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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모파상’ 이태준의 옛집, 차향 속 잊힌 작가를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25. 11. 19.

[2025 서울 기행] ③ 성북로26길 8 이태준 옛집 ‘수연산방(壽硯山房)’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이태준의 고택 수연산방은 상허가 1933년에 지어 1946까지 살던 집이다. 지금은 그의 생질녀 딸이 운영하는 전통찻집이 되었다.

이태준의 수연산방, 구인회 동인의 사랑방

 

성북동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을 나와서 점심을 먹고 소설가 상허(尙虛) 이태준(1904~?)의 옛집인 수연산방(壽硯山房)을 찾았다. 애당초 거긴 계획에 없었던 곳이지만, 성북동 문화예술길 안내 지도를 살피다가 발견한 집이었다. ‘문인이 모이는 산속의 작은 집’이라는 뜻의 수연산방은 이태준이 1933년에 지어 1946년까지 살던 집이다. 상허는 여기서 단편 ‘달밤’, ‘돌다리’, 중편 ‘코스모스 피는 정원’, 장편 <왕자 호동>, <황진이> 등 수많은 작품을 써서 발표하였다.

 

1933년 8월, 이태준을 비롯한 김기림·이효석·이종명·김유영·유치진·조용만·정지용·이무영 등 당시 문단의 중견작가 아홉 명은 문학 친목 단체 ‘구인회’를 만들었다. 뒤에 이종명·김유영·이효석이 탈퇴하고 대신 박태원·이상·박팔양이 새로 들어왔으며, 그 뒤 유치진·조용만 대신에 김유정·김환태로 바뀌었으나 회원 수는 9명을 유지했다.

▲ 구인회는 김유영, 이종명 발의로 이태준·김기림·이효석·유치진·조용만·정지용·이무영이 만들었고 이후 여러 차례 구성원이 나가고 들었다.
▲ 성북동 자택 수연산방 앞에서 찍은 1940년대 초 상허 이태준

따라서 이 수연산방이 구인회를 비롯한 일제강점기 문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한 건 당연하다. 이들은 여기서 문학과 삶을 논하며 밤을 지새웠다. 수연산방은 얼핏 전통 한옥같이 보이지만, 사랑채와 안채를 한 건물에 배치한 1900년대 개량 한옥이다.

 

전통 한옥 같은 1900년대 개량 한옥 수연산방

 

두벌 축대 위에 앉힌 본채는 건물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건넌방, 오른쪽에 안방을 두어 ‘ㄱ자’ 형을 이루어 아담하면서도 화려하게 지어졌다. 안방 앞에는 누마루를 달아내고 뒤편에는 부엌과 화장실을 두어서, “공간의 기능을 집약시킨 독특한 구성”(안내문)이다.

▲ 수연산방은 성북구립미술관 옆 골목 초입에 있다. 수연산방 현판을 단 일각문으로 들면 아름다운 개량식 한옥이 나타난다.
▲ 고택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은 전쟁타 불타 없어진 옛 행랑채 '상심루' 대신에 새로 지은 건물에 '구인회'라는 북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 수연산방 곳곳에 세워놓은 2층 비치파라솔 탁자가 놓여 있다. 옛 우물 앞에 '이태준 문학의 산실'이라는 돌비가 세워져 있다.
▲ 수연산방의 본채. 얼핏 전통 한옥같이 보이지만, 사랑채와 안채를 한 건물에 배치한 1900년대 개량 한옥이다.

서재를 겸한 건넌방 방문 위에는 ‘고매한 인품의 노인이 사는 집’이라는 뜻의 현판 ‘기영세가(耆英世家)’를 달았다. 앞에는 건넌방보다 바닥을 높인 툇마루를 두고 거기 ‘아(亞)’자 난간을 둘렀다. 오른쪽 안방 문 위에는 ‘대숲을 빗겨 졸졸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책 읽는 집’이라는 뜻의 현판 ‘죽간서옥(竹澗書屋)’을 걸었다.

