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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18년 된 세탁기, ‘고장 타령’ 끝에 떠나보냈다

by 낮달2018 2026. 8. 6.

2008년에 만든 엘지 드럼세탁기, 마침내 바꾸다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그간 세탁기도 발전을 거듭해 왔다. 우리는 2008년에 드럼세탁기 전시품을 좀 싸게 사서 18년 동안 썼다.

집안의 전자제품이 한 브랜드로 치우친 까닭

 

집안의 모든 전자제품이 엘지(LG)전자 거로 바뀐 건 그 품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2000년 초반까지 ‘삼성 물건 안 쓰고 살기’를 꾸준히 이어와서다. 전자제품의 품질로 말하자면, 엘지나 삼성이나 그 우열을 함부로 가릴 수 없다는 건 아이들도 아는 일 아닌가. [관련 글 : 삼성물건 안 쓰고 살기]

 

이른바 ‘재벌’로 성장해 온 우리나라의 대기업마다 거친 흑역사야,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는지 모른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고도 30년 가까이 지나면서 이들 기업도 그 흠결을 조금씩 털어냈다. 노조를 인정하고, 반도체 직업병(백혈병)에 대한 공식 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지는 등의 진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걸 이루어내는 데도 얼마나 많은 희생이 빚어졌던가. [관련 글 : 한국 노동자 최초 앰네스티 양심수김성환 삼성 일반노조 위원장 떠나다]

 

어느 날부턴가 더는 그걸 고집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삼성의 변화 때문이라기보다 나이 탓이다. 어떤 마음들, 이를테면 분노와 증오 같은 감정들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건 노화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끈질긴 권유에 마음을 열어 카드 한 장을 만들었는데, 정작 그걸 쓸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가끔은 그게 쓰이기도 한다.

 

삼성 물건을 쓰지 않게 되면서 우리 집에는 엘지 일색이 되었는데, 어쨌든 혁신보다는 한 우물을 파온 엘지의 기업 브랜드 가치를 신뢰하게 된 것이다. 2012년 벽두에 이 도시로 옮겨오면서 바꾼 게 텔레비전과 냉장고다. 벌써 14년째인데, 텔레비전은 두어 차례 소모품을 갈았지만, 냉장고는 ‘무탈’했다.

▲ 18년 전 물건이라 제대로 된 이미지도 남아 있지 않다.

18년째 써온 세탁기가 말썽이어서 교체키로

 

에어컨과 세탁기는 이사 오기 전에 안동에서 마련했다. 아마 20년쯤 되었으리라 나는 짐작만 하고 있었다. 에어컨은 사실상, 여기 와서 제대로 쓰기 시작했고, 여름 한 철만 쓰는 물건이라 묵은 햇수가 문제가 아니었지만, 세탁기나 냉장고는 사시사철 돌리는 물건인지라 아내는 그간 아슬아슬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농반진반으로 글쎄, 갈 때가 되었는데, 아직 고장이 나지 않아서라고 얼버무리는데, 아이들은 고장 날 일은 없을 거라고 거들었다. 글쎄, 과장이겠지만, 엘지는 고장이 나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돼서 바꾼다는 얘기가 전설로 떠돌지 않는가 말이다.

 

말이 씨가 되었는가, 어느 날부터 세탁기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가끔 잘 돌던 세탁기가 서더니, 액정의 자물쇠 표시가 번쩍이고, 문조차 열리지 않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인터넷 검색으로 비상조치를 해서 넘겼는데, 어느 날 하나씩 점검해 보니, 배수펌프가 고장이라는 걸 알았다. 똑똑한 에이아이(AI)에 물어보니, 부품을 갈면 십만 원 전후가 들리라고 알려주었다.

▲ 18년 동안 사용한 우리 세탁기 옆구리에 붙은 제조년월일. 2008년 4월이 선명하다.

어쨌든 내년에는 바꾸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좀 난감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대다가 10만 원 이상을 들여서 고치는 건 미봉책일 뿐이라고 여기고 갈기로 했다. 주문한 세탁기가 도착하는 날, 미리 헌 세탁기를 꺼내면서 확인해 보니 2008년 4월에 제조한 것이라 적혀 있었다.

 

집안 내력이 ‘골동품 공화국’

 

20년쯤 될 거로 봤더니, 18년이다. 오래도 썼네, 하고 아내와 나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적어도 우리 집에선 무슨 물건이든 10년쯤 쓰는 건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아내가 우리 집을 일러 ‘골동품 공화국’이라고 했겠는가 말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 쓴 물건으로는 2008년에 21년이나 쓰다가 버린 선풍기가 있다.

 

초임 시절인 1987년 경주 지방에서 샀던 선풍긴데, 회전과 타이머 기능을 잃었고, 속도조차 잃어버리기 시작한 놈이었는데, 서비스 센터에는 워낙 오래되어서 부품도 단종이라고 했다. 딸애가 언제 산 거냐고 해서 가늠해 보니 1987년이라고 했더니, 아이는 “맙소사 21년이에요!”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관련 글 : 맙소사, 이건 우리 집 내력이네요.”]

