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문학 기행] 이무영 문학비, 채만식·서정주·이원수 문학관을 찾아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친일문학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4년 전이다. (관련 글 : 친일문학 이야기) 일반에 널리 알려진 문인 중심으로 이광수부터 최정희까지 19명을 이태에 걸쳐 다루고 한동안 쉬었다. 2016년 여름에 한국문인협회가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를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겠다고 나섰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을 때 다시 글을 이어갔다. (관련 글 : 춘원과 육당의 문학상 제정? 뜬금없고 생뚱맞다)
이듬해,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에도 ‘기억 투쟁’이 필요하다”는 글을 쓴 것은 한 출판사가 2016년 12월에 이 두 사람을 기리는 상을 제정하여 시상까지 한 게 뒤늦게 드러나면서다. 한쪽에선 식민지 역사 청산을 부르짖는데 다른 한편에선 역사적 퇴행이 연출되고 있었던 셈인데, 그건 해방 반세기를 넘기고도 온존해 있는 반역사·몰역사적 현실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국작가회의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도한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 운동이 이어지면서 근년에 괄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중앙일보>가 운영하는 미당문학상이 시인들의 수상거부가 이어지면서 논란 끝에 올해 폐지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 : 출판사 편집자가 돌아본 2018년 문학계)
그러나 계속되고 있는 폐지 운동에도 불구하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동인문학상’은 아직 미동도 않고 있는 모양이다. <조선일보>가 운영하는 동인문학상 수상 작가는 우리 문학사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를 망라하고 있을 정도니 해당 매체가 누리고 있는 만만찮은 권력을 압박하는 게 쉽지 않은 것이다.
11월의 첫 화요일에 아내와 함께 친일문인들의 문학관 기행에 나선 것은 기왕에 해 온 작업을 마무리할 겸 해서였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문학관 누리집이나 지자체가 올려놓은 사진을 대신 쓰면서 느꼈던 아쉬움을 털어버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충북 음성을 첫 목적지로 해서 전북 군산과 고창, 그리고 마지막 창원(마산)을 돌아오는 여정은 중간에 들른 순천을 돌아오느라 거의 800km를 넘었다. 기행이라고 했지만, 1박 2일 만에 다섯 지역을 돌아오느라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여정이었다.
충북 음성의 이무영 문학비, 생가로 쫓겨나다
음성은 농촌소설가 이무영(李無影, 1908~1960)의 고향이다. 그는 조선인 작가가 일본어로 쓴 최초의 일간지 연재소설인 장편소설 <청기와집(靑瓦の家)>의 작자다. 1942년 9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에 연재된 이 작품으로 그는 일본의 신태양사가 주관하는 제4회 조선예술상총독상을 수상했다.
3대가 사는 ‘청기와집’이라 불리는 양반 권씨 집안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집안은 ‘식민지 조선’을, 3대는 각각 그 시대의 사상을 상징한다. 가장인 권 대감은 ‘지나(支那)에 대한 사대주의’를, 아들 수봉은 ‘영미 제일주의’를, 손자 인철은 ‘일본’으로 상징되는 신사상을 대변한다.
조부는 세상을 떠나고 수봉은 마음을 바꾸어 조선 신궁을 참배하게 되며, ‘젊은 일본’을 상징하는 손자 인철은 꿋꿋하게 개간사업에 몰두하게 되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이 작품은 “당당하게 국어와 씨름을 하면서, 반도인이 시국과 함께 일어나서 나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이무영에게 총독상을 안겨주었다. (관련 글 : 이무영, 조선예술상 총독상을 수상한 농촌소설가)
이무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부역 작가 가운데 가장 정력적으로 친일문학을 생산한 이다. 그는 문학작품을 통해 꾸준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식량 증산 등의 일제 식민지 정책을 선전, 선동했다. 친일 작가들 가운데 그만큼 꾸준하게 작품으로 일제의 식민 정책에 협조한 이는 많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도 그의 고향 음성은 그를 기리기 시작했다. 1985년, 읍내 설성공원에 ‘이무영 선생 문학비’가 건립되고, 1994년부터는 ‘무영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설성공원 앞길이 ‘무영로’로 명명되었고, 1996년 4월에는 음성군과 음성문인협회에서 이무영 생가에 표지와 표석을 설치했다.