 

수연산방의 압권은 안방에 달아낸 누마루인 ‘문향루(聞香樓)’다. ‘향기를 듣는 다락방’이라는 뜻인데 아자 난간을 두른, 안방보다 바닥을 성큼 높인 누마루를 튼실한 사각 돌기둥으로 받쳤다. 누마루의 전망을 고려한 걸까, 양쪽 추녀는 평균보다 훨씬 가파른 각도로 휘어진 듯 날렵했다. 그 누마루에서 감상하는 앞뜰 풍경은 어땠을까.

▲ 정면 맨 왼쪽이 서재겸 건넌방, 오른쪽은 안방인데 각각 '기영세가', '죽간서옥' 현판이 걸렸다. 중앙은 '수연산방' 현판이다.
▲ 안방에 달아낸 누마루. '문향루. 돌기둥을 받친 아자 난간을 두른 누마루에는 유리문을 달았다.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완성자’,  ‘시에는 정지용, 문장에는 이태준’

 

이태준은 1925년 ‘오몽녀’로 등단한 이래, “일제강점기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 아래 작품을 썼으며, 간결하고 호소력 짙은 묘사적 문장”(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은 작가다. 그는 ‘조선의 모파상’ 또는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완성자’, ‘시에는 정지용, 문장에는 이태준’으로 불리었던 뛰어난 작가였다.

 

그러나 1946년 월북한 이래 그는 한국 문학사에서 지워졌다. 1980년대 초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할 때 우리는 모든 교재에서 그의 이름을 복자(伏字)로 배웠다. 박정희 이래 반공주의는 북으로 간 빨갱이 문인을 용납할 수 없었고, 모든 출판물에서 이들이 이름 가운데 한 글자를 ‘○’, ‘×’ 따위로 써 가린 것이었다. 이들 월북 문인이 해금된 것은 1988년이 되어서였다. 그나마 홍명희·이기영·한설야·조영출·백인준 등 5명은 이 해금에서도 제외되었었다.

 

그러나 이태준을 ‘이○준’으로 배운 나는 중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면서 이들의 문학을 새롭게 가르칠 수 있었다. 이태준의 단편소설 가운데, ‘돌다리’, ‘달밤’, ‘복덕방’ 따위가 문학 교과서에 실렸으며, 그의 다른 작품들도 부교재에 실리곤 해서 모의고사 등에 출제 지문으로 쓰이곤 했기 때문이다.

▲ 이태준이 편집자 겸 신인 작품의 심사를 맡은 <문장(文章)>지와 <문장강화>(1940)를 창비에서 새로 펴낸 책.
▲ 이태준의 소설집 <복덕방>, <달밤>, <돌다리>, <해방전후>,그리고 수필집 <무서록>, <소련기행>
▲ 2024년 열화당에서 총 13권 분량의 <상허 이태준 전집> 중 1차분 4권을 펴냈다.

단편 ‘달밤’(1933)은 세상사에 적응하지 못하여 ‘반편’이나 ‘노랑 수건’으로 불리는 주인공 황수건의 순박하고 우매한 삶을 묘사하는데, 화자인 ‘나’가 겪은 그의 모습을 통하여 각박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소외된 존재에 대한 연민과 인간애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달빛 아래에서 술에 취해 유행가를 부르는 황수건의 마지막 모습으로 끝나는 소설의 결말에서 드러나는 비극성과 서정성은 한국 단편소설의 예술적 성취로 평가되기도 한다.

 

단편소설 ‘복덕방’(1937)도 1930년대 서울 외곽을 배경으로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옛 지식인들의 궁핍한 삶과 세대 간의 갈등을 촘촘한 서사를 통해 드러내는 작품이다. 특히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현실에서 가중되는 인간 소외와 가치관의 붕괴를 비판하며,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당대의 암울한 사회상을 보여주는 탁월한 단편으로 기려진다.

▲ 월북 직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태준의 모습.

