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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김일성과 조선인민혁명군, 함남 갑산 보천보(普天堡) 습격

by 낮달2018 202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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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37년 6월 5일, 김일성 함남 갑산 보천보를 습격하다

▲ 보천보 전투 보도한 호외. 1998년 방북 때 <동아일보>는 이 원판을 금으로 만들어 북에 선물했다 .

1937년 6월 4일 밤 10시,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連軍) 2군 6사 소속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150명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 양강도 보천군 보천읍)를 습격했다.

 

김일성 부대는 2개 습격조와 2개 차단조, 1개 정치공작조로 나누어 제1습격조는 일제 경찰관 주재소·면사무소·소방서를 공격하고, 제2습격조는 우편국·농사시험장·산림보호구를 습격하여 기관 건물들을 전소시키고 격문을 살포하였다.

 

이 전투는 1937년 3월 조선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이 국내 진공 작전을 펴기로 함에 따라 수행되었다. 작전은 최현(1907~1982, 해방 후 북한 부총리, 최룡해의 부친)의 인솔하에 한 부대를 무산(茂山) 방향으로 진출시키고, 또 다른 한 부대를 국경지대인 임강·장백으로 진출시켜 일본군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37년 5월 하순, 김일성이 주력부대를 편성, 보천보 일대를 정찰하고 공격 준비를 마쳤을 때, 무산지역에 진출한 부대가 적의 공격으로 포위될 상황이었다. 이에 김일성 부대는 애초 예정된 작전 개시일을 앞당겨 보천보의 일본군을 공격한 것이었다.

 

보천보는 국경지대의 면사무소 소재지였다. 일본군은 주둔하지 않았고 주재소에 6~7명의 순사가 근무할 뿐이었다. 김일성 부대가 습격을 시작하자, 순사들은 죄다 도주하였고, 당시 사망자는 유탄에 맞아 숨진 어린이를 포함, 민간인 2명뿐이었다.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정치공작조는 김일성 작성의 조국광복회 10대 강령과 포고문, 그 밖의 격문들을 뿌리면서 정치선전을 전개하였다. 포고문은 ‘조선 인민들은 조선인민혁명군에 호응하여 일제 통치를 분쇄하고 조선 인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 보천보 전투 당시의 총탄 자국이 선명한 주재소 정문 ⓒ <오마이뉴스> 김정기
▲ 전투의 주 무대였던 망루(왼쪽)와 주재소(오른쪽) ⓒ <오마이뉴스> 김정기

조선인민혁명군은 국내 진공의 목적을 달성하고 철수하였는데 이때, 주민들이 이들을 도와 노획물자 운반에 동참하고 가담하였다. 철수하던 조선인민혁명군은 6월 5일 구시산과 6월 30일 간삼봉(間三峰)에서 추격하는 일본군을 격퇴한바 북한에서는 이 전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중 가장 큰 성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6월 5일, 동북항일연군은 30명의 일본 경찰추격대와 교전 끝에 25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다쳤다. 일본 경찰추격대는 7명이 죽고 14명이 부상했다. 당시 보도의 정확성을 고려하더라도 피해는 항일연군 쪽이 훨씬 컸는데도 일부 자료에서는 추격대가 궤멸했으며, 간삼봉 전투에서는 일본군 74연대에 대승을 거두었다고 전한다.

 

대중에게 독립의 희망을 준 보천보 전투

▲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의 보천보는 현재 량강도 보천군 보천읍이 되었다. 삼지연과 혜산시 사이에 있다. ⓒ 구글지도

전과의 측면에서 보면 보천보 습격은 이어진 구시산과 간삼봉 전투에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보천보 전투의 정치적 의미는 그 전과를 초월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만주사변(1931) 이후 국내의 민족해방운동은 침체에 빠져 있었고, 독립군의 활동도 희미한 기억으로 사라져가던 시기여서 보천보 소식은 승리에 목말라하던 대중들에게 독립의 희망으로 다가갔기 때문이었다.

 

비록 ‘비적단’이라 표현했지만 <동아일보>가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보천보 전투와 함께 김일성의 존재가 국내에 널리 알려졌다. 이 단비 같은 소식에 <조선중앙일보> 폐간 이후 칩거하던 여운형은 사람들을 불러 밤새 술을 마시고 다음 날 보천보 현장으로 달려가 직접 일제의 패배를 확인했다고 한다.