1998년 음성군은 향토 민속자료 전시관에 이무영의 작품을 비롯해 친필·유품 등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2000년 4월에는 <이무영 문학 전집>(전6권, 국학자료원)이 발간되었고, <동양일보>사가 주관하고 음성군이 후원해 매년 4월 ‘무영제’에서 시상하는 ‘무영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무영의 친일 행적이 알려지면서 상승일로에 있던 이무영 기념사업은 제동이 걸렸다. 음성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지속적으로 이무영 기념사업 지원 중단을 요구하면서 음성군은 2012년부터 사업비 지원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또 도로명 새 주소 사업으로 이무영의 기념비가 있는 설성공원 옆 ‘무영로’도 ‘설성공원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2013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지역 시민사회단체의 요구로 설성공원 안 이무영 문학비와 작품비, 흉상 등이 2006년에 음성군이 매입해 놓은 석인리 생가터로 옮겨 갔다. 현재 무영제 행사가 유족 중심으로 생가터에서 열리고 있는 이유다.
음성의 시민사회단체는 음성군에 <동양일보>의 기념사업 중단, 향토민속자료전시관에 전시한 이무영 관련 자료 철거를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 가시적 변화는 없다. 충청권 일간지인 <동양일보>가 시상하고 있는 무영문학상은 2018년부터는 ‘무영신인문학상’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된다고 한다.
‘친일파 이무영 잔재 청산 위한 음성군 대책위원회’는 “향토민속자료전시관의 전시물은 물론, 생가 마을 입구의 표지석과 생가터에 있는 기념비, 흉상 등 이무영과 관련된 모든 잔재를 없애줄 것”을 지금도 촉구하고 있다.
오전 10시께 닿은 음성 향토민속자료전시관에는 이무영의 친필원고와 유품, 그의 저작들이 전시되고 있었지만, 어쩐지 이미 빛이 바랜 느낌이었다. 바로 찾은 석인리 생가는 마을 끝자락에 있었다. 길쭉한 터 안쪽 오른편에는 ‘무영정’이라는 이름의 정자, 오른편에는 이무영 선생 문학비가 서 있다. 설성공원에서 쫓겨난 그 비석이다.
“친일했다는 기록은 아무 데도 없네.”
사진을 찍는 동안 집터를 둘러보던 아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문학비와 정자 사이에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 옆 돌 구조물 앞에는 십자가를 박은 항아리가 있는데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생가터에 문협 이사장 명의로 새긴 표석에도, 입구의 커다란 안내 입간판에도 그에 대한 찬사만 넘친다. 심지어 안내판에는 <청기와집>으로 조선예술상총독상을 받은 사실마저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었다.
시민사회의 항의와 요구에 음성군이 손을 든 게 여기까지다. 그의 문학을 기리는 돌비는 설성공원에서 생가터로 쫓겨남으로써 공적 의미를 잃었고, 한 개인의 사적 기록에 불과한 표지가 되었다. 생가터에 옮겨진 그의 이름을 딴 정자와 문학비, 작품비 따위가 공허하게 뇌는 것은 민족을 등지고 그가 구가한 문학이란 오욕의 역사일 뿐이라는 걸 입증할 뿐이었다.
채만식문학관의 ‘대일협력(친일)’ 사실 명기
중부, 아산·청주, 경부, 논산·천안, 당진·영덕, 서천·공주 등 여섯 개의 고속도로를 갈아타면서 전북 군산시 강변로의 채만식문학관에 닿은 것은 오후 1시가 가까워서였다. 2001년에 금강하구둑에 세워진 160평 규모의 문학관은 정박한 배의 모습을 하고 탐방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편소설 <탁류(濁流)> 한 편만으로도 우리 문학사에 우뚝한 채만식(蔡萬植, 1902~1950)은 걸출한 풍자 작가다. 그러나 그도 만만찮은 친일 전력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등재를 피하지 못했다.
