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61년 5월 19일, 진보 일간지 <민족일보> 강제 폐간
1961년 오늘(5월 19일), 진보 성향의 일간지 <민족일보>가 강제 폐간되었다. 육군 소장 박정희가 이끈 5월 16일의 쿠데타 사흘 만이었다. 그것은 <민족일보>의 발행인 조용수와 논설위원 송지영을 비롯한 민족일보 관계자 열 사람을 구속한 다음 조치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는 ‘용공 분자 색출’이라는 이름으로 진보 인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정부의 대북 강경책과 노동자 탄압을 비판해 오던 <민족일보>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었다. 1961년 2월 13일, 우여곡절 끝에 창간된 이 진보지는 5월 19일 92호를 마지막으로 석 달여 만에 폐간되었다.
1961년 5월 19일, <민족일보> 강제 폐간
4월혁명 이듬해 <민족일보>는 진보정당의 재건과 대북 강경책의 허구를 국민에게 알리는 언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조용수와 양호민 등 진보 성향의 언론인들에 의해서 창간되었다. 한 해 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치러진 5대 총선거에서 사회대중당 등 진보세력은 참패한 바 있었다.
진보정당의 패배로 결국 보수 성향 민주당의 일당 독주체제가 허용되자 이들은 재일거류민단으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아 새로운 일간지를 창간한 것이었다. 창간 이전부터 <민족일보>는 ‘조총련의 자금 조달’ 등의 색깔론 공세에 시달렸고 신문 인쇄가 중단되는 등의 탄압도 있었다.
그러나 <민족일보>의 논조는 북한을 ‘북괴’로 지칭하고, 김일성을 ‘니키타 흐루쇼프의 꼭두각시’로 묘사하는 등 반공주의 성향에 충실했다. 신생 일간지였지만 <민족일보>는 국민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었다. <민족일보>는 당시 기존 신문이었던 <동아일보>(23만여 부), <한국일보>(17만여 부), <조선일보>(13만여 부) 등에 못지않은 4만여 부를 발행하였다.(1961년 공보부 자료)
경남 함안 출신의 조용수(1930~1961)는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재일거류민단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59년 이승만에 의해 투옥되고 사형을 선고받은 조봉암의 구명운동과 조총련의 재일동포 북송 운동 반대사업에 참여하였다.
통일을 지향한 진보 매체 <민족일보>
4·19혁명 뒤에 귀국한 그는 5대 총선에 사회대중당 경북 청송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1961년 1월, 주식회사 민족일보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민족일보> 창간 뒤 조용수는 신문 광고를 통해 <민족일보>가 여느 신문들과 다른 신문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전 민족의 비원인 이 나라의 통일문제는 민족일보가 가장 열렬히 정력을 바치려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 간에 유혈의 전쟁을 고취하고 평화적 통일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장 준엄한 비판자가 될 것이며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성실히 노력하는 민주적 애국자들에 대해서는 가장 열정적인 지지를 보낼 것입니다.”
민족일보는 사시(社是)로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 등 4개를 정했다. 조용수는 사장 취임사에서 “남북 간의 민족의식 추진과 생활 공동체적 연대를 추구하는 데 있는 지면을 과감하게 제공하는 것을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밝혀 ‘평화통일’에 대한 적극적 지향을 드러냈다.
