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넘게 함께 산 딸이 독립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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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애가 지난달 하순에 집을 떠났다. 물론 ‘출가(出嫁)’는 아니고, ‘출가(出家)’는 더더구나 아니다. 아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불혹을 넘긴 나이니 물론 독립적인 삶을 개척하는 게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런데도 40년 넘게 의식주를 같이하던 부모를 두고 집을 떠났으니, 그게 그냥 심상한 일만은 아니다.
사십 년 넘게 함께 산 딸애가 독립하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우리 내외의 딸로 와서 함께 건넌 세월이 40년을 훌쩍 넘었다. 진부한 표현으로 그동안 ‘슬하’를 떠난 것은 15년 전쯤 유럽 쪽으로 어학연수를 하러 간 7개월이 다였다. 그리고 아이는 부모의 집에서 먹고 자고 자라서, 중고교와 대학 공부를 하고, 직장을 얻어 사회생활을 이어왔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성인이 된 자녀를 데리고 사는 건 불편한 점도 적지 않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라, 이른바 ‘과년’한 나이에 부모 밥을 먹고 지내는 게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간 별 마찰 없이 오래 한집에서 살아왔다. 가끔은 이제 독립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채근할 때도 물론 있었지만, 어차피 부모와 자식 간 관계가 사무적인 계약관계는 아니어서 지금까지 같이 살아올 수 있었다.
아이는 집을 사서 독립한 친구의 집에 가보고, 이제 자신도 집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한 듯했다. 그러나, 아예 새로 집을 분양받는 게 아닌, 구축 아파트를 사고 그것을 이른바 ‘리모델링’이라면서 인테리어를 하는 데도 만만찮은 돈이 드니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는 굳이 대출까지 받아서 집을 마련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지은 지 얼마 되느냐보다는 전망이 괜찮은 남향집을 원했다. 그러나 지은 지 10년 전후의 아파트는 대부분 탑상형이어서 내 집이 주변에서 내려다보이는 등 사생활 침해받을 수 있다는 점 등을 불편해했다. 그런 집은 집값은 집값대로 드는 데다가 인테리어 비용도 만만찮았다.
그러다가 우리가 사는 아파트 두 개 층 아래에 집이 하나 났는데 지은 지 20년이 된 걸 빼면, 이 라인은 층고나 전망, 통풍, 남향 등 모든 점이 괜찮았다. 이번에 승강기도 교체해서 앞으로 20년은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거라면서 나는 이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집값이 적당하니 인테리어 비용까지 합해도 10년 넘은 아파트를 사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내 제안을 굳이 강권하지 않았는데, 아이는 이내 마음을 정했다. 무려 한 달 반에 걸친 인테리어 공사를 거쳐 아이는 지난달 하순에 이사했다. 이사라고 하지만, 몇 가지 가구를 승강기로 옮기고, 나머지는 여행용 가방 등에 담아서 옮기니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두 개 층 아래 딸의 집, ‘독립적 삶’을 살되 ‘관계도 유지’되는 거리
아이는 텔레비전을 뺀 나머지 전자제품을 들였는데, 나는 새 냉장고를 사서 들여 주었다. 새로 여러 가지 가재도구를 사 들이느라 한동안 바빴는데, 이사하고 나니 새집은 빛나고 돋보였다. 우리가 지금 집에 이사할 때도 한 달쯤의 수리를 거쳐 들어왔지만, 거기 비기면 아이 집 인테리어는 완전히 새로운 생활양식에 맞춘 최신식이었다.
집에 가 볼 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아주 훌륭한 인테리어였으니 아이는 당연히 무척 흡족해했다. 무엇보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기 힘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게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부모로서도 아이가 제 힘으로 독립해 나가는 걸 우리는 대견하고, 장하게 여겼다. 아이는 집이 좋다고 아주 기뻐하고 행복해 하였는데,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우리 내외의 마음도 행복했다.