작가로서 일가를 이룬 성취가 그를 친일 협력의 길로 밀고 갔을까. 그러나 ‘침략전쟁에 문학이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가’를 주장한 채만식의 ‘전쟁문학론’은 그의 친일행위가 일제의 압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관련 글 : “조선사람은 ‘닛본징’(日本人)이다. 닛본징이 되어야 한다”)
채만식은 1948년부터 이듬해까지 <백민(白民)>에 자신의 친일행위를 반성하는 내용의 중편소설 ‘민족의 죄인’을 연재했다. 그는 자신의 이 소설을 통해서 ‘비겁하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친일을 하게 되었다는 뉘앙스를 드러냈다. 대부분 형식적인 사죄조차 하지 않았던 여느 친일부역 문인들에 비교하면 채만식의 반성은 일정한 평가를 받곤 있긴 하지만, 그것이 그의 적극적 친일 행적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문학관을 둘러보는데, 해설사 한 분이 다가와 도움 말씀을 건네주었다. 발길이 바빠서 속속들이 들여다볼 여유가 없어서 건성으로 전시실을 지나는데, “일제 근대문학의 암흑기와 문학인들의 대일협력(친일)”이라는 이름의 벽면이 나타났다. 부제는 ‘작가의 친일 행적과 해방 후 친일에 대한 뼈아픈 반성에 대한 고찰’이다.
전시물은 작가의 친일을 일정하게 변호하면서 그의 반성과 참회에 대한 관용을 호소하고 있었다. 맨 아래에는 그의 친일 작품 목록을 붙였다. 소설 ‘아름다운 새벽’, 산문 ‘나의 꽃과 병정’, ‘홍대하옵신 성은’, ‘지인태 유족 방문기’ 등 모두 12편이다.
아마 이 정도가 채만식문학관이 채만식의 친일부역에 대해서 드러낸 ‘최선’일 것이다. 군산은 백릉(白綾) 채만식의 고향인 동시에 그가 쓴 장편소설 <탁류(濁流)>(1938)의 배경이 되는 도시다. 채만식은 여주인공 초봉의 비극적인 삶과 함께 전통적 인습과 새로운 풍속이 서로 부딪히는 과정에서 한 개인이 겪어야 했던 시련과 역경을 극적으로 펴보였다.
알다시피 군산은 1899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강제 개항된 이후 미곡 반출항으로 이용되었던 일제의 쌀 수탈 전초기지였다. 전형적인 쌀농사 지역인 데다가 곡창지대여서 군산은 일제 수탈의 전초기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주-군산 간 포장도로가 전국 최초로 개설(1908)되고, 익산-군산 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군산이 호남 최대의 상업 도시로 성장한 것도 수탈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관련 글: 경상도 사람의 전라 나들이 ② 군산(群山) 겉핥기)
식민지 수탈의 전초 기지가 되었던 군산 출신의 작가 채만식이 적극적으로 친일부역에 나선 것은 그것 자체로 뒤틀린 역사의 한 장면이 되었다. 2000년대 전후하여 군산은 도시가 낳은 위대한 작가로 그를 소환했다. 군산 근대건축관 뒤편의 탁류길에 <탁류>의 등장인물 군상과 채만식의 소설목록을 새긴 조형물을, <탁류>의 주요배경인 미두(米豆) 거리와 째보선창, 꽁나물고개 등에 ‘탁류 소설비’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금강하구둑 옆에 채만식문학관을 건립하고, 채만식문학상을 시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군산은 어떤 식으로든 작가의, 이른바 ‘흑역사’를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문학관 전시실의 한 면을 할애한 배경이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어쨌든 아쉬운 대로 ‘역사의 진전’이라 할 수 있을까.
미두장 거리 근처의 유명 중국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채만식 문학비를 찾으러 나섰다가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차를 타고는 월명공원 안 문학비까지 갈 수 없었고, 우린 갈 길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미당시문학관 누리집에도 ‘친일문학 작품’이 실렸다
우리가 서둘러 차를 몰아 전북 고창군 부안읍 선운리의 미당시문학관에 닿았을 때는 다섯 시가 겨워 슬슬 땅거미가 내릴 때쯤이었다. 미당(未堂)의 고향인 선운리의 선운초등학교 봉암분교 폐교부지를 단장하여 시문학관이 문을 연 게 2001년 11월 3일이란다.
미당시문학관 누리집에 따르면, 개관일이 11월 3일이 된 것은 서정주(徐廷柱, 1915~2000)의 “중앙고보 재학시절 광주학생의거 지원 시위 사건(1929년, 1930년 2회)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단다. 미당은 이 사건으로 “강제 퇴학당하고 이후 정규 학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당이 1930년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해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된 뒤 퇴학당한 것을 기념하여 문학관의 문을 연 것은 ‘송정 오장 송가’ 등의 친일 전력이 부담스러워서였을까. 미당은 자신의 친일부역을 일본의 “욱일승천지세 밑에서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로 체념하면서 살아간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강변한 이다. (관련 글 : 서정주, 친일은 하늘 뜻에 따랐다?)
