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겨 찻집]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빈손 회담’, 국민들 ‘복장을 뒤집었다’
이른바 ‘영수회담’으로 불린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현 정부 출범 720일 만의 회담은 결국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로 막을 내린 듯하다. 회담 뒤에 온갖 매체에서 이 회담에 대한 평가들이 만발했다. 이 가운데, 백미는 민주당 민형배 의원이 했다는 ‘복장 터진다’가 아닐지 모르겠다.
‘복장 터진다’, 사투리 아니고 표준말이다
이는 회담 다음 날(4.30.) 방송된 유튜브 채널 ‘장윤선의 취재편의점’[바로가기]에서 정치평론가 김준일이 전한 내용이다. 김준일은 “찾아보았더니 이 말이 사투리더라, 사투린데 표준어처럼 쓴다”고 이야기했다. 이 영상을 보다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래 기자로 일한 김준일 평론가에게도 좀 낯선 표현이었던 듯한데, 나는 이 말을 잘 쓰지는 않지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속 터지는 상황마다 즐겨 쓰신 입말이기 때문이다. ‘복장 터지다’는 단지 두 어절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의 스펙트럼은 어떤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무엇을 찾아보았는지는 몰라도 김 평론가가 이야기한, ‘복장’이 사투리라는 건 사실이 아니다. 설마, 싶어서 나도 <표준국어대사전>(이하 <표준>)과 <다음국어사전>(이하 <다음>)을 각각 찾아보았다. 두 사전의 풀이는 비슷하지만, <표준>의 풀이(아래 참고)가 훨씬 다양하고 풍부하다.
<표준>에서는 복장이 “한자를 빌려 ‘腹臟’으로 적기도 한다”라고 하여 이 낱말이 한자어가 아니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다음>에서는 그런 사실을 다루지 않고, 한자어로 소개하고 있다. <표준>에서는 관용구도 6개나 싣고 있지만, <다음>에서는 ‘복장 긁다’만 다루고 있다. 속담은 두 사전 다 “복장이 따뜻하니까 생시가 꿈인 줄 안다” 하나만 실었다.
복장의 한자는 ‘배’ 복(腹) 자에 ‘오장’ 장(臟) 자를 쓴다. 우리 민족은 유난히 감정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의성·의태어의 발달과 함께 미묘한 차이도 너끈히 표현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선인들은 감정을 신체 장기와 연관하여 표현하기를 즐겼다.
· 간에 기별도 안 가다, (간이) 크다·작다·붓다, 간을 빼주다, 간에 붙었다…….
· 창자가 빠지다·끊어지다·미어지다.
· 오장(五臟)이 찢기다·뒤집힌다, 오장을 뒤집어 보인다.
· 쓸개 빠지다, 쓸개에 붙고…….
· 밥통(위)이 떨어지다.
· 간장을 끊다·녹이다·태우다.
복장과 관련된 관용구들은 모두 “성이 나다.”, “성이 나게 하다.”, “몹시 마음에 답답함을 느끼다.”, “마음에 몹시 심한 고통을 주다.” 등의 뜻으로 풀이된다. 마음, 즉 심리적 상태를 내부 장기를 빌려서 표현한 것이다. 쇠귀에 경읽기에 그친 회담의 결과에 복장이 터진 이가 어찌 국회의원 한 사람뿐일까.
그나저나, 이번 회담의 결과에 대한 실망감이 ‘복장이 터지다’로 표현되는 걸 당사자인 대통령과 참모들은 알기나 할까. 정치의 요체가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라는 <논어>의 명제를 되씹으며 혼돈 속의 집권당을 바라보는 국민의 분노와 절망을 생각한다.
2024. 5.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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