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겨 찻집] 요즘 사람들이 즐겨 쓰는 ‘줄여 쓰기’
‘오래간만에’, 또는 줄여서 ‘오랜만에’ 대신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간만에’를 쓰기 시작했다. 또 ‘그뿐만 아니라’에서 ‘그’를 줄여서 ‘뿐만 아니라’도 꽤 광범위하게 쓰이는 말이다. 이는 아마 길거나 복잡한 말을 줄여 쓰기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쓰면서 퍼진 듯한데, 이 말은 이제 대중매체에서도 공공연히 쓰이고 있다. 군소 온라인 매체만이 아니다. 내로라하는 유명 일간지, 통신사, 방송사, 온라인 언론 등에서도 ‘간만에’는 대놓고 쓴다. [관련 글 : ‘간만에’와 ‘뿐만 아니라’ / ‘오래간만에’, ‘그뿐만 아니라’]
‘훨씬’을 줄여서 ‘훨’로 쓴 지는 더 오래되었다. 젊은이들이 쓰기 시작한 말은 어른들에게까지 퍼졌고, 이제는 드라마 같은 데도 당연한 듯 쓰이기에 이르렀다. 사전을 표방하는 사이트 https://wordrow.kr/ 에서는 아예 어엿한 표제어로 내세우고, ‘고유어’ ‘부사’라고 풀이하고 있다.
얼마 전 시사 잡지사의 유튜브 채널에서 진행자가 ‘여튼’이라는 낱말을 쓰는 걸 보았다. 아마 ‘하여튼’이나, ‘여하튼’을 대신해 쓰는 듯했다는데, 이 말도 젊은이들이 즐겨 쓰는 줄임말인 듯하다. 위의 https://wordrow.kr/ 에서는 ‘여하튼’의 방언으로 풀이하고 있다.
줄임말의 잦은 쓰임
다음은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한 기사에 등장하는 ‘여튼’이다. 본문은 아니고, 인터뷰이의 말을 여과 없이 썼다. 인터뷰이는 주로 연예인인데, 지방자치 단체장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요즘 유행하는 줄임말을 무심히 쓴 것이다.
· “여튼 사랑해요. 고마워요. 그리고 건강 꼭 챙겨요. 연애와 결혼 33주년. 이젠 징글징글하지도 않아”라고 덧붙였다.
· “여튼 가장 안타까운 일은 기록적인 폭우로 큰 수해를 입어서 우리 시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연말에 눈썰매장 사고로 여러 부상 다 안타까운 일이 있었죠.”
· “(……) 여튼 숨 안 쉬어지는 기분은 꽤나 무서워서 가지고 다니려고 한다. 저는 괜찮다”라고 덧붙였다.
맞다. 우리 경상도에서는 이를 방언으로 ‘야튼’이라고 썼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여튼’으로 쓰는 데도 있는 듯하다. 그건 ‘우쨌든’이나 ‘우쨌기나’처럼 3~4음절로 쓰는 것보다 2음절로 쓰는 게 훨씬 편해서다.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말하기에 들이는 노력을 줄이는 ‘언어 경제’를 실천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요즘 줄임말 신조어가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표준어로 ‘여하-튼(如何튼)’과 ‘하여-튼(何如튼)’을 표제어로 올렸다. ‘여하튼’은 “의견이나 일의 성질, 형편, 상태 따위가 어떻게 되어 있든”으로 풀이하면서 ‘아무튼’을 동의어로 붙였다. 그리고 맨 아래의 ‘한 걸음 더’에서는 “‘아무튼’, ‘어떻든’, ‘어쨌든’” 등이 모두 표준어라고 덧붙였다.
특이한 것은 ‘여하튼’이든, ‘하여튼’이든 간에 ‘여하’와 ‘하여’는 한자어 ‘如何’라는 점이다. 이방원이 정몽주의 단심가에 대한 답으로 불렀다는 ‘하여가(何如歌)’의 그 ‘하여’다. ‘여하튼’이든 ‘하여튼’이든 앞의 ‘여하’와 ‘하여’는 한자어고 ‘튼’은 ‘하든’이 준 형태다.
공적 공간에서는 줄임말도 가려서 써야
우리말 가운데 우리말 같은 ‘한자어’가 적지 않다. ‘저번·저간·여차·하필·무려·심지어·물론·대강·별안간·도대체·대관절·어차피’ 등은 모두 한자어다. 그러나 이들 낱말은 한자어라는 사실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일상에서 무심히 쓰인다. 굳이 한자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우리말이 된 것이다. [관련 글 : ‘눈록빛’을 아십니까, 우리말 같은 한자어들]
여하튼이든, 하여튼이든 이를 ‘여튼’이나 ‘야튼’으로 써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건 일상에서 사적으로는 쓸 수 있다는 것으로, 공적인 자리에서도 용인되는 건 아니다. 만약 그 줄임말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건 표준어로 사전의 표제어로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뜻이 통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말을 편하게 하기 위한 줄임말이 표준어가 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2024. 5.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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