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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혜순, “이전에 없던 언어로 이전에 없던 세계를 창조”한

by 낮달2018 2025. 6. 2.

[서평] 김혜순, <어느 별의 지옥>, 2017, 문학과지성사

▲ 김혜순을 몰랐던 나는 이번에 그의 시집 "어느 별의 지옥"(2017)과 "날개 환상통"을 샀다.
▲ 김혜순 시인(1955~ )

그동안 나는 김혜순(1955~ ) 시인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름 자는 더러 듣긴 했지만, 그의 시는 전혀 읽지 못했으니, 그는 내게는 이 땅의 숱한 무명 시인과 다르지 않은 이였다. 김 시인은 1955년생, 나와 같은 베이비붐 세대고, 등단도 일찌감치 1978년에 평론, 이듬해 시로 치렀으며, 그간 14권의 시집을 낸 47년 경력의 시인인데도 말이다.

 

엔간한 시인이라면 고교 문학 교과서에 실리고, 그도 아니면, 대입 모의고사에도 출제되고, 문학 부교재에도 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십수 년 동안 고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그의 이름을 교과서나 부교재 등에서 만나지 못했다. 이는 내가 김혜순 시인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의 원인이 내게 있지 않다는 증명이 될지도 모른다.

 

그간 얼마나 무심했는지, 그가 2019년 시집 《죽음의 자서전》(영문 제목 ‘Autobiography of Death’)으로 대한민국 최초로 캐나다 최고 권위의 그리핀 시문학상(Griffin Poetry Prize)을 받은 것도 몰랐다. 물론 그리핀 시문학상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었던 탓이기도 하다.

 

경북 울진 출신의 김혜순 시인은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가 입상하여 비평 활동을 시작했고,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 가을호에 ‘담배를 피우는 시체’ 외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등단작이 ‘담배를 피우는 시체’라는 괴기한(?) 제목의 시라는 점은 시인의 시적 경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년이 온다>에서 계엄군에게 뺨 맞은 인물의 실제 모델

최근 김혜순 시인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가 소설가 한강의 장편 <소년이 온다>(2014)에서 1980년 5월 광주 전남도청에서 소년 ‘동호’를 데리고 나가려 했던 수피아여고 3학년생 김은숙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보도를 읽고서다. [관련 기사 : 소년이 온다계엄 때 뺨 맞은 은숙, 세계적 시인 김혜순이었다]

▲ 요즘도 왕성하게 시를 쓰고 있는 김 시인은 1955년생, 베이비붐 세대의 맏언니다.

은숙은 대학 중퇴 뒤 출판사에 다닐 때 경찰서에 불려 가 일곱 대 따귀를 맞고 오른뺨 실핏줄이 터지는데, 이는 바로 대학을 갓 졸업한 뒤 출판사에 다니다가 서울시청 검열과 군인에게 원고를 내고 받아가는 게 일이었던 김혜순이 실제로 겪은 일이었다는 것.

 

어느 날 교정보던 책의 번역자 연락처와 만난 장소를 추궁당하며 경찰서로 불려간 김혜순은 군인이 “이게 까불어?” 욕설과 함께 벼락처럼 따귀를 일곱 대를 때렸는데, 그는 맞으면서 숫자를 세었다고 했다. 뒤에 출판사에 출근하지 않고 하숙집에 엎드려 뺨 한 대에 시 한 편씩을 썼다. 그 시들은 그의 세 번째 시집 <어느 별의 지옥>(1988)에 실렸다.

뺨 한 대에 시 한 편씩 써낸 시집 <어느 별의 지옥>

1980년대 신군부의 계엄이 시퍼렇게 지속되던 때 얘기다. 그는 1988년에 낸 이 시집에서 ‘시인의 말’로 단 세 줄로 썼었다. 그는 2017년에 이 시집의 개정판을 내면서 그때의 시인의 말을 그대로 실었다.

 

시들을 여기에 다시 풀어놓는다.

꼴뚜기 같은 내 시들아. 저기 저 어둔

고래를 먹어치우자. 부디.

 

일단 김혜순의 시집을 사겠다고 마음먹고 나는 <어느 별의 지옥>과 2019년에 낸 <날개 환상통>을 샀다. <어느 별의 지옥>은 초판 2쇄(2025.2.26.)고, <날개 환상통>은 초판 12쇄(2024.4.1.)다. 나만 몰랐지, 그는 사람들에게 그만그만하게 알려진 시인이었던 게다.

 

그의 시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이는 물론 평가와는 무관하게 내 취향과는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온갖 전통적인 시어와는 거리가 먼 생경한 어휘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동시에 자유분방한 인식을 술술 풀어내는 그의 작품이 매력적이라는 점을 숨기기 어렵다.

시 ‘그곳 1’이 노래하는 공간은 “감시와 검열과 통제와 고문이 난무했던 1980년대 한국의 정치 상황”(오연경, 시집의 ‘해설’, 이하 같음)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온갖 서사들이 꿰맞추어지고, 거짓이 창작되고, 고문과 폭력이 자행되는 그곳을 시인은 ‘세계 제일의 창작소’라고 풍자하고, 그 폭력의 실상들을 유머러스하게 폭로한다.

