적으로 되풀이되는 사실적인 삶을 매우 비사실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소설적 장치를 통해 훨씬 크고 강한 울림으로 독자에게 다가왔다.

 

<난쏘공>, 산업화시대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삶

 

작가는 소수의 등장인물과 그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단순한 사건들에 렌즈를 들이대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복잡하고 순환적인 세계 인식’(비평가 김병익)이 깔려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용자와 노동자,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화해 불가능한 대립’이 비극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주말 오후에 나는 서가에서 <난쏘공>을 꺼내 들고 오랫동안 그것을 뒤적였다. 새삼 작품의 중심인물인 난쟁이 일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가운데 정서적 연대감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 많다는 걸 확인한다. 난쟁이 일가 가까이서 그들을 위해 싸우는 활동가 지섭도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가정주부 신애에게 강력한 연대감을 느꼈다.

 

젊은 시절의 꿈을 잃고 현실에 좌절한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중산층 주부인 신애는 단편 ‘칼날’과 ‘육교 위에서’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칼날’에서 자신의 집 수도를 고친 난쟁이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폭력에 맞서 싸우는 여성이다.

▲구의역에서 숨진 청년 노동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사고현장에서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 ⓒ 오마이뉴스

수도에선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70년대는 늘 그랬다. 난쟁이는 수도꼭지를 좀 더 낮은 자리에 달면 남보다 조금 일찍 물을 받을 수 있다면서 일을 맡겨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앞뒷집 이웃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도 난쟁이’, 공감과 분노의 연대

 

신애는 골목길로 나가 그를 불러 일을 맡긴다. 난쟁이는 그 조그만 몸을 놀려서 열심히 일한다. 그것을 위태하게 바라보면서 그녀는 말한다. “전 아저씨 같은 분이 좋아요. 방금 아저씨와 이웃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낀 이가 어찌 신애만이었을까.

 

일이 끝날 때쯤, 펌프 가게 사내가 들이닥쳤다. 자신의 일감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사내는 난쟁이를 차고 짓밟고……,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다. 난쟁이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신애는 부엌에서 큰 칼과 생선칼을 들고나와 사내의 옆구리를 찌른다.

 

신애가 뿜어내는 무서운 살기에 놀란 사내는 떠나고 난쟁이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 간신히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 ‘끈질긴 생명’ 앞에 신애는 터지는 울음을 참으면서 ‘낮게’ 말한다.

 

“저희들도 난쟁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신애는 밤늦게 새로 단 수도 아래 양동이를 놓고 수도꼭지를 튼다. ‘꾸르륵꾸르륵하는 소리가 파이프를 타고 왔’고 ‘물은 양동이 안으로 흘러 떨어졌다.’ ‘딸애가 따라 엎드리며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신애의 귀에는 수돗물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값싼 동정이 아니다. 무력한 남편을 향해 ‘우리는 난쟁이’라고 절규하고, ‘세상은 난쟁이에게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 여자는 이 타락한 자본의 세상에서 자신의 지위를 깨달은 시민이다. 그것은 계급적 각성이면서 이 승자독식의 사회에 맞서는 데 필요한 것은 ‘약자들의 연대’라는 사실의 확인이다.

 

그것은 2016년 6월 현재, 지하철 구의역에서 숨진 19살 젊은 노동자를 추모하는 숱한 시민들의 애도 메시지로 이어지고 있다. 한 청년을 죽음으로 내몬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고 있다. 이 공감과 분노의 연대는 언제 ‘무엇’이 되어 다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 2018년 12월19일 열린 고 김용균씨 3차 촛불 추모제에 놓인 고인의 영정. 연합뉴스

 

“말이 아닌 ‘비언어’로 우리를 괴롭히고 모독하는 제삼세계형 파괴자들을 ‘언어’로 상대하겠다는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 며칠 밤을 새우고도 제대로 된 문장 하나 못 써 절망에 빠졌던 것도 바로 나였다. 나의 이 ‘난쟁이 연작’은 발간 뒤 몇 번의 위기를 맞았었지만 내가 처음 다짐했던 대로 ‘죽지 않고’ 살아 독자들에게 전해졌다.

이 작품은 그동안 이어져 온 독자들에 의해 완성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낀다. 이 점만 생각하면 나는 행복한 ‘작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나는 아직도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제삼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경험한 그대로, 우리 땅에서도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

     -   작가의 말, ‘파괴와 거짓 희망, 모멸의 시대’(<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에서

 

작가가 말한 혁명은 무엇인가. 구체제를 조금 되 물리고, 조그마한 개선으로 끝나버린 우리들의 혁명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그 혁명의 목격자여야 하는가. <난쏘공>을 덮으면서 나는 구의역 사고현장에 놓인 하얀 국화꽃에 숨겨져 내연하고 있는 공감과 분노의 크기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2016. 6.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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