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출한 풍자작가 채만식(1902~1950)의 친일 부역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 교사가 추적한 친일 문인의 민낯]
채만식(蔡萬植, 1902~1950)은 걸출한 풍자작가다. 흔히들 우리 판소리계 소설의 전통을 계승한 작가로 해학에 김유정, 풍자에 채만식을 꼽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단편 <치숙(痴叔)>과 <논 이야기>, <미스터 방>, 중편 <태평천하> 따위에 낭자한 풍자는 그것 자체로 일가를 이루고 있다.
걸출한 풍자작가, 채만식의 친일 행적
채만식 역시 만만찮은 친일 전력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등재를 피해가지 못했다. 작가로서 일가를 이룬 성취가 그를 친일 협력의 길로 밀고 갔을까. 그러나 ‘침략전쟁에 문학이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가’를 주장한 채만식의 ‘전쟁문학론’은 그의 친일 행위가 일제의 압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채만식은 1902년 전라북도 옥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강(平康), 호는 백릉(白菱)과 채옹(采翁)이다. 임피보통학교를 나와 경성의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했다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귀국하면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1924년 12월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세 길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24년부터 1933년까지 <동아일보>, 대중잡지 <별건곤(別乾坤)>, <혜성(彗星)>(뒤에 <제일선(第一線)>으로 제호 변경)지 기자로 활동했다. 1932년 조선문필가협회 결성 시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조선일보> 기자, 금광 브로커 등을 거쳐 1939년에 <매일신보>에 소설 ‘금(金)의 정열(情熱)’을 연재했다.
1939년 4월경 개성 송도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두신 학생의 사상사건으로 약 두 달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같은 해 8월 <채만식 단편집>(학예사), 12월 <탁류>(박문서관)를 발간했다. 1940년 장편소설 <태평천하>를 공동 작품집 <3인 장편집>(명성사)을 통해 발표했다. 1941년 장편소설 <금의 정열>(영창서관)을 발간했다.
문필활동을 통한 채만식의 친일 행위는 1940년부터 시작된다. 그 해 7월, 중일전쟁 개전 3주년에 즈음해 <인문평론>에 발표한 “나의 ‘꽃과 병정’”에서 그는 일제의 중국 침략이 역사적 필연이라 강변하면서 침략전쟁을 찬양한 것이다.
“대화(大和) 민족의 역사적 오래고 오랜 숙망이요, 그 필연한 귀결로써 1억 총의의 세기적 경륜인 대륙건설이 드디어, 그날 그 시각에 북지(北支)의 일각 노구교에서 일어난 한 방 총소리를 신호삼아 마침내 실제 행동의 제일보를 내디딘 지도 어느덧 만 3 년에, 네 번째의 제 돌을 맞이하게 되었다. 동아의 천지에 새로운 질서가 퍼질 전주곡이요, 따라서 역사의 웅장한 분류(奔流)였다.”
침략전쟁에 문학이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가를 다룬 그의 전쟁문학론은 1941년 초에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다. ‘시대를 배경하는 문학’(<매일신보>1941.1.10.)에서 그는 “조선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일본제국의 한 개 지방에 불과한 자(者)”라며 “신체제 하의 조선문학의 진로는 오직 신체제에 순응하는 방향”이라고 주장했다.
전쟁문학론, 신체제에 순응해야
그는 실제 전쟁을 소재로 ‘무적 황군’의 활약상을 묘사함으로써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작품도 발표했다. 소설 형태의 실화 각색물 ‘혈전(血戰)’(<신시대>1941.7)은 노몬한 전투에 참가했던 일본군 대위의 수기를 기초로 한 작품이다. 1944년 5월호 <반도의 빛>에 발표한 ‘군신(軍神)’은 일본군의 싱가포르 점령기를 다루고 있다.
일제가 1943년 8월부터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 여느 친일 문인과 마찬가지로 채만식도 이를 환영하고 감읍해마지 않았다. 그는 징병제 시행으로 ‘내선일체’를 향한 길을 열어준 ‘천황의 시혜’에 대한 감격을 <매일신보>(1943.8.3.)에 발표하였다.
“이로써 조선 땅 2400만의 백성도 누구나가 다 총을 잡고 전선에 나아가 나라를 지키는 방패가 될 자격이 생겨진 것이다. 조선 동포에 내리옵신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은(聖恩) 홍대무변(鴻大無邊)하옵심을 오직 황공하여 마지아니할 따름이다. 2400만 누구 감읍지 아니할 자 있으리요.
나라는 백성의 모체다. 나라 있고서의 백성이다. 세상엔 나라 없는 백성이 노상 없음은 아니나, 그런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국기(國旗)의 배경 없는 백성은 천하의 천민이다. 백성은 나라와 운명을 같이한다.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 일러오지 않았던가. 나라가 편안하여야 백성도 업(業)에 안(安)할 수 있으며 나 라가 융성하여야 백성도 생에 안락할 수가 있는 법이다.
