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남북이 공동 등재
한반도의 고유 민속경기인 ‘씨름’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의 제13차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씨름을 남북 공동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애초에 따로 신청했다가 막판에 남북한이 공동 등재하기로 극적 합의함으로써 이루어진 결과다.
아프리카 모리셔스에서 열린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 위원회에서는 긴급 안건으로 상정된 씨름을 24개국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고 한다. 공동 등재된 씨름의 공식명칭은 ‘씨름, 코리아의 전통 레슬링(Traditional Korean Wrestling, Ssirum/Ssireum)’이다. (‘씨름’의 로마자 표기는 남북 두 가지를 함께 표기)
애당초 한국은 ‘대한민국의 씨름(전통 레슬링·Ssireum, traditional wrestling in the Republic of Korea)’이란 이름으로 2016년 3월에,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씨름’(조선식 레슬링·Ssirum, Korean wrestling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란 명칭으로 2017년 3월에 각각 등재를 신청한 바 있었다.
이번 공동 등재 결정으로 ‘씨름’은 종묘제례·종묘제례악(2001), 매사냥(2010), 제주 해녀문화(2016) 등에 이어 한국의 20번째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올랐다. 북한에서는 아리랑(2014)과 김치 만들기(2015)에 이어 세 번째 등재유산이 됐다.
씨름의 공동 등재가 제안된 것은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뒤였다. 이어 지난 10월 문 대통령이 파리 방문 때 유네스코 사무총장과 만나 공감한다고 밝히면서 본격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아퀴는 이번 달에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특사가 방북하여 북한의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지어졌다고 한다.
‘씨름’은 “두 사람이 맞잡고 힘과 기술을 부리어 상대를 먼저 땅에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경기”(<민속대백과>, 이하 같음)다. 씨름은 다른 이름으로 각력(角力), 각저(角觝, 角抵), 각희(角戱), 상박(相撲) 등으로 부르는데 이 한자어는 한국의 씨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씨름의 어원은 ‘서로 버티어 겨루다’의 뜻을 가진 경상도 방언 ‘씨루다’가 명사가 되어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있다. 씨름 경기는 일상에서 벌이기도 하고, 명절에 벌이기도 한다. 명절 중에서는 5월 단오, 7월 백중, 8월 추석에 씨름 경기를 벌인다.
씨름은 기원전 3천 년 무렵부터 존재했던 경기로 추정된다.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Ilias)>에 씨름 이야기가 나오고 동양의 경우, 중국 전국시대에 씨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관련 자료는 고구려 고분 벽화이다.
4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의 씨름무덤[각저총(角抵塚)]에 씨름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고구려 시대에 이미 씨름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씨름의 기원은 이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씨름에 관한 첫 기록은 <고려사>(1454)에 있다. 충숙왕은 국사를 신하들에게 맡기고, 매일 아랫사람들과 씨름에 열중하여 위아래 예절이 없었다. 충혜왕은 용사를 거느리고 씨름놀이를 구경하였고, 용사들에게 많은 베를 상으로 주었다. 고려에서 씨름은 상류계층에서도 즐기는 큰 구경거리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씨름에 관한 기록이 있다. 세종은 상왕과 함께 저자도(楮子島)에 행차하여 뱃놀이를 하고, 강변에서 씨름 구경을 하기도 하였다. <명종실록>에도 어린이나 유생들의 놀이인 씨름이 궁궐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에 유감을 나타낸 기록도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은 소년 시절에 어른 역사(力士)를 씨름으로 이겨 이름을 날렸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군사들에게 씨름을 시키고, 씨름판을 휩쓴 군사에게는 상을 주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민간 세시풍속으로서의 씨름에 대해서는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志)>, 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 <송경지(松京誌)>, 그림으로는 김홍도의 ‘씨름’, 유숙의 ‘대쾌도(大快圖)’, 김준근의 ‘씨름(4점)’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씨름은 사람이 맨살로 직접 부딪치는 경기이고 놀이다. 고려 때 임금이 아랫사람과 씨름을 하여 물의를 일으킨 것 데서 씨름의 개방성이 드러난다. 사람과 사람이 맨몸으로 부딪는 씨름을 통해 사람들은 건강한 생명력을 구가하면서 하나로 합일된다.
또 씨름은 개인과 개인의 합일에 그치지 않고, 집단의 합일 혹은 집단과 집단의 합일로까지 나아간다. 전통사회에서의 명절 씨름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집단의 합일이었다. 명절 씨름이 대동 놀이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은 그 때문이다. 씨름은 놀이에 그치지 않고 제의적 성격을 띠는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에만 해도 단옷날에 마을 냇가에서 대규모 씨름판이 벌어졌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더불어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씨름은 점차 사라져갔다. 동제(洞祭)를 비롯하여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 여러 민속놀이가 사라진 것도 비슷한 시기였을 것이다.
씨름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이어져 1980년대 프로씨름이 출범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씨름의 인기가 급속도로 떨어져 프로씨름 경기는 열리지 않고, 설날과 단오 때 대학씨름대회나 지방 단위의 씨름대회가 지상파로 중계되는 데 그친다.
산업화, 근대화 이후, 씨름은 쇠락을 거듭하고 있는데 정작 씨름은 마침내 인류의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 것이다. 씨름을 공동체에서, 또는 민속놀이로서 쇠퇴하게 한 것은 단지 산업화나 근대화 같은 외부적 변화만일까. 민속, 민족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지닌 우리 자신, 그 내부적 요인은 없는 것일까.
2018. 11.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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