제 남동생은 이왕 나가는 거, 가능하면 멀리 가라고 조언했지만, 막상 불과 두 개 층 아래의 같은 라인에 집을 마련하니, 그게 또 최상의 선택이라는 걸 우리는 뒤늦게 알았다. 전화나 문자로 연락만 되면, 우리가 만나는 데 일이 분이면 충분한, 지척에서 살게 되었으니, 서로 독립적인 삶을 살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 거기서 무엇을 바랄 것인가.
가까이 사는 게 서로 불편하다고 느낄 상황이 올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우선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멀리 보내고 오가는 데 적잖은 시간이 든다고 하면 그것도 불편한 일이다. 멀리 가라고 조언했던 아들 녀석은 동만 달라도 오가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을 텐데, 잘됐다고 말해 주었다.
그렇다. 가까이에 있으니 필요하면 도움을 줄 수도, 도움받을 수도 있겠다. 따로 한 살림을 차리는 게 아니라, 홀몸이니 번잡할 일도, 성가실 일도 별로 없을 것이었다. 부모와 자식 사이지만, 우리는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벌써 한 달, 우리는 아주 편하게 오가면서 이웃으로 다시 살고 있다.


딸은, 시집 보내면서 아비가 눈물을 흘린다고 하지만, 아주 가까운 데에 집을 장만해 나가니 그걸 섭섭하게 여길 일은 아니었다. 막상 간다고 했을 땐 마음이 좀 묘해지기도 했으나, 고작 두 개 층 밑으로 가는 걸 서운하게 여길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한 달, 우리는 지금 새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 별식을 마련하면 서로가 청해서 같이 먹기도 하고 봐온 장거리를 나누기도 하는 등, 아주 살갑게 정을 나누며 살고 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이런 기분도 차차 사라지고 제각기 무심해지겠지만 말이다.
‘독립과 해방’을 누리면서 우리는 ‘좋은 이웃’으로 살리라
아이를 보내고 난 뒤, 우리 내외의 생활도 달라졌다. 아이만 독립해 해방을 누리는 건 아니었다. 우리도 아이를 보내고 난 다음, 둘만 남은 이 신혼 아닌 ‘구혼(舊婚)’을 즐기면서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부모님 슬하에서 생활했고, 그 뒤에는 아이들과 줄곧 같이 살았으니, 온전히 부부만의 생활을 따로 갖지 못했다.
아이가 제 짐을 빼서 나가자, 한결 집이 넓어져 가구를 재배치하니 갑갑했던 안방이 여유로워졌다. 서재를 겸한 내 방도 방 한쪽의 행거 옷장을 걷어내니 속이 시원해졌다. 미뤄두었던 거실의 도배를 하고 나니, 한결 집이 깔끔해지고, 불필요한 가구도 아이 방으로 옮기면서 거실도 더 넓어졌다. 또 아이의 방은 화장대를 옮기면서 아내의 방이 되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아내는 자신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여름이면 상의를 벗고 맨몸으로 있는 걸 즐기는 나는 아주 편해졌다. 물론 아이가 있다고 해서 전혀 그러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달리 신경 쓸 게 없어진 것이다. 늙은 부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편하게 대화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여전히 각방을 쓰며 따로 자긴 하지만 말이다.
교회 갔던 아내가 돌아오면서 큰 수박 한 덩이를 사 왔다. 있다가 아이가 산 수박이라 있다가 반쯤 잘라서 줘야 한다면서 아내는 수박을 냉장고에 넣었다. 아이는 가끔 집에 들를 때마다 냉장고를 들여다보고 필요한 식재료를 가져간다. 필요한 게 있으면 아내가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러구러 아주 친근하고 정겨운 이웃이 된 우리 내외와 딸애의 새로운 삶, 생활이 시작되었다. 가족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걸 넘지 말고, 편안하게 가족으로서의 사랑과 배려를 베풀며 사는 걸 배워갈 수 있으면 좋겠다.
2026. 8.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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