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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萬海)의 돌집(총독부) 등진 북향집, 심우장(尋牛莊)

by 낮달2018 2025. 11. 17.

[2025 서울 기행] ②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9길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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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만해가 벽산 스님으로부터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 방응모 등의 도움을 받아 지은 북향집 심우장. 국가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오래 별렀지만, 마침내 올가을에야 간송미술관을 찾게 되었었다. 서울에 간다니 유적을 찾는 눈 밝은 동무 장(張)이 가는 길에 만해의 심우장과 최순우 고택 등을 들러보라고 했다. 그러잖아도 들러볼 작정이었는데 간송미술관에서 나와 지도를 살펴보니 곳곳에 명소들이 흩어져 있었다.
 
성북동 문화예술길의 심우장
 
간송미술관 앞으로 이어진 문화예술길 여기저기에 명소를 훑어본 뒤 우리는 바로 심우장을 찾았다. 심우장은 만해가 1933년 도반인 벽산 스님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의 방응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
 
총 112.99평의 대지 위에 건평 17.8평 규모로 지은 단층 팔작집인데, 특이한 것은 흔치 않은 북향집이라는 점이다. 이는 “남향하면 바로 돌집(총독부)을 바라보는 게 될 터이니 차라리 볕이 좀 덜 들고 여름에 덥더라도 북향으로 집을 지으라.”라고 한 만해의 뜻에 따른 것인데, 집은 정북향은 아니고 동북향이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 당시 만해는 선언서의 작성에도 참여했다. 최린의 천거로 최남선은 “일생을 학자로 마칠 생각이라 독립운동의 표면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선언서는 작성하겠다.”라며 초고를 썼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만해는 ‘독립운동에 책임을 질 수 없는 사람이 선언서를 작성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며 자신이 쓰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미 원고가 작성된 뒤여서 만해는 ‘공약 3장’만 추가하는 데 그쳤다.

▲ 만해가 쓴 기미독립선언서 뒤에 붙은 공약 삼장. 맨 아래는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이다.

만해는 3월1일 경성 명월관 지점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한 후 일경에게 체포됐다. 투옥될 때는 변호사·사식·보석을 거부할 것 등 투쟁 3대 원칙을 실천했고, 7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大要)’(속칭 조선 독립의 서)를 기초하여 제출했다.
 
민족 대표 중 최고형인 3년형 선고 받아 복역
 
1920년 10월, 경성복심법원은 만해를 비롯하여 손병희·최린·권동진·오세창·이종일·이인환(이승훈)·함태영 등 8인에게 기소된 민족 대표 48인(선언서에 서명한 33인 + 3·1운동 기획과 실행에 참여한 15명) 가운데 최고형인 3년 형을 선고받았다. 3·1운동을 회개하는 참회서를 써내면 사면해 주겠다는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만해는 1921년 12월 함태영,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김창준 등과 함께 가출옥할 때까지 복역했다.
 
이후, 법보회와 조선불교청년회 등에서 활동하던 만해는 1926년 5월 시집 <님의 침묵>을 펴내고, 6·10만세운동 예비검속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1927년에는 신간회 조직에 참여했고, 1930년에는 청년 승려 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1932년 만해는 월간 <불교> 지의 ‘불교계 대표 인물 선정’에서 압도적인 절대다수로 1위를 차지했다. 그는 54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심우장을 지어 성북동에 칩거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 성북동 심우장 아래의 만해공원에 조성되어 있는 만해의 동상.
▲ 성북동 길가에 조성된 만해 공원. 벤치에 앉은 만해의 동상과 '님의 침묵'을 새긴 시비가 나란히 서 있다.

‘심우(尋牛)’는 수행자가 수행으로 본성을 깨닫는 10단계의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만해는 성북동 산골짜기 심우장에서 ‘소, 즉 본성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심우’를 수행하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성북동 주택가는 낡고 오래된 주택들과 좁은 길 등으로 묵은 세월의 켜가 낀 듯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고즈넉하고 무언가 만만찮은 여운을 지닌 듯 보였다. 심우장으로 가는 오르막길 아래 도롯가에 조성된 만해공원에는 만해의 동상과 ‘님의 침묵’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재개발로 더러는 폐쇄된 낡고 오래된 집들이 이어진 좁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 심우장이 나타났다. 하얗게 칠한 시멘트 대문간에 잠긴 검정 철 대문과 작은 출입문 사이에 ‘尋牛莊(심우장)’ 현판이 걸려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마당 왼쪽에 정면 4칸 측면 2칸, 가운데 대청을 두고 좌우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한 단정한 기와집이 나타났다.

