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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중지’ 관련한 두 나라의 풍경 : 한국과 프랑스

by 낮달2018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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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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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여성의 날은 1910년에 제안된 뒤 1911년 첫 기념 행사를 치른 이래, 100년 넘게 기념일로 자리 잡고 있다.

‘세계 여성의 날’(또는 국제 여성의 날, International Women’s Day)은 ‘여성의 정치·경제·사회적 업적을 범세계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09년 사회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정치적 행사로 시작되었고, 1910년 클라라 체트킨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에 의해 세계적 기념일로 제안되었다.

 

1910년 제안 뒤, 1911년에 첫 ‘ 세계 여성의 날’ 행사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1857~1933)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여권운동가로 1892년 사회주의 여성잡지인 <평등>을 창립하여 여성문제에 둔감했던 당시 사회를 바꾸려는 운동을 시작하였고, 1907년 제1차 세계여성대회의 초기 서기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러시아 혁명의 붉은 장미’로 불린 콜론타이는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노동 운동가, 정치인이자 외교관, 소설가, 사회주의자였다. 레닌의 동지로서 볼셰비키 운동의 주역을 맡았던 그는 남성으로부터의 해방은 경제적 독립에 있다고 보고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역설하였으며, 자유 연애론을 주장한 여성주의자였다.

 

산업 혁명과 시민 혁명에 힘입어서 서유럽 세계가 자본주의 체제로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여성들의 지위는 기존 사회와 크게 달라졌다. 집안에서 가사 노동만을 담당하던 여성들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 세계 여성의 날은 이 두 여성운동가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여성들에게 남성보다 가혹한 조건을 요구하자, 여성 노동자들의 불만이 1857년 미국의 뉴욕시에서 처음으로 폭발했다. 이때 방직, 직물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저임금에 항의하는 시위를 일으켰으나, 곧 경찰에 진압, 해산되었다.

 

여성의 날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 대응한 여성의 단결

 

1908년 3월 8일, 미국 뉴욕시에서 1만 5천 명의 여성 섬유 노동자들이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치며 노동시간 단축·임금 인상·투표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듬해 미국 사회당의 선언에 따라 2월 28일에 미국 전역에서 첫 번째 ‘전국 여성의 날’(NWD:national women’s day)을 기념했다.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 여성 회의에서 클라라 체트킨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매년 같은 날,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여성의 권리 신장을 주장하는 ‘여성의 날’ 행사를 제안했고, 노동조합·사회주의 정당·근로 여성 클럽을 대표하는 17개국 100명 이상의 여성이 모인 회의는 만장일치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1911년 3월 19일에 첫 번째 ‘세계 여성의 날’이 열렸다. 1848년 3월 19일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 계급의 봉기 움직임에 위협을 느껴 여성 참정권 등을 약속한 날(이 약속은 봉기의 위험이 사라지자, 취소됐다.)이었기에 이날로 결정된 것이다.

▲ 1908년 3월 8일, 미국 뉴욕시에서 1만 5천 명의 여성 섬유 노동자들이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첫 번째 세계 여성의 날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치러졌다는데,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역에는 여성의 선거권을 중심으로 하여 여성의 각종 권리를 옹호하는 선전물들이 쏟아졌다. 행사 당일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덴마크 등지에서 약 백만 명 이상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이후 유럽과 미국 등 나라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의 사회운동 참여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1913년부터 3월 8일로 변경된 이후 세계 여성의 날은 독일, 미국 등 선진국이 아닌 주변 국가들까지 끌어들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여성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를 주요 의제로 내걸던 세계 여성의 날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부침을 거쳐 이제 전 세계 여성노동자들의 ‘축제의 장’

 

그러나 러시아에서 세계 여성의 날은 제정 폐지라는 성과를 거둔 1917년의 러시아 2월 혁명에 크게 이바지했다. 1917년 3월 8일에 여성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제정 타도를 외치며 페트로그라드 거리에서 시위를 벌여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쫓겨났으며, 임시정부에서는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27년 러시아에서 스탈린이 국제 공산주의를 사실상 부인한 이후, 노동자들의 국제 연대가 쇠퇴하였고, 이에 따라 세계 여성의 날도 예전과 같지 못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여성주의 운동의 성장과 함께 세계 여성의 날은 다시 예전처럼 전 세계 여성 노동자들이 벌이는 축제의 장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세계 여성의 날' 은 여전히 여성의 자유, 참정권, 인권 등의 정치적 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1975년 유엔은 ‘세계 여성의 해’ 기간 동안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2년 후인 1977년 12월 유엔 총회(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는 각국이 자신들의 역사적이고 국민적인 전통에 따라서 1년 중 어느 하루를 정해 그날을 여성의 권리와 세계 평화를 위한 유엔의 날로 지킬 것을 선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또 총회는 이 결의를 통해 평화와 발전을 위한 노력에서 ‘여성의 역할을 인정’하고, ‘차별의 종식 및 여성의 완전하고 평등한 참여를 위한 지원의 증진’을 촉구했다.

