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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역사는 평화를 품고, 역사의 기록은 인권을 밝히다”

by 낮달2018 2026. 4. 2.

제주4.3 78돌(1948~2026)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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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에 열리는 4.3희생자 추념식의 포스터(제주도교육청)
▲강요배 작 '하산민', 1989/ 종이에 펜과 먹 / 학고재 소장

2026년은 제주 4·3이 발생한 지 78돌이 되는 해다. 특히 4·3 기록물이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처음 맞는 추념식이다. 이번 4·3의 구호(슬로건)는 “4·3의 역사는 평화를 품고, 역사의 기록은 인권을 밝히다”이다. [관련 글 : 제주 4·3 아카이브’,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

 

제주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국가 폭력에 의한 비극적 역사를 넘어, 민간 차원의 진실 규명과 화해·상생의 노력 등 보편적 인권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서이다. 14,600여 건의 유족 증언과 희생자 기록이 증명한 것은 역사적 진정성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주 4·3 기록물’은 제주 4.3에 대한 기록물로 당시 이해당사자들이 각자 생산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제주 4·3 기록물은 냉전에 대한 지역 차원의 기억을 인류의 역사로 보존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 기록물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탈식민 전환 과정에서 억눌려온 기억을 보존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공산주의와 관련된 낙인 속에 살아온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과거 가해자였던 이들을 포용하고, 제주를 ‘공존의 공동체’로 만들고자 했던 지역 사회의 집단적 노력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기록물은 화해와 회복을 향해 나아간 제주 공동체의 풀뿌리 민주주의 실천을 보여주며, 공동체적 기억과 연대를 통해 형성된 역사적 성취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제주 4·3 기록물’에서

▲ 4.3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기록의 진정성과 역사성 때문이었다.

한때는 잊힌 섬으로 역사에서 가려져 있던 4·3은 2000년 특별법 제정을 시작하여,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2003)되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폭력에 대해 공식 사과’하면서 비로소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했다. 그것은 비극의 우리 현대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그 슬픈 민족사를 극복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관련 글 : <순이 삼촌>은 여전히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이어, 특별법 개정을 통해 4·3 평화재단이 추가 진상조사를 시행하고, 피해자 보상금 지급 등이 이루어지면서 트라우마 치유도 시작되었다. 이러한 회복과 치유를 위한 노력은 제주 4·3 평화공원 조성으로 이루어지고, 4·3평화재단이 설립되어 ‘제주 4·3을 온 국민이 공감하는 대한민국의 역사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되어 왔다.

▲ 제주 4.3의 회복과 치유 과정을 통해서 4.3은 온 국민의 역사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유족들이 오랜 시간 겪은 아픔을 증오 대신 화해와 공존의 메시지로 승화하고자 노력함으로써 4·3은 인류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2025) 4·3 기록물이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이는 인류가 보존해야 할 역사적 가치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올 4·3 78돌 추모식을 앞두고 지난 30일, 이재명 대통령이 제주를 방문하여 4·3 평화공원을 참배하고 유족들과 오찬을 가졌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후 제주특별자치도 한라대 컨벤션센터에서 ‘기술이 성장하고 일상이 문화가 되는 섬 제주’를 주제로 열린 타운홀미팅에 참석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제주 4·3 사건은 대규모 국가 폭력의 첫 출발점 같은 사건이고, 가장 오랫동안 고통 받았던 곳”이라며 “제주 4·3 사건 같은 국가 폭력 범죄가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는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은 공소시효를 폐지해 나치 전범처럼 죽을 때까지 반드시 책임을 묻는 것”이라고 밝혔다.

▲ 강정효 작 ‘질곡의 세월_침묵’.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의 '제주 4·3 특별전'(2018)에 전시되었던 그림이다.

대통령의 “국가 폭력 범죄의 형사 공소시효와 민사 소멸시효 배제법 추진” 약속은 해방 80년을 맞이하는 이때에도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에 대한 국가의 해결 의지를 획기적으로 밝힌 것이다. 분단국가라는 특수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념의 이름으로 자행된 끔찍한 동족 학살의 역사는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80돌을 앞두고 ‘회복과 치유’의 과정을 거치고 있기는 하지만, 제주 4.3은 아직도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름[명(名)]을 바르게[정(正)] 한다’라는 뜻에서 4·3의 정명(正名)은 단순히 ‘과거에 겪은 불행한 사건’을 넘어 제주의 역사적 진실과 희생의 의미를 제대로 이름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여전히 ‘4·3’은 어떤 수식도 없는 ‘4·3’으로, ‘4·3사건’ 등으로 불리고 있을 뿐이다.

 

5월 광주의 시민 항쟁이 어정쩡하게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봉합된 것은 항쟁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각이 엄존하는 현실에 대한 타협이었다. 국가 폭력으로 도민 10%가 희생된 제주의 4·3도 그 역사적 본질에 맞는 ‘항쟁’이라는 이름이 걸맞다. 그러나 아직도 “4·3 사건”이라는 중립적 명칭을 넘지 못하는 이유는 가해와 피해가 공존하는 4·3의 성격 때문이다.

▲ 박경훈 목판화 '통곡'. 4·3의 아픔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의 '제주 4·3 특별전'(2018)에 전시되었다.

78돌을 맞이하고, 화해와 치유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지만, 4·3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관련 기사 :<한겨레> 연재 제주 4·3 육지로 끌려간 4·3 희생자들을 찾아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에는 이승만 정부 당시 계엄령이 선포된 1948~1949년 제주에서 두 차례 열린 군법회의(군사재판)를 통해 민간인 2,530명이 내란죄나 국방경비법 위반죄를 이유로 수감됐다고 나온다.

 

일부 무장대를 제외하면 그들은 대부분 토벌대를 피해 산속에 숨었다가 “내려오면 살려준다”라는 말에 속은 주민들이었다. 민간 법원 재판으로도 약 1,800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제주에는 형무소가 없어 실형을 받은 이들은 육지 형무소로 이송됐다. 이들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중 적어도 1,763명이 복역 중 행방불명됐다. 상당수는 전쟁 발발 직후 ‘좌익 처단’ 명령으로 집단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에 대한 최악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골령골 등이 이들의 유해가 묻힌 곳으로 유력하다.

 

70여 년 만에 뼈가 수습되고 이름까지 찾은 희생자 7명의 유족이 “기적”이라며 기뻐하게 된 배경이다.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나머지 2,493명의 외로운 넋들은 어디를 떠돌까. 한 조각의 뼈라도 찾기를 소망하는 유족들에게 아직도 4·3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관련 글 : 뭍에 있는 안동이 제주 섬의 4·3과 무슨 상관?]

 

제주4·3평화재단 누리집(https://jeju43peace.or.kr/) 펼침 메뉴인 ‘제주4·3’에는 “제주 4·3을 온 국민이 공감하는 대한민국의 역사로”라는 글귀가 걸려 있다. 4·3은 아주 오랜 세월, 제주인들의 금기로 존재해 온 언어였다. 그것은 머나먼 섬나라의 역사에서 마침내 우리 모두의 역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낯설기만, 우리가 제주를, 4·3을 우리의 것으로 품어 안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할까.

 

2026. 4.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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