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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주요한, ‘야스쿠니의 신’이 되도록 천황을 위해 죽으라

by 낮달2018 2019.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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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을 위해 죽으라’고 권유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

▲ 주요한(18900~1979)

조선총독부가 ‘조선민사령’을 개정한 것은 1939년이고,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명령한 것은 1940년이었다. 이른바 ‘창씨개명’은 거칠게 정리하면 조선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일본인이 되라는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조선인이 이 정책에 반대하였지만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친일파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朱耀翰·松村紘一, 1900~1979)도 여기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총독부의 내선일체 체제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일본어 시집 『손에 손을(手に手を)』(1943)까지 낼 정도의 극렬 친일파 주요한은 기꺼이 황국신민의 은혜에 감읍해 마지않는다.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와 ‘팔굉일우(八紘一宇)’

 

친일파들은 갖가지 지혜를 짜내어 일제의 요구를 만족시킬 만한 창씨를 ‘실천’하였다. 일제의 황민화(皇民化) 요구에 부응한 창씨명은 소설가 이광수와 시인 주요한, 그리고 평론가 김문집의 그것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진무천황이 즉위한 곳의 산 이름인 가구야마(香久山)를 씨로 삼아 ‘가야마(香山)’라 하고 ‘광수’의 ‘광(光)’ 자에다 ‘수(洙)’ 자는 일본식의 ‘랑(朗)’으로 고쳐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가 된 이광수가, 단연 그 선두다.

 

평론가 김문집은 ‘대구(大邱)에서 태어나 도쿄, 즉 에도(江戶)에서 성장하고 용산(龍山)역에서 전사해 돌아오는 황군 장병을 맞아 운 적’이 있다며 그 각각의 지명에서 한 자씩 따서 ‘오에 류노스케(大江龍之助)’라 하였으니, 그 둘째다.

 

마지막이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로 이름을 바꾼 주요한이다. 바꾼 이름 고이치는 일제의 황도(皇道)정신인 ‘팔굉일우(八紘一宇)’*를 딴 것이니 그는 확실히 ‘덴노헤이카(天皇陛下)의 적자(嫡子)’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일본 천황제 파시즘의 핵심 사상으로,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구호.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

 

주요한은 평양 출신으로, 연극인 주영섭과 단편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작가 주요섭의 형이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19년에 문예 동인지 『창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그 창간호에 산문시 「불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불놀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 자유시로 알려져 있다.

▲ 1993년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공원에 세워진 주요한 시비. 시 「빗소리」가 새겨져 있다. 뒤의 건물은 외교부 청사다.

주요한이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 건 이후다. 1919년에 그는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의 편집을 맡았고, 1924년부터 1936년까지 문예지 『조선문단』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에는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펴냈다.

 

1926년 흥사단의 국내 조직 수양동우회의 실질적 기관지인 『동광(東光)』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1930년대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하였으며, 1937년경에는 친일 실업인 박흥식이 설립한 주식회사 화신(和信)에서 중역으로 일하였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등에 의해 결성된 교육, 계몽, 사회운동 단체다. 그러나 식민 통치가 길어지면서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시점에 일본 제국이 일으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와해되었다. 이는 본격적인 전쟁 체제를 조성하기 위해 양심적 지식인과 부르주아 집단을 포섭할 필요가 있던 일제가 수양동우회를 표적 수사한 사건이었다.

 

서울, 평안도, 황해도 등의 지역에서 모두 181명의 수양동우회 회원 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가운데 41명이 기소되었다가 1941년에야 무죄 석방되었는데, 검거된 회원들은 강제로 전향한 뒤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다. 작곡가 홍난파가 그 대표적 인물이며, 중심인물이던 이광수와 주요한도 이후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7년 종로경찰서에 검거된 주요한은 이듬해 11월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 보석 출소 기간 중에 전향을 선언하고 조선신궁을 참배하였다.

 

같은 해 12월 경성부민관 강당에서 열린 전향자 중심의 좌담회인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하여 “이 비상시에 있어서 우리는 일본이 승리를 얻어야 하겠다는 입장에서 황군의 필승을 위한 총후의 적성 (赤誠)에 전력을 바쳐야 할 것”(『삼천리』 1939년 1월호)이라고 말하였다. 같은 달 주요한은 수양동우회를 대표해서 종로경찰서에 국방헌금 4천 원을 헌납하였다.

