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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이원수, ‘고향의 봄’에서 ‘굳센 일본 병정’까지

by 낮달2018 2018.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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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 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 경남 양산시 춘추공원에 세워진 이원수의 '고향의 봄' 노래비
▲ 이원수(1911~1981)

이원수(李元壽, 李山元壽, 1911~1981)라는 이름이 낯선 이는 적지 않을 테지만, 동요 ‘고향의 봄’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이다. 이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치고 그 노래를 부르며 자라지 않은 이는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법에 맞지 않는 첫 구절 ‘나의 살던 고향은’부터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를 거쳐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를 구성지게 부르면 저도 몰래 저 유소년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나기 마련이다. 그 노랫말에 실린 것은 근대화 이전의 ‘고향’, 그 원초적 정경이기 때문이다.

 

이원수는 ‘고향의 봄’과 ‘겨울나무’ 같은 동요의 노랫말을 지은 아동문학가다. 모두에게 유년의 고향을 정겹게 떠올리게 해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친일 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친일 부역자였다.

 

그의 노랫말에 곡을 붙인 작곡가 홍난파 역시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라는 사실은 식민지 시절에 친일 부역이 예술의 전 영역에서 일관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해 주는 것이다.

‘고향의 봄’과 ‘겨울나무’의 이원수

이원수는 1911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났다. 창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1922년 마산으로 이사해 정착한 후 어린이잡지인 <어린이>와 <신소년>을 애독하며 문학적 소양을 쌓았다. 등단작은 1924년 <신소년>에 발표한 ‘봄이 오면’이지만 1926년 4월, 만 열다섯 살에 <어린이>에 ‘고향의 봄’이 입선하면서 정식 등단했다.

 

‘고향의 봄’은 1925년에 돌아가신 부친에 대한 그리움과 창원 소답리에서 지낸 유년시절에 대한 향수를 그린 노래다. 이원수는 1925년 마산에서 활동하던 소년 단체인 신화소년회(新化少年會)에 가입하여 문학을 접하고 민족애에 눈뜨게 되었다.

 

이원수는 식민지 조국과 민족적 정체성 때문에 혼란스러운 사춘기를 보냈던 듯하다. 그는 1926년 마산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 조선인을 학대하는 일본인의 만행을 비난하는 글을 학급신문에 실었다. 이를 경찰에서 문제 삼았으나 당시 담임교사가 책임을 지기로 하면서 처벌을 면한 것이다.

 

1928년 이원수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상업학교에 입학했다.그는 이응규·윤복진·신고송·서덕출·최순애 등과 함께 서울에 있던 윤석중이 만든 모임 ‘기쁨사’의 동인으로 참여했다. 또 방정환이 창간한 순수아동잡지 <어린이>지의 집필 동인으로 동시 ‘비누풍선’과 누나에 대한 그리운 감정을 그린 ‘섣달 그믐밤’ 등을 같은 지면에 발표했다.

 

1931년 상업학교 졸업 후 이원수는 함안금융조합에 취업했고 9월에는 아동예술운동 단체인 ‘신흥아동예술연구소’가 창립될 때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35년 2월 그는 반일 성향의 문학 그룹인 ‘함안독서회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4월부터 10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 이원수의 동시집 <종달새>, 동화집 <꼬마 옥이>. 그리고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1925)

1936년 6월에는 기쁨사 동인이자 ‘오빠 생각’의 작사가였던 최순애와 결혼했다. 이듬해인 1937년에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때부터 이원수는 식민지 체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1942년 8월 <반도의 빛>에 발표한 동시 ‘낙하산-방공비행대회에서’와 ‘지원병(志願兵)을 보내며’에서 이원수는 ‘용감한 낙하산 병정’을 찬양하고 병역 봉공의 의지를 노래했다.