▲ 성북동 만해공원 뒤쪽의 언덕길을 오르면 재개발로 폐쇄된 집들 가운데 하얀 대문간에 검은 철 대문을 단 심우장이 나타난다.
▲ 만해가 돌집(총독부 건물)을 바라보 않으려고 동북향으로 지은 심우장. 왼쪽 사랑방 문 위에 현판이 걸려 있다.

서재로 쓰던 왼쪽 방 문틀 위에는 ‘尋牛莊(심우장)’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서예가 오세창이 쓴 것이라 알려져 있다. ‘심우장(尋牛莊)’은 직역하면 ‘소를 찾는 집’이 된다. 이는 만해의 필명 중 ‘소를 키우는 사람’이란 뜻인 ‘목부(牧夫)’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대문 맞은편은 관리실로 쓰는 임시 건물이 있고, 그 외벽에 만해가 쓴 시조 ‘심우장’이 씌어 있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 만일 잃을 씨 분명하다면 찾은들 지닐쏘냐 /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어쩌면, 애당초 만해는 ‘잃을 소’도, ‘찾을 소’도 없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는지 모른다.
 
집안에는 대문간 안 왼쪽 담장 앞에 똬리 틀 듯 구부정한 소나무 한 그루와 심우장 맞은편 담 아래에 서 있는 향나무가 한 그루씩 있다. 둘 다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되었는데, 소나무는 110년, 향나무는 100년(2024년 기준)의 나이를 먹은 고목이다.

▲ 심우장 마당에 성북구가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한 100년 수령의 향나무.
▲ 심우장 대문을 들어서면 110년 수령의 소나무가 방문객을 맞는다.
▲ 심우장 사랑방에는 만해의초상과 함께 만해가 쓴 글씨가 표구로 걸려 있다. 뒤란으로 난 문으로 산국이 활짝 피어 있다.
▲ 대청마루 뒤편의 방에는 만해의 친필 액자와 편액 등이 걸려 있다.
▲ 만해의 친필 편액. 오른쪽은 '오도송', 왼쪽은 '마저절위'다.
▲ 사랑방 뒷문 양옆으로는 한시 '선방 뒤뜰에 올라'(오른쪽), '향로암 야경' 액자가 걸려있다.
▲ 대문 맞은편 담장 앞에 관리실을 둔 임시 건물의 외벽에는 만해가 쓴 시조 '심우장'이 씌어 있었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1926년 6·10 만세 때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때에 각각 예비검속으로 일경에 구금되었던 만해는 성북동 셋방에서 살았다. 그가 1933년 심우장을 지어 옮겨온 건 55세의 나이에 지인 소개로 스무 살 어린 간호사 유숙원(1900~1966)과 두 번째 혼인하고 나서이다.
 
불교 개혁과 대중화 주장, 종단에 맞서 타협 거부, 독립운동 동참
 
만해는 일제강점기에 불교가 무능해졌다고 비판하며 불교의 개혁과 대중화를 부르짖었다. 그는 <조선불교유신론>(1910)을 통해 불교의 현실 참여를 강조했고, 승려의 결혼 금지 계율이 불교의 본질이 아니며, 자유로운 의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총독부의 사찰령(1911)에 따라 어용화의 길을 걷게 된 부패한 불교 종단에 맞서 모든 타협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김좌진, 오동진과 함께 만주에서 무장투쟁 운동을 벌이다 만주에서 체포(1931)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일송(一松) 김동삼(1878~1937)이 1937년 옥중 순국했다. 일제는 이를 비밀에 부쳤고 마땅히 시신을 거둘 사람도 없었다. 평소 그를 존경해 왔던 만해가 시신을 거두어 “내 이 어른을 내 집에 모시는 걸 더없는 영광으로 알겠다.”라고 하며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렀다. [관련 글 : 남만의 맹호김동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다]
 
심우장은 마당에서 보면 정면에 대청마루가 있고 그 뒤로 온돌방이 붙어있다. 대청마루 왼쪽에 사랑방, 오른쪽에 부엌과 맞닿은 찬마루가 있다. 부엌에는 두 개의 아궁이에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대청마루 앞의 유리 미닫이문은 전통 한옥에 일제강점기의 일본식 개량이 이루어진 결과다.