 

UN의 공식 지정일, 한국에서도 법정 기념일

 

이후, 몇몇 국가에서 이 행사가 원래의 정치적 색채를 잃고, 어머니날이나 밸런타인데이처럼 남성의 여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행사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 여성의 날’은 여전히 여성의 자유, 참정권, 인권 등의 정치적 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으며, 국제적인 여성들의 투쟁에서 이어지는 정치적, 사회적 자각을 잘 드러내 주는 행사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세계 여성의 날’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등 자유주의 계열과 허정숙, 정칠성 등 사회주의 계열이 각각 기념행사를 벌이면서 정착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들의 행사를 감시하였지만, 명분이 없어 탄압하지 못했고, 이는 해방 때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나 여성운동에 대한 탄압적인 정책을 유지했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사회주의적 성향의 ‘세계 여성의 날’은 공개적으로 기념되지 못하고, 소수가 치르는 작은 행사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은 1985년에 이후에 조금 해소되어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공개적으로 기념할 수 있었고, 세계 여성의날 기념 제1회 한국여성대회가 개최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을 이후 세계 여성의 날은 본격적인 정치적 행사로 되살아났고,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전국여성노조, 민주노총과 여러 여성주의 단체가 주최·후원하는 전국적인 정치·문화 행사로 자리 잡았다. 2018년에는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되었다.

 

‘임신 중지’ 자유를 헌법에 명시한 프랑스, ‘낙태죄 폐지’ 이후 대체 입법도 안 된 한국

 

‘세계 여성의 날’ 웹사이트(International Women’s Day.com)는 세계 여성의 날에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한다고 밝히고 있다.

 

· 여성의 업적을 축하하다

· 여성 평등에 대한 교육 및 인식 제고

· 여성 발전을 위한 긍정적 변화 촉구

· 가속화된 성평등을 위한 로비

· 여성 중심 자선단체를 위한 모금 활동

 

여성의 날은 제정된 지 100년을 훨씬 넘겼지만, 여성의 지위와 귄리는 여전히 모든 나라에서 온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고 노회찬 전 의원은 2005년부터 매년 여성의 날에 국회 청소노동자 등을 비롯한 여성 노동자, 여성 국회의원, 여성 기자 등 각계각층의 여성들에게 장미꽃과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그가 보낸 것은 여성과 여성의 삶과 권리에 관한 관심의 촉구였고, 성평등의 실현이었을 것이다. [관련 글 : 세계 여성의 날과 노회찬의 장미, 마거릿 생어와 낙태죄 논란]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 중지를 위한 국제행동의 날을 맞아 ‘호주제 폐지 운동을 함께한 여성 100인’이 ‘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를 선언한 것은 2020년 9월이다. 60년 넘게 사실상 사문화되어 있던 형법의 ‘낙태죄’ 조항은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았다. 헌법재판소는 심판 대상 법률이 ‘위헌’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해당 법률의 공백에 따른 혼란을 우려해 법을 개정할 때까지 법의 효력을 한시적으로 인정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 2021년 1월 1일부터 낙태죄는 사라졌지만, '완전한 임신 중지'를 규정한 대체 입법이 마냥 미루어지고 있다.

이에 2021년 1월 1일부터 낙태한 여성과 이를 도운 의사를 처벌하는 법은 사라졌다. 그러나, 대체 입법이 마냥 미루어져 법 조항 개정과 낙태약 도입이 뒤따르지 못하면서 전문가들은 “낙태는 불법은 아니되 합법도 아닌 상황”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임신 중지는 형사 처벌되지 않지만, 여전히 건강권으로서 임신 중지권이 보장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 글 : 낙태죄폐지, 여성을 성과 재생산 권리의 주체로]

 

지난 3월 4일, 프랑스 상·하원은 4일(현지 시각) 파리 외곽 베르사유궁전에서 특별 합동회의를 열어 여성의 임신 중지 자유를 헌법에 명시하는 내용이 담긴 개헌안을 찬성 780표 대 반대 72표로 통과시켰다. 세계 최초로 헌법에 여성의 ‘임신 중지 자유’가 명시됨으로써 프랑스는 헌법으로 ‘임신 중지’ 자유를 보장한 첫 나라가 되었다. [관련 기사 : 프랑스, 헌법에 여성 임신중지 자유세계 첫 명시]

▲ 프랑스 의회가 여성의 낙태 권리를 프랑스 헌법에 명시하는 법안을 승인한 후 낙태 지지자들이 서로 포옹하고 있다.

이미 1975년부터 여성들의 자발적인 임신 중지가 합법화된 프랑스에서 ‘헌법에 명시된 자유’로 보장하게 된 것은 미국에서 벌어진 상황 때문이다. 2022년 6월 미국에서 연방대법원이 임신 중지 권리를 인정하는 기존 판례를 무효로 하자, 유럽 각국에서는 임신 중지 권리를 헌법에 명시하자는 여론이 일어난 것이다.

 

극우 정당이 득세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유럽에서 앞으로 임신 중지를 포함한 여성의 권리가 후퇴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배제할 수 없었기에 마침내 개헌으로 이 염려를 지워낸 것이다. 낙태죄 폐지가 위헌이라는 결정까지 받아놓고도 여전히 대체 입법조차 이뤄지지 않은 한국의 상황 앞에 프랑스의 개헌은 어떤 교훈이 될까, 우울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2024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는다.


2024. 3. 7. 낮달

 

 

참고

· 위키백과 국제 여성의 날

· 세계 여성의 날(IWD)’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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