▲ 우리 집에서 오랜 세월 쓰다가 버린 것으로는 선풍기, 다리미, 전자레인지, 그리고 나와 딸애가 쓴 책상이 있다.

그뿐이 아니다. 아내가 시집오면서 사 온 다리미는 17년이나 쓰고 버렸다. 코드의 헝겊 피복이 다 벗겨진 걸 나는 굵다란 전선을 사서 갈아주기도 했는데, 그걸 버리고 새로 스팀다리미를 사 쓰면서 아내가 내지른 탄식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렇게 좋은 세상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 밖에도 전자레인지, 흑백 텔레비전, 가스레인지 등을 우리는 15년 전후까지 썼다. 여기 와서 간 27인치 브라운관 텔레비전은 15년이나 썼다. 십 년이 넘게 물건을 써 온 건 우리가 무슨 대단한 내핍 생활을 해서도, 절약이나 물건 오래 쓰기 같은 걸 의식해서도 아니다.

 

15년, 20년…, 고장 날 때까지 쓴다 

 

세월이 좋아서 가전제품이 고장이 나서 못 쓰는 경우는 드물 만큼 품질이 좋아졌고, 쓰는 데 지장이 없으니 내처 써 온 것일 뿐이다. 또 그렇게 오래도록 물건을 쓰면서도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탓도 있겠다. 좀 기능이 떨어지거나 낡아서 외관이 곱지 않은 것쯤에 무심한 탓이기도 하다. 사소한 불편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만큼 우리는 무디다. 생래의 촌사람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선풍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마저 하면 이렇다. 우리 집에는 선풍기를 방방이 그리고 거실과 주방에도 한 대씩 쓰니 모두 다섯 대다. 그런데 올해 새 선풍기 두 대를 샀다. 한 대는 지난해 목이 부러져 고치려 했더니 단종된 놈이라 부품이 없다고 하여 버린 걸 대체하느라고 산 거였다. 올해도 창고에서 선풍기를 꺼냈더니 또 한 대가 높이 조절하는 부품 쪽이 부러져서 역시 서비스 센터에 갔더니 단종된 물건이라 부품이 없다고 해서였다.

 

요즘은 선풍기도 리모컨이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냥 기본 기능이 있는 물건으로 두 대를 샀다. 어차피 그런 기능을 제대로 쓰지도 않을 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여기 온 지 14년 째니, 못 쓰게 된 선풍기 두 대의 나이는 최소한이라도 14년이 넘었던 셈이다.

▲ 올해 우리가 산 선풍기. 가장 기본적인 기능만 있는 물건이다.

전자제품은 아니지만, 가장 오래 쓴 물건이라면 초임 시절인 1984년에 산 원목 책상이다. 내가 쓰다가 딸애에게 물려주어 아이는 그 책상에서 공부하며 중고교와 대학을 나왔다. 2018년, 어느 날 아이는 그걸 버려야 할 것 같다고 말했고, 나는 그래, 오래 썼다, 하고 무심히 말해주었는데 순간 마음 한쪽이 서늘해졌었다.

 

원목 책상은 34년을 썼다

 

그 책상은 초임 시절에 단칸살림 시절에 산 거였다. 그리고 그것은 고향 가까이 학교를 옮겨오고, 거기서 쫓겨난 뒤 해마다 이사를 하고, 5년 후 경북 북부지방의 시골 학교로 복직하고, 다시 몇 학교를 거쳐 2016년 퇴직하고도 이태를 더 가족과 함께한 거였다. 자그마치 34년 동안이나 말이다. [관련 글 : 자그마치 34, 쓸모를 다한 너를 보내며]

 

그리고, 이제 세탁기였다. 새삼스러운 감상은 없었다. 그간 잘 버텨주어서 오래 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여길 뿐이었다. 세탁기를 가져온 인부들이 헌 물건을 빼고, 새 물건을 새로 놓는 데 걸리는 시간은 채 30분이 되지 않았다. 우리 집 뒷 베란다의 보일러 앞에 큼직하고 훨씬 세련된 모양의 백색 세탁기가 빨간 세탁기 자리를 차지했다.

 

아마, 이 세탁기는 우리 내외가 죽을 때까지 쓰게 될 것이다. 14년을 넘기게 된 냉장고는 내년쯤 바꾸지 않으면 안 될지 모른다. 쓸 수 있는 데까진 쓰고, 그게 안 되면 새 물건을 들이는 우리 집의 전자제품 장만의 방식을 충실히 따르면 충분할 일이다. 아주 최신식 제품이 아니라도, 우리가 쓰던 얼마간 묵은 물건의 기능보다는 분명 나을 것이니, 그걸 알뜰히 쓰기만 해도 될 것이다.

 

“너무 좋아. 아주 쌩쌩 잘 돌아가는 데다가, 세탁도 금방 되네.”

 

아내는 새 세탁기가 주는 편리에 감복하여 아주 즐거워한다. 나도 그 즐거움에 기꺼이 동참하면서 수십 일째 계속되는 폭염 속에서 이 여름을 나고 있다.

 

 

2026. 8.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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