 

보천보 전투 이후, 갑산 지역 아이들의 전쟁놀이 방식이 가위바위보로 이긴 쪽을 김일성 군, 진 쪽을 일본군으로 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944년 평양사단에 징집된 학병들이 탈출을 준비하면서 목적지를 보천보로 정했을 만큼 보천보가 대중에게 끼친 영향은 크고 깊은 것이었다.

 

또 보천보 전투 이후 갑산 지역에는 ‘순사 돼지 꿀꿀’이란 노래가 널리 퍼졌다. 김일성 부대의 기습에 놀란 일본 순사 하나가 돼지우리에 숨었고 유격대가 떠난 뒤 주민들이 다가가자 돼지인 척 꿀꿀댔다는 것을 풍자한 것이었다. 이처럼 보천보 전투는 식민지 민중들이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권력인 순사를 우스갯거리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것이었다.

▲ 보천보 전투승리기념탑. 보천보는 김일성신화의 출발점이다. ⓒ 통일뉴스 자료사진

보천보 사건 이후 지역 순사들은 유격대가 두려워 밤에 함부로 다니지 못했고 산림 간수들도 산 근처에 얼씬하지 못해 화전민들이 자유로이 화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상이 보천보 전투가 1937년 식민지사회와 민중들에게 미친 영향들이었다.

 

보천보 전투는 국내 민중들에게 광복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였지만, 중일전쟁(1937) 발발 이후 동북항일연군에는 적지 않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는 조선인과 중국인 유격부대를 공산당의 주도로 통합한 군사조직인 동북항일연군은 이 무렵 1만여 명의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937년부터 동북 지역 일본군의 수를 70만 명까지 확대하고 강력한 토벌 작전과 고립정책을 추진했다. 중국공산당 산하의 항일유격대는 열하(熱河) 지방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김일성 부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 소련에 들어간 김일성부대는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로 재편됐다. 둘째 줄 중앙이 김일성.

김일성 등 88여단 대원들 북에 ‘인민공화국’ 창건

 

그러자 일제는 김일성이 만주와 국내에 조직해놓은 항일 대중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이를 알게 된 김일성 부대가 다시 국경지대로 돌아오는 과정이 유명한 ‘고난의 행군(1938~1939)’이었다. 게릴라전을 벌이며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은 40년대 들면서 궤멸 상태에 빠졌고, 남은 대원들은 소련 경내로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경을 넘은 김일성 부대는 연해주 보로실로프 근처에서 주둔하다 동북항일연군 교도려(敎導旅)로 재편되었다. 1942년 8월, 소련극동군은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대원들을 ‘소련 적군 88 특별저격여단’으로 정식 개편하였다.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고 해방이 되면서 이들 88여단의 대원들은 소련군을 따라 귀국해 ‘조선인민군’ 창설의 모태가 되었다.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출신의 이른바 ‘만주파(빨치산파)’로 불리는 김일성, 김책(1903~1951), 최용건(1900~1976) 등이 핵심 집권세력이 되어 남한 단독정부에 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움으로써 한반도는 공식적으로 분단의 길로 치달았다.

 

 

2018. 6. 2. 낮달

 

 

· 한홍구, 역사 이야기, <한겨레21> 383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덧붙임

▲ 보천보 전투 금 인쇄 원판

보천보 전투가 김일성 부대가 거둔 전과라는 것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별 이견이 없는 듯하다.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나뭇잎으로 두만강을 건너며 축지법을 쓴다”라는 이른바 김일성 장군 신화(전설)의 출발점이 바로 보천보였다. 그것은 일제의 강고한 지배 아래 신음하던 민중들의 기대가 만들어낸 영웅 신화였다. 거기에 기초하여 뒷날 김일성 우상화가 덧칠되었음은 물론이다.

보천보 전투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백과사전에 ‘북한의 주장’이라는 전제 등으로 실려 있는 것은 그런 역사적 사실의 반증이다. 그러나 ‘구시산’과 ‘간삼봉 전투’에 관한 내용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추격대 궤멸’이나 ‘대승’의 구체적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이유다.

