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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가겨 찻집

‘차제(此際)’ 대신 ‘때마침 주어진 기회’, 심장제세동기와 충격기 사이

by 낮달2018 2024.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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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겨 찻집] 국한문 혼용과 언문 불일치 시대의 유산인 ‘한자어’들

▲ 대체로 국한혼용 시대의 유산으로 보이는 한자어들이 적지 않다.

‘한글 전용’ 시대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문어체(文語體)에나 쓰이던 한자어가 일상 곳곳에 남아 있다. 계량하기는 어렵지만, 2, 30년 전과 비기면 ‘달라졌다’ 싶은 느낌이 확실히 올 정도다. 거의 토만 한글을 달던 국한문혼용체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의례적 문서에는 쓰이던 한자는 오늘날 눈에 띄게 사라졌다. [관련 글 : 수인한도참을 수 있는 정도]

 

사라져 가는 문어 형식의 한자어들

 

대표적인 사례가 상장이나 표창장의 쓰이는 문구다. ‘상기(上記)·두서(頭序)’는 ‘위’ 정도로 바뀌어 ‘위 학생’, ‘위와 같이’로 ‘수여(授與)’는 ‘줌’이나 ‘드립니다’의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타(他)’는 ‘다른 사람’으로 ‘모범’도 ‘본보기’ 등의 우리말로 순화되는 형식이다. 한때 우스개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품행 ‘방정(方正)’은 ‘단정’ 정도로 바뀌었는데, 사실상 ‘품행’이란 낱말도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는 제도적 개선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고, 학교에서 재량껏 문어를 구어(口語)로 바꾸는 등의 자발적인 변화를 모색한 결과로 보인다. 나도 가끔 백일장 입상자에게 주는 상장의 문구를 쉬운 구어로 바꾸어서 썼었다. 최근에 화제가 된 경남 양산 개운중학교의 졸업장은 그 본보기가 될 만하다.

 

“학생은 솜털 보송한 아이로 우리 학교에 왔었는데, 울고 웃으며 보낸 3년 동안 몸과 생각이 자라서 더 넓은 곳으로 보냅니다.”[관련 기사 : 솜털 보송했던 아이, 넓은 곳으로이런 졸업장 보셨나요?]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시골을 떠나 도회로 갔다. 도시의 중학교 교장 선생은 연세 지긋한 분이셨는데, 그는 매주 한 차례씩 열린 운동장 조회에서 늘 우리를 ‘제군(諸君)’이라 불렀다. 그냥 문틀처럼 쓰는 말인가 하고 넘겼는데, 뒷날 그게 ‘여러분’을 굳이 한자어로 쓴 거라는 걸 알았다.

 

‘제군’은 상관이 부하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쓰는 말이지만, 문어적으로 쓰이는 ‘제위(諸位)’는 같은 ‘여러분’이지만 상대를 존중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제군이 그렇듯, 제위도 문서에나 쓰이면서 간신히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제군과 제위는 이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문어로 쓰이는 제현(諸賢: 여러 점잖은 분들)도 비슷한 상황인 듯하다.

 

‘諸(제)’는 ‘모든, 여러’의 뜻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 제행무상(諸行無常), 제후(諸侯), 제반(諸般:어떤 것과 관련된 모든 것) 등으로 쓰인다. 국군의 날에 흔히 쓰이는 ‘제병(諸兵) 지휘관’, 군대에서 쓰는 ‘제대(諸隊)’ 등도 마찬가지다. 국어에선 관형사로 ‘제 문제, 제 단체, 제 비용’ 등에서와 같이 쓰인다.