강원도 철원(鐵原)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보를 나와 일본 조치[上智]대학에 수학하였으며, 《시대일보(時代日報)》에 《오몽녀(五夢女)》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였고, 이후 이화여전 강사,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학예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가마귀》 《달밤》 《복덕방》 등의 단편소설은 인물과 성격의 차분한 내관적(內觀的) 묘사로 토착적인 생활을 부각시켜, 완결된 구성법과 함께 한국 현대 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작중 인물들은 회의적·감상적·패배적 성격으로 부각되어 작품 전체가 허무와 서정에 깊이 침윤되었지만, 때로는 그 속에서 현실과 밀착된 시대정신에의 추구를 지향하기도 했다.

 

《문장(文章)》지를 주관하다가 8·15광복 직전 철원에서 칩거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포섭되어 활약하다가 월북하였다. 그의 단편 《해방전후(解放前後)》(1946)에서 이러한 문학적 변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작품에는 앞에 든 것 외에 소설집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딸 삼형제》 《사상(思想)》 《해방전후》 등이 있으며, 문장론 《문장강화(文章講話)》가 있다.

 

     - 상허학회(https://www.sanghur.net/taejooon) ‘상허 이태준’ 전문

 

한국 단편소설의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린 작가

 

“인물이 살아야 작품이 산다”라고 믿었던 이태준은 “현장성을 바탕으로 한 정확한 인물 묘사를 통한 성격 표현”(정춘근, <상허 이태준 평설>)에 주력했고, 결국 빼어난 인물과 구성, 정확한 문장으로 한국 단편소설의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는 단편집 <가마귀> 서문에서 “내 생활에 다소 가치가 있었다면 그 가치의 화폐가 곧 이 단편집이라 하여도 마땅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추구가 일정한 성취에 이르렀음을 자부하고 있었다.

 

그의 소설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1933년부터 10여 년 동안에는 그의 연재 소설이 실리지 않은 신문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그는 성북동에 수연산방을 짓고 골동품 수집 취미까지 즐길 만큼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1933년 9인의 젊은 작가들이 구성한 ‘구인회’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1925) 쪽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야 했다. 일제가 중일전쟁(1937) 이후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식인들에게 침략 전쟁을 지원하는 각종 강연에 동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1941년 평양 대강연회에 끌려 나왔을 때도 유일하게 조선말로 연설하고 일왕 찬양 대신 춘향전 한 구절을 읽고 내려오는 형식이었다. 1943년 철원으로 낙향해 절필하고자 했던 그는 결국 막판에는 일문 소설 한 편(제1호 선박의 삽화, <국민총력>, 1944.9.)을 쓰고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되자, 이태준은 임화 등 카프 쪽 인사들과 어울려 정치에 뛰어들었다. 이 놀라운 반전은 그가 “순수문학을 추구했지만, 내면으로는 세상을 바꾸려는 사회 개혁적 취향”이어서였다고 정춘근은 설명한다. 결국 그는 1946년 월북했고, 1947년에는 소련을 여행하고 <쏘련 기행>을 출판하기도 했다. [관련 글 : 성장통과 혁명의 시대, 그리고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

 

월북, 그리고 숙청에 이르는 그의 인생유전


그러나 그의 봄날은 짧았다. 그는 1956년 소련파의 몰락과 더불어 과거 ‘구인회’ 활동과 사상성을 이유로 1임화, 김남천과 함께 가혹한 비판을 받았고, 한설야에 의해 비판, 숙청당했다. 그 후, 그는 함흥노동신문사 교정원과 고철 수집 노동자를 전전하다가 일시 복권되기도 했지만, 결국 1969년께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병사했다고 전한다.

 

수연산방은 1999년에 이태준 큰누나의 외손녀 조상명이 고택을 개방하고 수연산방을 상호로 쓰는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태준에게 누이동생 두 명이 있을 뿐 누나가 있었다는 자료는 따로 찾지 못했다. 누나든 동생이든 그 외손녀라면 이태준에겐 생질녀의 딸이다.