<민족일보>는 창간호부터 장면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 정권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추진하려는 한미경제협정이 굴욕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장면은 직접 기자들에게 ‘한미경제협정 반대 운동은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민족일보>는 장면 내각이 반공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던 ‘반공특별법’을 반대하고 ‘집회 및 시위에 대한 규제강화’ 등에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통일문제에서는 남북의 언론인 교류를 주장하고 서신 왕래, 경제교류, 문화교류를 주장했다. 이는 4월혁명 뒤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통일 논의에 적극 호응하는 것이어서 <민족일보>의 인기는 드높을 수밖에 없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터졌을 때 정작 조용수는 <민족일보> 사장실에서 박정희에 대한 인물 정보가 담긴 보고서를 읽으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고 전한다. [<민족일보>와 조용수 - “총에 꺾인 펜” 참조, 아래도 같음.] 조용수는 박정희가 비교적 ‘정직한 인물’이고 한때 ‘좌익’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가 진보적인 성향의 인물이라는 데에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준비할 단계에서부터 이미 좌익 출신이라는 의혹을 벗어나기 위한 희생양을 찾고 있었는데 그 대상이 바로 <민족일보>와 조용수였다. 쿠데타군에게 연행된 조용수는 ‘간첩’으로 몰렸다. <민족일보> 창간 당시 도움을 준 조봉암의 비서였던 이영근이 '간첩'이며 그를 통해 재일교포들에게서 모은 기금은 ‘공작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제시한 반대 증거는 계엄령 하의 군사 법정에서 거의 채택되지 않았고 그는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이 선고되자 국제신문인협회(IPI), 국제펜클럽(PEN) 등 국제적으로 항의 성명이 이어지고 구명운동이 벌어졌지만, 사태를 바로잡지는 못했다. 형은 박정희의 재가가 난 다음 날(1961. 12. 21.) 바로 집행되었다.(형을 서둘러 집행하는 것은 1975년 4월 인혁당 피고들에게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관련 글 : 야만의 현대사-인혁당 피고 8인 사형 집행]
2년 전, 조봉암이 처형된 그 형장에서 조용수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같이 처형된 정치깡패 임화수와 이정재는 끌려가지 않으려 몸부림치고 울부짖었으나 조용수는 이태 전의 조봉암처럼 담담했다고 전한다.
“민족을 위해 할 일을 다 못하고 가는 게 억울합니다. <민족일보> 상무인 정규근 동지에게 돈을 꾸어 신문을 만드는데 썼는데, 갚아주지 못하고 가게 되어 미안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형 집행 소식은 가족들에게 다음날이 되어서야 전보로 통지되었다. 향년 31세. ‘민족의 분열과 비원을 영속화시키는 일부의 작용에 대하여 온갖 정력을 기울여 싸울 것’을 다짐했던 젊은 언론인은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아야 했다.
쿠데타의 희생양, 언론인 조용수
<민족일보> 폐간과 조용수 처형의 원인을 제공했던 ‘간첩’ 이영근은 그 이후 아무 제약 없이 한국을 오갔다. 박정희는 이영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에게 대북관계의 통로 역할을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는 그 공로를 인정해 1990년 이영근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단다. 이게 한 언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박정희의 사법살인, 그 진상이다.
조용수는 2006년 11월 과거사위원회로부터 명예를 회복 받았고, 2008년 1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2부의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는 99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으나 대법원은 2011년 1월 그 액수를 약 29억 원으로 감액하는 취지로 최종 판결하였다.
55년 전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마음은 씁쓸하고 아프다. 진보와 통일을 지향한 한 언론 매체의 폐간은 역사의 기록에선 한 줄에 그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상징하는 비판 언론에 대한 탄압이 결국은 박정희의 18년 독재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 사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2016. 5. 18. 낮달
2008년 사법부 조용수 재심에서 무죄 선고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용석 부장판사)는 ‘민족일보 사건’으로 체포돼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던 조용수 사장에 대한 재심 선고 공판에서 조 씨와 이 사건에 연루돼 징역 5년이 선고됐던 양모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6년 11월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고, 법원은 작년 4월 조 씨의 동생 용준 씨가 낸 재심 청구를 받아들여 재판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과거사 피해자들의 손해 배상 청구가 이어지자 대법원은 손해배상금을 깎을 길을 판례로 열어주기 시작했다. 이어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는 ‘역주행’이 본격화되어 손해 배상 청구 자체를 막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조용수 사장의 유가족이 받을 이자는 69억8000만 원에서 2000여만 원으로 크게 줄었다. 결과적으로 국가는 그를 두 번 살해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 역시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 농단의 일부였다.[관련 기사 :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47년만에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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