 

푸른 하늘 나는 비행기에서

뛰어나와 떨어지는 사람을 보고

‘앗차’ 하고 놀라면 꽃송이처럼

활짝 피어 훨-훨, 하얀 낙하산,

오오, 하늘공중으로 사람이 가네

새들아 보아라

해도 보아라

우리나라 용감한 낙하산 병정,

푸른 하늘 날아서 살풋 내리는

낙하산 병정은 용감도 하다,

낙하산 병정은 참말 좋구나

 

- ‘낙하산-방공비행대회에서’(<반도의 빛> 1942. 8)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소리 높이 군가가 울렸습니다

 

정거장, 밀리는 사람 틈에서

손 붙여 경례하며 차에 오르는

씩씩한 그 얼굴, 웃는 그 얼굴

 

움직이는 기차에 기를 흔들어

허리 굽은 할머니도 기를 흔들어

‘반자이’(만세) 소리는 하늘에 찼네

 

나라를 위하야 목숨 내놓고

전장으로 가시려는 형님들이여

부디 부디 큰 공을 세워주시오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

굳센 일본 병정이 되겠습니다

 

- ‘지원병을 보내며’(<반도의 빛> 1942. 8.)

 

동시는 아이들을 독자로 쓰는 시다. 이원수는 황국신민을 만들기 위한 내선일체의 논리를 동시라는 그릇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어린이에게 다가갔다. 민족적 정체성이 여물지 못한 어린이들에게 씩씩한 일본 병정, 지원병 형님 이야기는 어떻게 다가갔을까.

 

동시에 등장한 ‘씩씩한 일본 병정’, ‘지원병 형님’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때문에 일기 시작한 항공열에 들떠 지내다가 소년 비행병이 되고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전사했던 인재웅은 황민화 교육의 결과를 웅변으로 드러내 주는 예다. 이 식민지 소년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인 소학교를 다니며 전형적인 황민화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아동과 아동문화에 대한 그의 생각은 1943년 1월 <반도의 빛>에 발표한 산문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반도의 아동은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기 위해 “강제 받지 않고서 일본정신을 가슴에 새”겨야 하며, 이를 위해 “동화, 영화, 연극, 회화, 음악, 무용, 완구” 등과 같은 건전한 아동 독물(讀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 창원에 있는 이원수 문학관의 전시 벽면에 '일제 말기 동원의 친일작품'란이 마련돼 있었다.

‘총후봉공’과 ‘내선일체’에 화답한 ‘문필보국’

 

그의 문필 보국은 비단 동시에 그치지 않았다. <반도의 빛> 1943년 5월호에 발표한 권두시 ‘보리밭에서-젊은 농부의 노래’는 전시 체제 하의 농민이 총후봉공(銃後奉公)에 임하는 자세를 노래한 작품이다. 그는 이 시에서 풍작을 기원하는 농부의 소망은 곧 전쟁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것이며, 젊은 농부들은 “승리를 위해 피 흘리는 일선의 장병”과 같은 ‘생산의 전사들’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던 것이다.

 

이원수는 일제가 추진한 민족말살 정책의 일부인 내선일체 사업에도 적극 화답했다. 일제는 고대일본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며 백제 수도였던 부여에 신도(神都)를 세운다는 계획 아래 신사를 짓는 공사를 벌였다. 부여 지역을 자신들의 날조된 고대사와 연결 지어 내선일체의 ‘성지’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의 영화인, 문인 등 지식인들을 대거 동원하여 신사 조영공사에 육체노동으로 봉사하게 하였다.

 

1940년에 착공한 이 부여신궁 봉사 작업에 다녀온 이원수는 그 감회를 “부여신궁이 어조영되는 것은 반도의 자랑이요 이천오백만 민중의 기쁨”이라고 표현했다. 또 그 참여 목적을 “일본정신을 심장에 새기어 유서 깊은 이 땅, 이 거룩한 신궁조영공사에 성한(聖汗:거룩한 땀)을 흘리는 대원으로 하여금 내선일체의 한 본이 되고 선두자가 되도록 하는 것”에 두었다.

 

이원수는 신궁 조성사업에 참여하여 비로소 ‘황국신민이 된 우리’의 사명은 “태평양이라도 한숨에 건너가서 못된 무리들을 처부수고 참된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대동아전쟁 하에 우리들의 가야 할 길”임을 주장했다.