만해는 심우장에서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 <흑풍(黑風)>(조선일보, 1935~1936)을 비롯해 <후회>(조선중앙일보), <박명(薄命)>(조선일보, 1938~1939), <삼국지>(조선일보, 1939~1940) 등을 쓰거나 번역했다. 비록 소설가로서 높이 평가받지는 않는다고 해도 심우장은 만해의 문필 활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와 3·1운동(1919) 이후 1920년대까지만 해도 문인들은 민족의식을 드러내는 저항적인 작품으로 일제의 식민 통치에 간접적으로 저항해 왔다.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1937) 이후 일제가 침략 전쟁을 본격화하고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전시 동원 체제를 구축하면서부터 문인들의 변절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태평양 전쟁 발발(1941) 이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조선어 말살, 창씨개명 등)이 극단을 치달으면서, 적지 않은 문인이 친일의 길을 걷거나 창작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문인보국회'와 같은 친일 어용 단체가 속속 결성되었고, 문인들은 적극적으로 일제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선전하는 글을 쓰는 등 부역에 앞장섰다.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 견지
 
그러나 만해는 중일전쟁 이후로도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도, 강연도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1937년부터 강요된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일본식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 두 번째 혼인으로 얻은 딸을 일본어와 일본 역사를 가르치는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직접 가르쳤다.
 
1940년 5월부터는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했다. 많지 않은 원고료와 부인의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면서 그는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였다.

▲ 만해와 두 번째 부인 유숙원의 묘소. 그의 유해는 화장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만해는 1942년 단재 신채호(1880~1936)의 유고집 발간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특별 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계속 혼수상태로 있다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법랍(法臘) 39세(1905년 백담사 재출가 기준), 세수(世壽) 66세로 입적하였다. [관련 글 : 승려·시인·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대선사 열반 / 백담사, 만해 한용운과 독재자 전두환]]
 
만해의 유해는 미아리 화장터에서 화장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대한민국장) 추서받았으며, 1967년에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가 탑골 공원에 건립되었고, 1973년 《한용운 전집》(전6권, 신구문화사)이 간행되었다.
 
만해 한용운은 살아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 <님의 침묵>(1926)을 남겼다. 이 시집에는 ‘님의 침묵’ 이외에도 ‘알 수 없어요’, ‘나룻배와 행인’, ‘복종’ 등 모두 88편의 시가 실렸다. 특히 ‘님’을 조국과 민족, 연인, 그리고 부처(절대자) 등 다양한 대상으로 은유하며 시대적 아픔과 불교적인 사상을 담은 ‘님의 침묵’은 불멸의 시편으로 기려지고 있다.
 
심우장을 나와 언덕길을 내려오기 전, 만해공원 위 전망대 자리에서 ‘박태원 집터’ 표식을 발견했다. 거기가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쓴 작가 박태원(1909~1986)이 성북동에 살 때, 운치 있는 집을 만들려고 싸리 울타리를 치고, 대문도 싸리문으로 만들었다는 그 집터란다.

▲ 박태원 집터 표지석. 내가 찍은 사진은 글씨를 분간하기 어려워 서울시 사진을 가져왔다.
▲ 심우장에서 도로로 내려오는 길목. 만해공원 위의 전망대. 여기에 박태원 집터 표지가 있다. 구인회 동인 박태원과 이태준은 이웃해 살았다.
▲ 성북동 문화예술길. 동아일보 자료를 가공하였다.

다음 목적지가 소설가 이태준(1904~?)의 수연산방(성북로26길 8)인데, 여긴 또 박태원의 집터다. 그러고 보니 성북동엔 심우장 말고도 많은 이야기가 담긴 옛집이 많다. 성북동에는 조지훈의 방우산장(성북동 142-1),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이 살았던 집(성북로10길 30), 미술사학자 최순우 옛집(성북로15길 9)도 있으니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린다는 얘기가 그저 들리지 않는다.
 
이미 시간은 점심때를 넘겨 2시에 가까우니 시장기를 다스리기 어려워 우리는 근처의 한 감자탕집에 들어가 뼈해장국으로 늦은 점심을 때웠다. 마침, 다음 목적지인 소설가 이태준의 수연산방은 건너다보이는 성북구립미술관 뒤쪽이다. 193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이며, ‘구인회동인으로 함께 활동한 이태준과 박태원이 성북동에서 이웃해 살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나는 잠깐 그들의 대표작들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2025. 11. 16. 낮달

 
 
참고
· 김승희, 마음을 보는 곳, 심우장(尋牛莊), 서울사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오원호, 만해 한용운이 직접 지은 공간, 심우장을 만나다, 한국주택금융공사 블로그

· 설악불교문학관 한용운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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