 

이후 주요한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친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문인협회, 황도학회, 임전대책협의회* 등 전시 체제기 전쟁 협력 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면서 이른바 ‘총후봉공’에 매진하였다. 내선일체 운동 단체인 국민훈련후원회가 벌인 일본어 보급운동에 참여하고, ‘채권가두유격대’에서 애국채권을 팔고,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의 의용봉공(義勇奉公) 끝에, 그는 1941년 11월 수양동 우회 사건 최종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 1941년 중일전쟁 시국에 대한 협조를 위해 『삼천리』 사장인 김동환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황국신민화 운동을 실천하는 상설 단체. 결성 두 달 만에 비슷한 성격의 단체인 흥아보국단과 합병하여 조선임전보국단을 결성하면서 해체되었다.

 

전쟁 찬양과 죽음 선동, 화려한 총후봉공

▲ 일본 우익들에게는  일본 제국주의와  국가신토 를 상징하는 일종의 성지로 취급되지만, 비판적 입장에서 전범 비호 공간이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것은 주요한이 무죄를 선고받은 지 한 달 뒤였다. 황은에 감읍하였던가. 주요한은 1941년 12월 14일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전선(全鮮)국민대회의 미영 타도 대연설회에서 ‘루스 벨트여 답하라’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루스벨트와 처칠을 방화범, 해적, 어릿광대 등에 빗대면서 “그대들의 악운은 이미 다 되었”고, “반도의 2400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 해방 성전의 용사 되기를 맹서하고 있다”(『신시대』 1942년 1월호)며 불을 뿜었다.

 

1942년 5월에 일본이 1944년부터 ‘조선인 징병제도’를 시행하기로 하자,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징병제도 대연설회에서 ‘새로운 각오’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무적 황군의 일(一) 분자’가 됨을 욕되게 아니하려면 “① 국체(國體)에 철저하여라. ②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 이상을 깨달아라. ③ 충절을 다하라. ④ 사생(死生)을 초월하라. ⑤ 곤 고(困苦)를 견디어라”(『대동아』 1942년 7월호)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대회에서 시를 낭독하고, 《매일신보》의 ‘반도개병가(半島皆兵歌)’ 현상 모집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미귀(米鬼)의 잔학성을 폭로한다’라는 주제의 라디오 좌담회에 참석하고, 해군지원병제 실시 기념으로 열린 미영 격멸 대 강연회에서 강연하는 등 주요한은 다방면으로 일제에 협력하느라 바빴다.

 

1944년께 주식회사 화신이 안양에 비행기공장을 짓는 데 관여하여 해방될 때까지 이 공장의 운영을 책임졌다. 같은 해 2월 종로경찰서가 주도한 황민화운동 단체에 참여해 ‘총후보국’에 앞장섰다. 3월 기 존의 조선문인보국회 기관지에서 보국회 시부회(詩部會) 기관지로 바 뀐 『국민시가』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런 친일 활동과 함께 일제에 협력하는 글쓰기도 나날이 무르익었다. 1940년 『조광』 9월호에 시조 「여객기」를 발표하면서 시작한 친일 글쓰기는, 일제의 침략전쟁이 확대되면서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태 평양전쟁 찬양으로 이어졌다.

 

12월 여드렛날 네 위에 피와 불이 비 오듯 나릴 때

동아 해방의 깃발은 날리고 정의의 칼은 번듯거림을 네 보았으리라

이날 적국의 군함, 침몰 된 자 기함(旗艦) ‘아리조나’를 위시해서

‘오클라호마’와 ‘웨스트버지니아’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깨어져서 다시 못 쓰게 된 자도 네 척, 이름 좋은 진주만은 비참한 시체가 되고

횡포한 아메리카 나라의 아세아 함대는 앉은자리에서

반신불수의 병신이 됨을 네 보았으리라

- 「하와이의 섬들아」, 『삼천리』(1942년 1월호)

 

그는 시를 통해서 일제의 싱가포르 점령을 찬양하고, 일제 침략전쟁의 주요 상대국인 영국과 미국을 비난하였다. 또 전력(戰力) 생산을 위하여 ‘총후’의 국민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강조하는 글도 적잖게 썼다.

 

‘총후봉공’을 위해 바삐 뛰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묘사하였다는 시 「정밀(靜謐)」은 부역 시인의 시적 감성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보여 준다. 식민지 백성들이 일제 전시 체제의 일부가 되어 버린 순응적 질 서의 순간을 감각적으로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보고, 듣고 또 전신으로 느꼈다.