 

* ‘생질녀’의 딸을 일러 <위키백과>에선 ‘생외손녀(甥外孫女)’라고 썼고, <나무위키>에선 ‘외종손녀’라고 썼다. 그런데 이런 호칭은 <표준국어대사전>은 물론 <다음 한국어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다. ‘누이의 아들’은 생질, ‘딸’은 ‘생질녀(甥姪女)’라고 한다. 그런데 그 생질녀가 낳은 딸은 누이에게는 외손녀지만, ‘나’와의 관계를 이르는 호칭은 따로 없다. ‘외종(外從)’은 외사촌이지, 누이의 외손녀를 이르는 데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다.

▲ 수연산방의 마당. 마당에는 감나무, 사철나무, 주목, 단풍나무, 배롱나무 등 나무들이 빽빽했다. 사람들은 모두 찻집 손님들이다.
▲ 누마루인 문향루 앞은 장독대와 담장인데, 이층 파라솔 탁자가 놓였고 거기에서도 손님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 행랑채 자리에 새로 지은 집은 '구인회' 이름을 딴 북카페로 운영되고 있었다.
▲ 안방의 풍경. 예스러운 분위기의 가구와 소품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 문갑 위의 도자기,잣송이 등과 육각형의 커다란 거울, 재통틀 등이 그대로 비치해 놓았다.

평일 오후인데도 전통찻집 수연산방은 북적댔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본채가 나타나고, 왼쪽에는 원래 행랑채 ‘상심루(賞心樓)’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고, 그 자리엔 새로 지은 건물에 문학 동인의 이름을 딴 ‘구인회(九人會)’라는 북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본채와 북카페는 물론 서재 앞 툇마루와 누마루 앞의 마당에도 2층 비치파라솔 탁자에 손님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정원을 빽빽하게 메운 감나무, 사철나무, 단풍나무, 배롱나무, 주목 같은 나무 사이로 손님들은 10월 말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자리 나기를 기다려야 하나 했는데 다행히 본채 대청마루에 들어가 앉을 수 있었다.

 

대청마루에는 예스러운 분위기의 가구와 소품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서까래가 드러난 천장, 한지를 바른 벽, 이태준 일가의 가족사진, 커다란 8각 거울, 재봉틀, 문갑과 도자기들, 책과 액자 등 마치 가게가 아니라, 마치 여염집처럼 보이게 해 주었다.

▲ 안방벽에 걸린 액자 속의 이태준 가족들. 부인과 2남 3년의아이들이 함께 찍었다.

찻집에서는 여느 전통찻집처럼 대추차, 생강차, 모과차, 송차, 인절미 등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찻값이 꽤 비쌌다. 제일 싼 게 13,500원짜리 차가 제일 쌀 정도였지만, 우리는 모두 한 잔씩을 주문해 마셨다. 사람들은 연신 들고나는데, 이용 시간이 2시간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 주 근무를 마치고 오후에 서울역에 닿을 딸애 마중을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자리를 비우고 산방을 나섰다.

 

원래 계획은 최순우 옛집을 찾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빠듯해서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여기를 찾게 되면 김광섭과 조지훈의 자취를 찾아보는 일도 좋고, 가지 못한 길상사도 들를 수 있을 터. 도심 속에서도 걷고 머물 수 있는 동네라는 성북동을 우리는 아쉬워하며 떠났다.

▲ 고향인 강원도 청원군 철원읍 대마리 두루미평화관의 세워진 '상허이태준문학비'와 이태준 흉상. ⓒ 중앙일보 사진

 

2025. 11. 19.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용출, 생생한 인물·정확한 문장한국 단편소설의 정수를 만나다, 세계일보, 2024.2.6.

· 이영수, 문인들이 모인 산속의 집, 성북구 상허 이태준 가옥, 지역 N 문화, 한국문화원연합회

· 김창효, 새롭게 만나는 월북 작가 이태준, 경향신문, 2019.1.31.

· 안창현, 조선말을 사랑한 선비 작가 이태준, 한겨레신문, 2019.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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