▲ 경남 양산시 북정공원에 세워진 이원수의 '고향의 봄' 노래비

그러나 이원수가 주장했던 바와 같은 ‘황국신민의 사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친일 부역인사들에게는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해방’이 찾아온 것이다. 이원수의 ‘거룩한 신궁’은 태평양전쟁의 도발로 심각해진 물자와 인력부족 때문에 늦어지다 결국 완공되지 못했다.

 

해방 후, 이원수는 경남 함안 지역에서 일하며 한글강습소에서 한글을 가르치다 경기공업고등학교 교사가 된다.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 가입한 이후 좌익 계열의 <새동무>와 <아동문학>, 우익 계열의 <소학생> 등을 넘나들며 활동했다.

▲ 1984년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세운 이원수 문학비
▲ 1968년 창원시 마산 합포구 산호공원에 세워진 '고향의 봄' 노래비

그는 좌익에서 전향하여 1949년 12월 국민보도연맹과 우익 문학단체인 한국문학가협회에 가입한다. 1952년에는 아동 월간지 <소년세계>를 창간했고 1953년에는 창작집 ‘오월의 노래’와 <숲속 나라>를 간행하였다. 1954년 한정동과 함께 한국아동문학회 창립에 참여하여 부회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동료들과 수필집을 간행하고 출판사 편집장과 대학 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1968년에는 창작집 <메아리 소년>을 펴냈다. 1971년에는 한국아동문학가협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70년대 이후, 그는 국내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은 죄다 받은 것 같다. 1970년 ‘고마우신 선생님상’, 1973년 한국문학상, 197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78년 9월 예술원상(문학부문), 1980년 10월 대한민국문학상(아동문학 부문 본상)을 받았다.

 

이원수는 1981년 1월에 구강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70세. 그는 '외재율 중심의 재래적 동요에서 내재율 중심의 현실 참여적 동시를 개척'하고 산문문학으로서 장편동화와 아동소설을 통해 아동문학에 적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곳곳에 노래비와 문학비

 

일찍이 1968년에 이원수가 유소년 시절을 보낸 마산과 창원에 각각 ‘고향의 봄’ 노래비(마산 산호공원)와 문학관(창원 평산로)이 건립되었다. 그의 고향인 양산 춘추공원에도 1986년 ‘고향의 봄’ 노래비가 세워졌고 1984년에는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친일 부역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리는 일은 이어진 것이다.

 

자신의 친일 전력에 대해서 그가 남긴 글을 따로 없다. 다만 이오덕은 해방 이후의 이원수의 삶의 태도로 미루어 일제 말기에 한때 저질렀던 그 친일 행적을 뼈아프게 뉘우쳤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뉘우침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게 그의 친일 행적을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2011년 이원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벌이는 기념사업에 창원시에서 예산을 지원하자 시민단체 등에서 이를 저지하려 한 것은 그래서인 것이다. 이원수의 차녀가 부친의 친일 행적에 대해 사과했지만, 그게 면죄부가 될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하다. [관련 <오마이뉴스> 기사]

▲ 지원 중단을 요구하는 광복회원들의 기자회견 모습(2011. 3) ⓒ <오마이뉴스>

올해는 이원수의 아내 동요작가 최순애(1914~1998)의 탄생 100주년이다. 고향의봄기념사업회는 이 100돌을 맞아 <다시 부르는 노래, 오빠생각>을 발간했다고 한다. ‘동심(童心)과 동심(同心)’이란 이름의 최순애·이원수의 문학그림전도 열렸다.

 

이원수의 아호는 동원(冬原)이다. 이원수 문학관 누리집에선 이 아호에 대해 ‘비바람이 불고 추운 겨울에도 늘 겨울 들판에 서서 자리를 지키며 어린이들이 겪은 어려움을 먼저 맞겠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향의 봄’만큼이나 널리 불리는 그의 노래 ‘겨울나무’의 가사도 예사롭지 않은 울림을 준다. 이 노래에도 자신의 아호를 지은 뜻이 숨겨져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원병을 보내며’에서 ‘우리도 자라서’ ‘굳센 일본 병정이 되겠’다고 노래한 이원수를 '겨울나무'에 겹치는 것은 불편하고 씁쓸하기만 하다.

 

 

2014. 8.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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