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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국민의 민주화 열망, 6·10 민주항쟁으로 꽃피우다

by 낮달2018 2023.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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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1월 14일부터 6월 29일까지 이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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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민주항쟁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다.

여러 현안으로 말미암은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지는 가운데 6·10 민주항쟁 36돌을 맞는다. 6·10민주항쟁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정의된다. 이 6월항쟁은 격동의 우리 현대사 가운데 2016년부터 2017년에 걸쳐 전개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 즉 ‘촛불항쟁(혁명)’과 함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의 역사로 일컬어진다.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의 역사’ 6월 민주항쟁

 

6월항쟁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월)에서 비롯하여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4월)로 상승되었고, 시위 도중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6월)으로 임계점을 넘으면서 펼쳐졌다. 그러나 그것은 단기적 배경일 뿐,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권력을 탈취하여 폭압을 시작하면서 차곡차곡 쌓였던 시민들의 해묵은 분노가 폭발하면서 저항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께 하숙집에서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그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 3월 3일 '박종철군 49제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 경찰의 원천봉쇄로 저지되자,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거리시위, 439명 연행됐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 사망 사실을 은폐하려고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고 발표하였으나, 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따른 살인으로 밝혀졌다. 이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식’과 도심 시위가 열렸고 3월 3일에는 ‘박종철 군 49재와 고문 추방 국민대행진’ 등 시위가 이어졌다. 4월 2일 서울대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 관련 구속 학생의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

 

박종철 고문치사에서 비롯, 전두환 4·13 호헌 조치와 이한열의 죽음으로 폭발한 민주항쟁 

 

그러나 전두환은 시민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특별담화’로 개헌논의를 유보하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 조치’를 밝혔다. 그는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선은 자유 경선을 보장하며 1987년 안에 공정한 선거관리로 차질 없이 시행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분출하는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조치는 전국의 공무원들에게 반상회에 참석하여 주민들에게 호헌 조치의 정당성을 설득하라는 지시로 이어졌다. 경주 지역의 한 사학에서 근무하던 나도 학교장으로부터 반상회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실제 교사들은 아무도 반상회에 나가지 않았다.

 

당연히 국민은 크게 반발했고, 이튿날인 4월 14일에는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5월 18일에는 명동성당 광주항쟁 7주년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경찰이 축소·은폐하였음을 폭로하였다.

▲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고문치사사건 축소 조작' 사실을 폭로했다.

이후, 전국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가 잇따랐고, 5월 23일엔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갖기로 하였다. 6월 10일은 잠실체육관에서 민주정의당(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려 노태우가 대선 후보로 선출된 날이었다.

 

전두환은 후계자로 국무총리 노신영을 지명했으나, 5월 26일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신영을 경질하고 이한기를 신임 총리로 임명했다. 이튿날인 27일, 전국에서 2,191명의 발기인을 대표한 계훈제, 박형규, 김상근, 최형우, 김동영, 양순직 등 150여 명의 인사들이 향린교회에 모여서 발기인 대회와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를 결성하고 ‘호헌 조치 철회 및 직선제 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발표하였다.

▲ 6월 9일, 이한열이 연세대 정문 앞에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 6월 10일, 잠실운동장에서 민주정의당 전당대회가 열려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었다. 이 소식에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 선출 뒤 대규모 시위 시작

 

6월 9일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다. 대회에 참가한 이한열이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이튿날, 잠실운동장에서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려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소식을 듣고, 서울시청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재야 민주 세력과 대학생은 물론, 30대 직장인, 이른바 ‘넥타이 부대’까지 대거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하였다. 전국 18개 도시에서 국본이 주최하는 대규모 거리 집회가 열리고,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6월 10일 밤부터 6월 15일까지 계속된 명동성당 농성 투쟁과 넥타이 부대를 주력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는 6·10국민대회를 6월 민주항쟁으로 진전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6일에는 전국 37개 도시에서 사상 최대 인원인 100만여 명이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 6월 10일 밤부터 6월 15일까지 계속된 명동성당 농성 투쟁과 6.10국민대회를 6월 민주항쟁으로 진전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6월 12일, 재야 민주 세력과 대학생, 30대 직장인, 이른바 '넥타이 부대'까지 대거 시위에 참여하였고,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하였다.
▲ 6월 23일, 호헌철폐와 독재종식을 위한 서울지역 청년학도 결의대회에 25개 대학 2만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성사된 6월 18일의 최루탄추방대회에는 전국에서 6·10국민대회보다 많은 시민이 참가했다. 전국적 시위는 일요일인 6월 21일까지 이어졌고 6·26국민평화대행진은 그간의 범국민 투쟁을 총결산하는 대규모 투쟁으로 승화되었다.

 

‘넥타이 부대’까지 대거 시위에 결합하면서 민주항쟁으로 상승 발전

 

시위 진압에 동원된 경찰들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만 가는 시위대의 위세에 밀려 속수무책이었다. 이날의 시위는 6월 민주항쟁 최대 규모의 시위였는데 시위는 27일과 28일에도 이어졌다. 6월항쟁은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만이 꾸린 것은 아니었다. 전국 각지에서 응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시민, 보도를 지켜보면서 마음속 응원을 보냈던 시민들도 한마음으로 항쟁에 힘을 보탰기 때문이다.

▲ 노태우는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6월 29일,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국민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여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했다. 경찰력이 마비되자 정부는 한 때 위수령발동과 군 투입을 검토하였으나 온건론이 우세하여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다.

    *위수령(衛戍令) : 육군 부대가 일정한 지역에 주둔하여, 경비와 질서유지 및 군기의 감시와 군에 딸린 건축물·시설물 등을 보호할 것을 규정한 대통령령

 

신군부의 항복, 노태우의  ‘6·29선언’

 

신군부로서는 1988년에 개최될 올림픽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위수령발동 징후를 알아챈 미국은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이를 저지했으며 야당과 신속히 타협하도록 촉구하였다. 따라서 6·29선언의 이루어지기까지 미국의 압력이 일정하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었다.

 

6월항쟁의 결과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치러졌다. 6월항쟁은 시민 저항으로 독재 정부의 장기 집권 의도를 저지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으며,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6월항쟁은 노동자·학생·시민·빈민·농민 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전 지역적으로 전개한 투쟁이었다. 이후 노동자들이 생존권 확보 및 노동조합 결정에 나서며 나타난 ‘노동자 대투쟁‘은 향후 노동자의 사회적 위상을 급격하게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 7월 9일 이한열의 장례가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는데,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명, 광주 50만 명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

항쟁의 결과로 민주헌법 쟁취했으나 단일화 실패 등으로 대선에서 좌절

 

7월 5일, 최루탄에 피격돼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은 결국 사망하였다.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가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는데,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명, 광주 50만 명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한열의 죽음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을 온 나라에 드러내면서 ‘군부독재 타도’가 사회적 의제임을 입증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김영삼의 단일화가 실패하면서 12·12 군사 반란의 주역인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36.6%의 득표율로 당선하였다. 야권의 분열과 KAL기 폭파사건 등 선거일 직전 터진 사고 등의 영향으로 신군부 정권이 연장되고 만 것이었다. 국민은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의 당선으로 문민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5년을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2023. 6.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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