남에 보천보 전투가 무시되듯 북의 역사에는 청산리 전투가 없다고 한다. 이념과 무관하게 우리 역사의 주요 장면들이 남북 모두에서 사실(史實)로 다루어지는 것은 언제쯤 가능할까.

보천보 전투를 보도했던 <동아일보>의 취재단은 1998년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에게 ‘보천보 전투 금 인쇄 원판’을 선물로 증정했다. 이 원판은 현재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에 전시되어 있다.

참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連軍)

▲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의 동북인민혁명군을 확대 편제한 중국인과 한인의 연합부대였다. ⓒ 나무모에미러

「동북항일연군 통일 군대 건제 선언」에 따라 1936년 3월 만주지방에서 항일무장운동을 통합해 항일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의 동북인민혁명군을 확대하여 만든 항일무장단체로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북한 정권 수립 시기의 주요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인과 한인의 연합부대였기 때문에 북한과 중국의 인적 유대를 강화하였고, 북한 국가 설립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의 실질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토대였다. 편제는 제1로군 1군 군장 겸 정치위원에 양징위(楊靖宇), 참모장에 안광훈(安光勳), 2군 군장에 왕더타이(王德泰), 정치부주임에 전광(全光), 제2로군 1군 군장에 왕야신(汪雅臣), 제3로군 1군 군장에 치처중(祁致中), 정치부주임에 김정국(金正國) 등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 3월부터 1937년 10월까지 개편작업을 계속하여 제1군부터 제11군까지 편제하였다. 이 중 제1·2군은 남만주에서, 제4·5·7·8·10군은 동만주에서, 제3·6·9·11군은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1936년에서 1937년까지 동북항일연군은 동만, 남만, 북만 등에서 큰 세력을 이루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중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다수의 한인이 대거 참여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경북 구미 출신의 의병장 왕산 허위(1855~1908)의 종질인 허형식(1909~1942)도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휘자였다. 만주로 망명하여 중국공산당에 들어간 그는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이 만들어지면서 군사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해 북만주 일대의 일본군 거점과 일본 농장 설비 등을 공격해 이름을 떨쳤다.   

1936년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할 때도 그는 북만주 서북 방면의 유격투쟁을 이끌었다. 허형식은 1939년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의 군장(軍長) 겸 총참모장에 올랐다. [관련 기사 : 허형식과 박정희, 극단으로 갈린 둘의 선택]

1938년 남만주의 군은 제1로군, 동만주의 군은 제2로군, 북만주의 군은 제3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194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일제가 76만 명으로 늘린 관동군으로 토벌 작전에 나서면서 항일연군에게 시련과 위기가 닥쳐오자 중국공산당은 항일연군 지도부와 잔여 병력을 소련 영내로 이동시켰다.

1942년 소련극동군이 동북항일연군의 잔류대원을 동북항일연군 교도려(教導旅)로 편성하면서 간부들을 소련군으로 편제했는데 이때 북만주의 허형식도 이 부대에 일방 편제되었다. 해방 후 북한 정권 건설의 핵심이 되는 최용건(부참모장), 김책(정치위원) 등이 지휘관이었는데 허형식은 김일성과 같이 ‘영장(營長)’이었으니 소련은 그를 김일성과 동급의 지휘관으로 보고 있었다.
 
허형식은 끝내 소련 국경을 넘지 않고 소부대 활동으로 무장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북 유격전구(遊擊戰區)와 인민을 지켰다. 허형식 군장은 1942년 8월 경안현 청봉령 소릉하 계곡에서 만주군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 동북항일연군 출신으로 북한 정권 수립의 주역이 된 최현, 최용건, 김책.(왼쪽부터)

동북항일연군은 만주국의 탄압 속에서도 대일 전투와 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열차 습격이나 헌병대를 공격함으로써 일제 침략의 상징물에 대한 파괴에 집중하였고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쳐 평안북도 일대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전개하였다. 

김일성은 왕청유격대 정위를 거쳐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 사장, 1938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37년 6월 제1로군 제2군 소속으로 감행한 보천보 전투를 이끌어 승리에 목말라하던 대중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었다. 

해방 후 귀국하여 동북항일연군 출신의 최현, 최용건, 김책 등과 함께 북한 정권을 수립한 그에게 보천보 전투는 권력독점 및 유일 체제 성립의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참고

 

2019. 6. 3. 깁고 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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