전쟁은 국난이다. 국난은 백성이 나서서 당하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 되어 최대의 의무요 아울러 최고의 영광은 나라를 위하여 피를 홀리는, 즉 전쟁에 나아가 한 목숨이 죽을 수 있는 군인 될 자격을 가지는 것이다.
반대로 만일 그 백성이 나라가 방금 국운을 내어걸고 전쟁을 하는 날에 떳떳이 달려나가 전쟁에 피를 홀림으로써 나라의 방패가 되지 못하는 자라고 한다면 그는 나라에 대하여 한낱 불구자적인 기생충적인 부끄러운 존재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충의의 극치는 거듭 말하거니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데 있다. 나라에 충(忠)하지 못하는 백성이야 무엇으로 백성 값에 갈 것인고.
(……) 그러나 이 소화 18년 8월 1일 역사적인 날로부터는 조선 2400만의 백성도 어깨가 우쭐하여 “나도 오늘부터는 황국신민으로 할 노릇을 다하는 백성이다.”, “나도 오늘부터는 천하에 부끄럽지 아니한 황국 신민이로라.”고 큰소리를 쳐도 좋을 것이다.(……)”
- ‘홍대(鴻大)하옵신 성은’ 중에서
▲<매일신보>에 연재한 친일 장편소설 <아름다운 새벽>
채만식은 조선인 최초의 전사자(1939년 노몬한 전투에서 자폭)인 일본 육군 항공 대위 지인태(池麟泰)의 유가족을 취재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면서 조선 청년들도 그를 본받아 ‘제국군인’이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온몸을 바치라고 선동했다. 지인태의 부친도 선전의 도구로 썼다.
“진충보국(盡忠報國)에 살며, 그 정신으로 죽음이 군인의 본분입니다. 서(西)으로 우랄산맥을 넘고, 남으로 태평양올 건너 마음껏 날아다니면서, 폐하의 어능위(御稜威)를 팔굉(八紘)에 넓히고, 우리 황도를 동서에 선양하도록, 그 기백으로 이 광고(曠古)의 성전(聖戰)에 용왕매진(勇往邁進)하는 것이 우리 비행장 사(飛行將士)들의 본망(本望인 것입니다. ……
이 성전을 완수하자면 살아 있는 몸만으로는 잘 할 수가 없습니다. 사후의 혼백까지도 이 성업이 달성되기 전에는 흩어지지 아니할 각오입니다. 생명이 혼으로 화할 때란 조만(早晩)이 없습니다. 그때가 오면, 시기도 장소도 공(功)도 다 돌아보지 아니합니다. 오직 용약전진(勇躍前進)이 있을 따름입니다.”
- ‘추모되는 지인태 대위의 자폭-유가족의 위문을 마치고’(<춘추>1943.1)
“지 대위를 제국 군인으로 길러내고 제국 군인으로서 부끄럽지 아니한 전사를 하여 국가를 위하여 힘겨운 주춧돌이 되었으며, 그 이름이 야스쿠니(靖國)의 신역(神域)에서 천추에 빛나도록 한 데는 대위의 선친 지동선(池東善) 노인의 감화와 힘이 컸음을 잊을 수가 없다.
……지 노인은 집안사람들이나 친구들더러 늘 하는 말이 ‘우리 조선 사람도 멀지 않아 제국 군인으로 나설 때가 올 테니 인제 두고 보라’고, 또 ‘우리 막내둥이 인태는 기어코 군인으로 내보내서 한바탕 나랏일을 하고 이름을 떨치게 할 테라’고 하여 왔었다.”
-‘영예의 유가족을 찾아서-위대한 아버지 감화(感化)’(<매일신보> 1943.1.18.) 중에서
“명실 공히 ‘닛본징’이 되어야 한다”
채만식은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아름다운 새벽’에서는 전후방 구별이 없는 일제 침략전쟁에서 ‘내지인’과 힘을 합쳐 전력을 다해 싸우는 조선인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일본인들의 정신주의를 찬양하면서 조선인도 그를 본받자고 선동했다.
“(……) 새삼스럽게 내선일체를 운위할 것도 없이 조선 사람은 ‘닛본징(日本人)’이다. ……하루바삐 명실(名實)을 다 같이 추호도 다름이 없는 ‘닛본징’이 되어야 한다. 그러하여야만 조선 사람으로서의 ‘닛본징’인 도리를 다함이려니와 동시에 ‘닛본징’으로서의 조선 사람이 진정한 행복도 누리게 될 것이다.”
- ‘아름다운 새벽’(<매일신보>1942.2.19.) 중에서
‘몸뻬 시시비비’(<반도의 빛>1943.7)에서 전쟁 시기 근로 여성의 바람직한 옷차림을 제시하며 ‘싸우는 총후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논평했다. 소설 ‘이상적 신부’(<방송지우(放送之友)1944.3.)에서는 전쟁 시기의 ‘이상적 신부’상을 제시하고, 거기 어울리는 이상적 남편감으로 ‘소년 전차병’을 지원하는 주인공 소년을 소개한 작품이다. 바야흐로 그의 문학적 재능은 이른바 ‘총후보국(銃後報國)’에서 난만히 피어나고 있었다.