매년 개관기념일을 맞아 ‘미당문학제’를 개최하는데 문학관 중앙에 선 탑 모양의 건물에 걸린 펼침막에는 이틀 전에 문학제가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고, 입구에는 내부 수리로 휴관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인 셈이었지만 내부를 구경하러 온 건 아니었으니 낭패할 일은 아니었다.
폐교부지를 단장, 단층의 오래된 슬래브 교사(校舍)를 그대로 살린 구조인데도 파인더에 들어오는 풍경이 기가 막혔다. 아, 미당은 죽어서도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누리는구나, 하고 중얼거렸을 정도였다. 거기엔 하고많은 문학관이 보여준 풍경과는 다른 소박하지만 넉넉한 풍경이 있었다.
미당시문학관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유족회의 ‘친일·친독재 작품 병행전시’ 요구를 받아들여 2006년부터 문학관 안에 친일작품과 전두환 생일 축시 등을 전시하고 있다고 했다. 문학관 안에 들어갈 수 없어 이를 확인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미당시문학관 누리집에는 그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소개하고 있고, ‘서정주를 말한다’ 꼭지에도 그에 관한 추모의 글이 넘쳤다. <현대문학>과 <문학사상>, <시와 시학> 등 문예지의 추모특집에 실린 유종호, 김화영, 이어령 등 비평가의 글과 정현종, 나희덕 등 시인의 추모시가 그것이다. (누리집 바로가기)
미당시문학관 누리집의 미당 ‘연보’에는 그의 친일 전력이 “1943년 친일작품 발표 시작. 1944년까지 시, 소설, 수필, 르뽀 등 11편 발표.” 한 줄로 기록되어 있다. ‘문학자료실’에 ‘친일작품 소개’란도 있어 친일작품 목록과 함께 9편의 작품을 실어 놓았다. 아쉽지만 그것도 우리가 청산한 식민지 역사의 일부라고 위로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미당문학상’이 폐지되기에 이른 것은 ‘역사의 진전’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원수문학관의 ‘일제 말기 친일작품’
마지막 여정은 창원시 의창구 평산로에 있는 ‘고향의 봄 도서관’이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아동문학가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1911~1981)가 노랫말을 쓴 동요 ‘고향의 봄’을 딴 이 도서관 지하 1층에 동원홀과 ‘이원수 문학관’이 2003년 문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 글 : 이원수, ‘고향의 봄’에서 ‘굳센 일본 병정’까지)
초기에 민족적 입장을 견지했던 이원수는 중일전쟁(1937) 이후 본격적인 친일부역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어린이를 독자로 쓰는 동시라는 그릇을 이용하여 ‘황국신민’과 ‘내선일체’의 논리를 선전·선동했다. 민족적 정체성이 여물지 못한 어린이에게 그가 노래한 ‘씩씩한 일본 병정’, ‘지원병 형님’ 이야기는 어떻게 다가갔을지는 물으나 마나다.
1943년 1월 <반도의 빛>에 발표한 산문에서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자신의 ‘아동관’과 ‘아동문화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반도의 아동은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기 위해 “강제 받지 않고서 일본 정신을 가슴에 새”겨야 하며, 이를 위해 “동화, 영화, 연극, 회화, 음악, 무용, 완구” 등과 같은 건전한 아동 독물(讀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인 고향의 봄 도서관 지하에 영화 상영과 각종 공연을 위한 공간인 동원홀과 이원수 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이원수의 생전 활동을 담은 사진 패널을 걸어놓은 복도를 지나면 오른쪽이 이원수문학관이다. 독자적 건물이 아니라 도서관의 부속 시설인 181㎡의 소규모 전시실이다.
4년 전에 이원수의 친일문학 글을 쓸 때 이원수 문학관 누리집(바로 가기)에서는 그의 연보에 단 한 줄로 친일 전력(1942년 ‘지원병을 보내며’ 등 친일작품 발표)이 씌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채만식문학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원수문학관 오른쪽 벽에는 ‘일제 말기 친일작품’이라는 제목의 전시물이 보였다.
그의 친일시 ‘지원병을 보내며’(1942)와 함께 그의 변명 격인 ‘털어놓고 하는 말’(1980) 일부가 전시되고 있었다. 그가 분명 뉘우쳤을 것이라고 쓴 이오덕(1925~2003)의 글도 걸려 있었다.
