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신군부, 정권 사유화 기구 국보위 설치하다
1980년 5월 31일, 광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12·12와 5·17 쿠데타로 탈취한 정치 권력을 사유화하기 위한 대통령 자문·보좌 기관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를 설치했다.
내각을 장악하기 위한 임시 행정기구 국보위는 80년 10월 29일 폐지될 때까지 약 5개월간 정권의 정통성과 도덕성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최상위 권력 기구’로 존재하면서 초법적 지위를 누렸다.
이는 1980년 5월 초 전두환의 보안사령부가 시국 수습을 명분으로 기획한 ‘비상계엄 전국확대’·‘국회 해산’·‘국가 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시나리오의 하나였다. 신군부는 박정희 사후, 유신체제를 파기하고 새로운 국가 지배체제를 구축하는데 5·16 쿠데타 이후 설치 운영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모델로 국보위를 설치한 것이었다.
5월 31일, 대통령 자문기구 형식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전두환을 상임위원장으로 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전국 비상계엄하에서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국책사항을 심의, 의결하여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거나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명분이었다.
국보위 실세 기구는 전두환의 상임위원회
국보위는 행정부 각료 10인, 군 요직자 14인 등 모두 24인으로 구성되었다. 국보위의 실세 기구는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였던 전두환이 위원장을 맡고 국보위의 위임사항을 심의·조정하기 위한 13개(운영·법제사법·외무·내무·재무·경제과학·문교공보·농수산·상공자원·보건사회·교통체신·건설·사회정화) 분과위원장으로 구성된 상임위원회였다.
각 분과위는 분야별 소관 사항에 대한 기획·조정·통제업무를 관장했는데 상임위원 30인(당연직 16+임명직 14) 가운데 신군부 계열 인물이 18인이었다. 전두환은 상임위원장을 맡으며 권력 인수를 명시화했다. 신군부가 제시한 활동 목표는 ‘국가 기강의 확립’이었다.
“국내외 정세에 대처하여 국가안보 태세를 강화하고, 국내외 경제난국의 타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합리적인 경제 세책을 뒷받침하며, 사회안정의 확보로 정치발전을 위한 내실을 다지는 한편 부정부패, 부조리 및 각종 사회악의 일소로 국가 기강을 확립한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내세운 목표일 뿐이었다. 신군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유혈 탄압과 김대중·김종필 체포, 김영삼 강제 정계 은퇴, 구정치인으로 불리는 세력에 대한 정치 활동 규제 등의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실제로 국보위의 설립 목표는 공포정치를 이용한 정·재계 개편으로 신 지배구조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신군부는 국보위 활동을 통해 국민의 맹목적인 복종을 유인했으며 상대적으로 시민사회와 민주주의가 확보해야 할 투명성, 민주성, 정당성, 형평성, 국민 정서 등은 무시하였다. 실질적으로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신군부가 편 개혁작업, 각 부처의 공직자 숙청, 정치 활동 정화 조치, 언론 통폐합, 삼청교육대 등 초헌법적인 조처들은 국보위를 통해 이루어졌다.
1980년 8월, 대통령 최규하가 물러나고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잠실체육관에서 총투표자 2525명 가운데 2524명 찬성(무효 1표)으로 전두환을 11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신군부의 8차 개헌안은 10월 22일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95.9%, 찬성률 91.6%로 확정됐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국보위의 확대판
10월 27일, 개정헌법이 공포되었고, 국보위는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을 통과시켰다. 국보위는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따라 10월 29일에 입법권을 가진 국가보위입법회의(입법회의)로 개편됐다. 의원 81명 전원을 전두환이 임명한 입법회의는 확대 개편된 국보위라고 할 수 있었다.
기획과 집행의 조정과 통제를 위하여 입법회의에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기구에서는 1980년 11월 3일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구정치인 등 567명을 규제했다. 또 정당법, 집시법, 사회보호법, 언론기본법, 대통령 선거인단법 등 각종 악법을 제정하여 5공 체제를 법률로 뒷받침했다.
1980년 이후의 한국 정치를 가누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준 집정관적인 국가지배체제로 시민에 의한 국가통제권을 상실케 한 초법적 기구였다. 이어진 ‘국가보위입법회의’도 국민의 대표로 구성되지 않은 입법기관으로 초법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입법회의는 신군부의 집권을 정당화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행한 일련의 조치들을 사후적으로 제도화, 법제화함으로써 국보위에 면죄부를 주었다. 입법회의는 임시적, 위헌적, 불법적이면서 불합리한 통치행위를 자행한 입법기관이었다.
시민에 의한 국가통제권을 상실케 한 초법적 기구
대법원은 1997년 4월, ‘5.18’사건 판결문(에서 국보위가 대통령 자문기구의 형식을 빌렸다 하더라도 ‘국헌문란’에 해당하지 아니한다는 전두환 등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했다. 관련 대법원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상임위원장에 피고인 전두환이 취임하여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 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국보위 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부와 대통령을 무력화한 사실 등을 인정한다.”
박정희 18년 독재가 그의 비명횡사와 함께 막을 내리자 서울의 봄을 꿈꾸었던 국민에게 전두환의 신군부는 악몽 그 자체였다. 이들 정치군인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공포정치로 국민을 겁박하며 온갖 전횡을 일삼았다.
국보위는 끔찍한 무인 정권 시대에 군부가 스스로 확보한 권력 기구였다. 뒤에 국가보위입법회의로 확대 개편되었다가 1981년 4월 11대 국회가 개원되면서 폐지된 이 권력 기구가 남긴 상흔은 깊었다.
입법회의에서 통과시킨 정치활동규제법을 비롯하여 언론기본법, 국가보안법 개정안, 노동법 개정안,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 따위는 이후 악법으로 불리면서 우리 민주주의에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2018. 5. 30. 낮달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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