 

뜻글자는 복잡한 뜻을 간단하게 줄일 수 있어서 편하게 쓰이지만, 그 한자가 한글 세대에게 낯선 말일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자의 뜻을 알아서 그 낱말을 더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얘기는 국한문 혼용에 익숙한 이들에게나 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자어’에서 뜻을 짐작게 하는 ‘우리말’로

 

베이비붐 세대인 우리는 초중고에서 거의 한자어로 된 용어로 역사를 배웠다. 이를테면 ‘무문(無文) 토기’와 ‘즐문(櫛文) 토기’ 따위인데, 이는 요즘엔 ‘민무늬 토기’와 ‘빗살무늬 토기’로 쓰는 형식이다. 한자가 아니라, 우리말로 풀어 쓰니 단박에 뜻이 분명해지는 효과가 있다. 물론 한문에 익숙한 이에겐 한자어도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다.

 

삼국시대의 고분 양식도 적석총(積石塚)은 돌무지무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목곽적석총(木槨積石塚)·적석봉토분(積石封土墳)은 돌무지 덧널 무덤으로 풀어 쓴다. ‘돌무지’는 “매우 많은 돌이 깔려 있는 땅”을 가리키고, ‘덧널’은 “널을 넣기 위해 따로 짜맞춘 매장 시설. 일반적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것”(표준국어대사전)이다.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은 굴식 돌방무덤인데, ‘굴’은 “窟(굴:자연적으로 땅이나 바위가 안으로 깊숙이 패어 들어간 곳)”이고, ‘돌방’은 “고분 안의 돌로 된 방.≒석실”이다. 한글로 풀어 쓰면 그 뜻에 접근하기 쉽다.

 

최근 고속도로 휴게소에 두는 심장제세동기의 한자가 ‘除細動器(제세동기)’라는 걸 처음 알았다. 쉽게 말하면 ‘심실의 세동(불규칙하게 뛰는 것)을 없앤다’는 뜻이다. 전기 충격을 주어 심실의 세동을 종료하고 정상적인 전기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기기다. 그냥 들어서는 꽤 어려운 이름이다. 그런데 요즘엔 이 기기의 이름을 ‘심장충격기’라고 쓰고 있는 걸 보고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직도 정치인이나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논평할 때 쓰는 말로 ‘차제(此際)’가 있다. “때마침 주어진 기회”라는 뜻으로 주로 ‘차제에’의 형태로 쓰인다. 좀 줄여서 ‘이번 기회에’ 정도로 써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한자어가 입에 붙어서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다.

▲ 군대 용어도 우리말로 순화해야 할 게 많다.

언어에서도 압축, 정제된 표현을 주로 쓰는 군대에서는 풀어 쓸 수 있는 말도 일본식 한자어로 표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흘 만에 돌아오는 5분 대기에 걸리면 군장의 수통에 물을 채워 놓아야 하는데, 이를 수통을 ‘충만시켜 놓는다’는 식으로 쓰는 형식이다. 그보다는 ‘수통 채우기’로 쓰는 게 오히려 더 간단명료한데도 그렇다.

 

1970년대 군 복무 시절에 부대에 비상이 걸려 군장을 꾸리는데, 방송으로 ‘대검 불출’이라는 전달이 왔다. ‘불출(拂出)’은 “돈이나 물품을 내어줌”의 뜻인데, 이를 ‘불출(不出)’로 이해한 병사 때문에 잠깐 소동이 벌어졌었다. ‘불출(拂出)’은 ‘지급’으로 바꿔서 쓰면 오해의 여지가 없어져 버린다.

 

‘모포(毛布)’도 ‘담요’로, ‘구보(驅步)’도 ‘달리기’, ‘도수(徒手)’도 ‘맨손’으로, ‘고참(古參)’을 ‘선임병’ 정도로 순화해 쓰는 게 필요한 이유다. 70년대만 해도 총기를 손질하는 걸 ‘수입(手入:일본어 ‘手入れ(ていれ)’이라 했는데 요즘은 ‘손질’로 쓰고 있다고 한다.

 

어차피 말이란 언중(言衆)의 선택이다. 그러나 완전한 언문일치나, 실질적 한글 전용의 말글 생활을 이뤄 나가는 데는 신문이나 방송 같은 미디어의 역할이 크다. 개개 언중들의 일상적 실천도 요긴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2024. 6.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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