이오덕은 이원수가 “불의와 부정을 싫어하고,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았고 “4·19 때 독재자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전태일을 동화와 동시로 쓴 유일한 사람이라는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단지 심증일 뿐, 이원수는 살아서 친일을 고백하거나 참회한 적이 없다.
누리집에도 ‘작품감상’ 꼭지의 맨 아래에 ‘친일작품’란을 따로 두어 전시관의 전시물과 같은 형식의 글을 실어 놓았다. 그러나 ‘친일 작품’은 단 한 편, ‘지원병을 보내며’뿐이다. 그는 동시 2편, 자유시 1편, 수필 2편 모두 다섯 편의 친일 작품을 썼다.
친일 작품 목록과 함께 거의 전편을 공개하고 있는 미당시문학관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문학관 전시실 이원수의 변명 아래에는 “그의 신변이나 가정 경제에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란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친일 글을 썼다는 것은 민족에게 죄를 지은 일이었으며, 그의 활동과 정신에 큰 오점을 남긴 일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의 친일 사실을 에둘러 용서하자는 뜻으로 친일 사실을 공개하고 있는데 정작 그것은 친일 행적의 본질을 환기하고 있었다.
창원에서 2011년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이려 하자 시민사회단체들이 기념사업에 시민 혈세 지원을 중단하라고 요구한 것은 바로 그가 저지른 친일부역 행위에 대한 민족적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다. 비록 반민족행위를 단죄하지는 못했지만, 그를 기념하는 사업에 시민의 세금을 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었다.
올해 새 시장이 취임하면서 ‘창원시민의 날’ 기념식에서 2010년부터 합창해 오던 ‘고향의 봄’ 노래가 불리지 않은 이유도 같다. 시민사회단체에서 미당문학상에 이어 동인문학상도 폐지하라고 요구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비록 준엄한 단죄로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지만, 그 오욕의 역사에 협력했던 반민족행위자를 기념하는 사업을 벌이는 것은 독립을 위해 스러져 간 숱한 선열들의 희생을 능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순 변화일까, ‘역사의 진전’일까
이무영 문학비가 그의 생가터로 밀려나고 채만식, 서정주, 이원수 문학관에서 그들의 친일 작품을 전시내용에 추가하게 된 것을 ‘역사의 진전’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변화가 단지 촛불 혁명에 힘입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촛불이 청산을 요구한 적폐는 단순히 정치 사회만이 아니라 단추가 잘못 끼워진 역사 왜곡에도 이르고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미당문학상의 폐지라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이 일련의 변화는 굴절을 거듭해 온 우리 역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물꼬를 트고 있다는 조짐은 아닐는지. 몇 해 전부터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와 영화가 수천 만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변화의 표지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은가 말이다.
마지막 목적지는 마산합포구 산호공원, 1969년에 세운 ‘고향의 봄’ 노래비를 찾았다. 등산복 차림으로 산을 오르는 주민들도 노래비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공원으로 오르는 좁은 산책길을 오르자 나타난 노래비를 사람들은 무심히 스쳐 가고 있었다.
‘고향의 봄’은 누구나 어린 시절의 고향을 정겹게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노래다. 그 노래가 식민지 시대에 친일부역 문인과 음악인이 만든 작품이어서 때론 배제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청산하지 못한 우리 오욕의 근대사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얽매고 있다는 걸 방증한다.
역사 청산의 기회를 잃고 반세기를 넘겼지만 <친일인명사전>으로 친일부역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기록·보존하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친일문인들의 반민족행위를 알리면서 그들을 기리는 친일문학상을 폐지하려는 운동은 바로 일제가 남긴 파시즘을 청산하는 일이며, 역사 성찰을 위한 기억 투쟁이다.
문인들의 친일부역 사실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뒷사람조차 부끄럽게 만든다. 그러나 해방 후 이들은 아무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방해로 결국 해산되었고, 이후 우리 현대사는 끊임없이 그 과거의 기억을 망각할 것을 요구하는 세력들이 지배해 왔다.
고통과 치욕의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기억과의 투쟁은 역사 성찰의 출발점이며 그 종착점이기도 하다. 돌아오는 길에, 새삼 서독 대통령 바이츠제커의 종전 40주년(1985. 5. 8.) 기념 국회 연설을 떠올린 것은 그래서였다.
“지나간 일은 수정되거나 백지화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과거에 대해서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 대해서도 눈먼 사람이 된다.”
2018. 12.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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