 

서정과 달콤한 정서로 잘 빚어내도 무엇할 등단작이 저리 살기 어린 데서 보듯, 그가 쓰는 시어는 예사롭지 않다. 아니, 단순히 시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시를 통해서 드러내는 인식과 화두의 문제다. 김혜순 시어에 대한 오연경의 해설은 적확하다.

 

김혜순의 시가 늘, 시대와 그 시대의 언어와 그 시대를 받아내는 제 자신의 몸과 싸워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시대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어김없이 독서의 재개를 촉구하면서 지금 - 여기의 지평에 미리 도착한 미지의 말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야 깨닫는다.

 

우리의 뒤늦음이 필연적인 것은 그의 시가 어떤 상황과 조건에 서도 끊임없이 이전에 없던 언어로 이전에 없던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투신해 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혜순은 당대성 안에서 당대적인 것의 드러남을 위해 당대에 갇힌 말들의 재갈을 풀고, 처참할 정도로 무력한 언어의 폐허에서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의 영토를. 그 모래 한 알만큼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고자 늘 당대에 앞선 걸음을 외롭게 내디뎌왔다.

      - 오연경, 해설 ‘그곳, 그날, 그리고 지금-여기’ 중에서

 

특히, 오연경은 김혜순의 시에서 “언어적 자의식의 최전선이 여성의 몸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은 필연적”이라고 하면서, “김혜순은 여성의 몸이 버려진 무덤이고, 죽은 자들의 감옥이고, 빛나는 별이 지상에 천국을 짓고 있을 때 그 아래를 떠받쳐 온 지옥이라는 것을, 그리고 거기가 언어의 죽음에 입 맞추는 시의 자리라는 것을 늘 우리에게 확인해 주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판단은 표제작 ‘어느 별의 지옥’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 서도 끊임없이 이전에 없던 언어로 이전에 없던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투신”해 온 김혜순의 시는 등단 20년이 가까워지면서 김수영 문학상(1997), 현대시 작품상과 소월시문학상(2000), 미당문학상(2006), 대산문학상(2008) 수상으로 이어졌다.

그리핀 시문학상에 이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

▲NBCC AWARDS 최고의 책

그리고 ‘죽음의 자서전’ 영문판으로 2019년에는 한국 시집 최초로 캐나다의 그리핀 시문학상(Griffin Poetry Prize) 국제 부문 상을 받았고, 2024년에는 <날개 환상통> 영문판으로 한국인 작가 최초로 미국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CC Awards) 시 부문(‘2023년 최고의 책’)을 수상했다.

 

1975년 출범한 협회상 사상 번역 시가 시 부문을 수상한 것도 처음이다. <날개 환상통>은 2023 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시집 Top 5’, 워싱턴포스트 선정 ‘올해의 시집 Top 11’에 각각 선정되었다. [관련 기사 : 미국이 놀랐다김혜순 시인, 한국 최초 NBCC 어워즈 수상]

 

“김혜순은 놀랍도록 독창적이고 대담한 목소리로, 전쟁과 독재의 후유증,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 아버지의 죽음 같은 삶의 고통과 이를 극복하는 의식이 투영된 대안적 상상 세계를 창조한다.”

     - 전미도서비평가협회

▲ 날개 환상통 국내 발간 시집(왼쪽)과 미국에서 펴낸 영문판 Phantom Pane Wings(오른쪽)

미국 아카데미 회원으로도 피선

▲ 두 권의 시집 앞쪽에 소개되고 있는 문학과지성사 간 김혜순의 시집들


시인은 올해 일흔이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소녀같이 부지런히 시를 써 대고, 국내에선 뒤늦게 인정받은 듯했지만, 결국은 국제 문학상을 받으면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얼마 전에는 국내 작가로는 최초로 미국 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다. ‘미국 아카데미’(약칭)는 미국 내외 지식사회 리더들을 규합, 공동선·민주 가치 증진 등을 목표로 1780년 설립된 최고 권위와 역사의 학술·연구 단체로 “회원들의 우수성”을 기린다는 또 다른 취지와 함께 매해 신규 회원을 내부 투표로 뽑는다.[관련 기사 : 김혜순 시인, 미국 최고 권위 예술과학아카데미회원 됐다]

 

비유와 묘사에서 극과 극을 오가는 자유분방한 시어의 운용 덕분에 그의 시는 쉽게 읽히면서도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새로 의미를 새기는 과정에 막히고 마는 까닭은 그의 분방한 상상력 덕분일지도 모른다.

 

우선 아쉬우나마 <어느 별의 지옥>은 시간을 두고 읽고, 312쪽의 두툼한 <날개 환상통>은 차차 읽으려 한다. 그러다가 이 여름이 다 갈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칠순에도 왕성하게 시를 쓰고 있는 김혜순 시인을 응원해마지 않는다. 

 

 

2025. 6.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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