소집되어 가는 각모(角帽)

몸뻬의 행진

젊은 여성의 땅을 울리는 보조를

흰 수병복(水兵服)의 소년단

애국반상회의 창기대(槍騎隊)

눈 내린 새벽의 요배식(遙拜式)을

- 「정밀(靜謐)」, 『신시대』(1944년 7월호)

「싱가폴 함락가」, 《매일신보》(1942년 2월 18일자)

▲ 「싱가폴 함락가」, 《매일신보》(1942년 2월 18일자)

문인들의 총후봉공 중 중요한 것은 학병, 지원병, 징병, 징용 등을 선전·선동하는 일이었다. 주요한은 이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지원병 응모 선동에 그치지 않고 조선 청년들에게 지원병이 되어 목숨을 바칠 것을 선동하였는데, 시 「첫 피(最初の血)」가 그 백미다. 지 원병 이인석의 입을 빌려서 그는 천황을 위해 죽자고 선동하였다.

 

▲ 군복 차림의 이인석 상등병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 205

 

(……)

형아 아우야, 나는 간다.

너보다 앞서

피를 뿌린다.

앞으로 너들의 피가

백으로 천으로

만으로 십만으로

뿌려질 줄을

나는 안다.

군복 차림의 이인석 상등병

「첫 피-지원병 이인석에게 줌」, 『신시대』(1941년 3월호) 206

 

대륙에서

대양에서

넘쳐흐르게 될 줄을

나는 안다.

- 「첫 피-지원병 이인석(李仁錫)에게 줌」, 『신시대』(1941년 3월호)

▲ 「첫 피-지원병 이인석에게 줌」, 『신시대』(1941년 3월호)

젊은 여성은 간호부로, 청년은 가미카제로

 

선동은 여성들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시 「댕기(タンギ)」(『국민문학』 1941년 11월호)에서 “까만 댕기에 하이얀 간호복 입고 / 저도 나라를 위해 있는 힘 다 바치겠어요”라며, 젊은 여성들에게도 간호부로서 전쟁에 참여하라고 독려하였다.

 

주요한은 ‘가미카제(神風)’로 출전하는 조선 청년을 숭고하게 묘사 함으로써 조선 청년들에게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길 요구하였다. 1944년 5월호 『방송지우』에 발표한 산문 「구단(九段)의 꽃」에서 조선 의 지원병, 학병, 여자정신대 등을 ‘구단’에 만발한 ‘젊은 사쿠라꽃’에 비유한 것이다. ‘구단’이란 도쿄의 ‘야스쿠니(靖國)신사’가 있는 곳이니, ‘천황폐하’를 위해 죽어서 신사에 모셔지는 ‘신(神)’이 되라는 것이 었다.

▲ 「전 국민이 육탄으로」, 《매일신보》(1945년 5월 25일자)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주요한은 마침내 폭뢰로 자살공격을 감행한 조선인 병사를 기리며 이를 따르자고 선동하기에 이른다. 1945 년 1월 30일 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파갑폭뢰(破甲爆雷)–박촌(朴村) 상등병에게 드림」에서다.

 

전쟁 말기에 이들 친일 부역 문인들의 정신 상태가 온전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글쎄다. 워낙 자기 정당화나 합리화에 능숙한 이들이 문인이고, 그걸 통해 자기 최면에 가까운 확신에 이르기도 하니, 이 또 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지 모른다.

 

최후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패전하였고 조선은 해방되었다. 그 화려한 배덕(背德)의 시대를 건넌 이들로서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마땅했다. 천황과 전쟁을 찬양하다가 그것이 좌절되었으니 흠모해 마지않는 일본식으로 할복하든가, 아니면 민족을 향해 석고대죄라도 해야 옳건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부가 수립되었고, 친일파들은 다시 지도자로 소환되어 정국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해방,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주요한은 1949년 4월 28일 반민법 제4조 제10항, 제11항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 산하 특수경찰대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나는 것으로 친일의 단죄에서 벗어났다. 그는 주로 기업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국민 신문》 편집국장을 지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참여하였다. 흥사단 기관지 『새벽』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이후 주요한은 많은 친일 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나라의 주류로 살아갔다. 1958년 민의원으로 당선하였고, 1960년 민주당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1970년에는 공기업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내면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0년대 들어서는 세종대왕, 도산 안창호, 안중근 등의 각종 기념 사업회 일에 관여하였다. 도산과 안중근 의사 같은 분들의 기념사업이 이러한 극렬 친일 인사들에 의해서 추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해방 후 식민지 역사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만년에도 전경련 부회장 등 주요 경제단체의 간부를 역임하였다. 주요한은 1979년 11월 17일에 사망하여, 전국 실업인장으로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이 훈장의 훈격은 1등급이다. 일제의 감옥에서 순국한 시인 이육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것은 해방 45년 만인 1990년이었다. 육사에게 추서된 애국장의 훈격은 4등급이었다. 건국훈장과 국민훈장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전도, 이율배반이 환 기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다.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 역사가 빚어낸 슬픈 자화상이다.

 

 

 

2019.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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