채만식은 1944년 10월부터 1945년 5월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여인전기(女人戰記)’를 연재했다. 이 소설에서는 ‘총후’ 조선 여인이 본받아야 할 ‘내지’(일본) 여인의 ‘올바른’ 자세를 소개하면서 전쟁 동원을 위한 조선 여성의 반성과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내지의 어머니들은 2600여 년을 두고 한결같이 나라를 위하여 아들네를 전지에 내보내되, 동(動)치 아니하도록 도저한 도야(陶冶)와 훈련과 그러고 자각 가운데서 살아 내려왔다.……. 여러 백 년을 나라와 나라 위할 줄을 모르고 오직 자아본위, 가정 본위, 오직 일가족속 본위로만 살아온 조선 백성은, 따라서 어머니들의 군국에 대한 정신적 준비랄 것이 막상 충분치가 못하였다.”
태평양전쟁이 계속되면서 1945년 4월경 고향으로 낙향한 후 농사를 지으며 소개(疏開) 생활을 했다. 해방 후 상경해서 조선문학가동맹의 소설분과위원장을 맡았으나 곧 그만두었다. 이듬해 그는 다시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로 내려갔다.
그는 이후 <제향날>(박문출판사), <잘난 사람들>(민중서관)·<태평천하>(동지사), <탁류>(민중서관) 등을 펴냈다. 그는 <아름다운 새벽>(박문출판사) 전편(前篇)도 펴냈으나 이는 <매일신보> 연재 시에 들어 있었던 노골적 친일 내용은 삭제된 채였다.
채만식은 1948년부터 이듬해까지 <백민(白民)>에 자신의 친일 행위를 반성하는 내용의 중편소설 ‘민족의 죄인’을 연재했다. 그는 자신의 이 소설을 통해서 ‘비겁하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친일을 하게 되었다는 뉘앙스를 드러냈다.
소설을 통한 참회- ‘민족의 죄인’
“나중 가서야 어찌 되었든 우선 당장은 나아가지 않더라도 새끼로 목을 얽어 끌어내지는 아니할 것이며 누워서 배길 수가 없잖아 있는 소위 미영격멸 국민총궐기대회의 강연을 피하려 않고서 내 발로 걸어 나갔던 것은 그처럼 대일협력의 이윤이 어떻다는 것을 안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었다.
많은 수효의 영리한 사람들이 저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진심으로 일본 사람을 따랐다. 역시 적지 아니한 수효의 사람이 핍박을 받을 용기가 없어 일본 사람에게 복종을 하였다. 복종이 싫고 용기가 있는 사람은 외국으로 달리어 민족해방의 투쟁을 하였다. 더 용맹한 사람들은 외국으로 망명도 않고 지하로 숨어 다니면서 꾸준히 투쟁을 하였다.
용맹하지도 못한 동시에 영리하지도 못한 나는 결국 본심도 아니면서 겉으로 복종이나 하는 용렬하고 나약한 지아비의 부류에 들고 만 것이었었다.”
- ‘민족의 죄인’ 중에서
그러나 친일문학을 연구하고 있는 국문학자 김재용(원광대)의 견해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친일문학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자발성’인데 채만식의 친일 역시 자발적이었다는 것이다. 친일행적에 대한 진솔한 참회의 글을 찾아보기 어려운 풍토에서 채만식의 반성은 일정한 평가를 받곤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적극적 친일행적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채만식은 1950년 6월 11일 이리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48세. 1984년에 군산시 월명공원에 ‘백릉 채만식 선생 문학비’가 세워졌다. 1996년 <탁류>의 작품 무대인 군산 시내 세 곳에 채만식 소설비가 세워졌으며, 2001년에는 채만식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2002년 11월 군산 시내 다섯 곳에 소설비가 추가로 세워지면서 군산은 지역 전체가 그의 문학을 기리는 곳이 되었다. 2002년 채만식문학상이 제정되어 2003년부터 시상했다. 이 상은 작가의 친일 행위를 문제 삼은 시민단체의 반대로 1년간(2005) 중단되었다가 2006년부터 재개되었다.
채만식은 내게 장편소설 <탁류(濁流)>(1938)의 작가로 각인되어 있다. 대학시절에 과제로 읽은 이후 몇 해 전에야 나는 <탁류>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었다. 1930년대 식민지 시대의 어둡고 뒤틀린 현실을 고발, 풍자하고 있는 이 장편은 채만식의 문학적 저력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모자람이 없다.
군산 시내 곳곳에 세워진 소설비를 통해 시민들이 <탁류>의 서사를 삶 속에서 풀어가듯, 그의 문학이 친일의 오명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채만식뿐 아니라, 친일문인으로 이름을 올린 시인, 작가들을 제외하고 현대문학을 이를 수 없다. 그것은 우리 문학의 한계이면서 우리가 반드시 넘지 않을 수 없는 해묵은 과제이기도 하다.
2015. 7.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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