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에 따른 ‘대체복무제’ 도입되어야 한다
14일 아침 <한겨레 신문>에서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한 예비법조인의 ‘양심적 병역 거부’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 기사 바로가기). 2008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올 1월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백종건(26) 씨는 판검사와 변호사, 군법무관 등으로 나간 연수원 동기들과 달리 ‘교도소행’을 택했다. 법무사관 후보생 입대일이던 지난 10일, 백씨는 입대하는 대신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것이다.
그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총을 들지 않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이다. 그는 특별한 상황의 변화가 없는 한, 재판을 거쳐 감옥으로 가야 한다. “병역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게 되면 ‘법조인 백종건’의 미래는 암담해진다. 판검사 임용은 물론 변호사 등록도 출소한 뒤 5년 동안은 할 수 없다.”(기사 내용 인용)
“저는 신념에 따라 총을 들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일 뿐입니다. 총을 드는 것 외에 어떤 종류의 대체복무라도 하고 싶지만, 현재로선 방법이 없네요.”
나라는 그의 신념을 존중해 주지도 대체복무의 길도 열어주지 않는다. ‘양심적 병역 거부’ 당사자와 담당 재판부의 위헌법률심판 제청이 잇따라 헌법재판소에서 심리가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선고일은 정해지지 않았다. 헌재가 7년 전의 ‘합헌’ 판결과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헌재는 지난 2004년에도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처벌하는 병역법 조항에 대해 재판관 7:2로 ‘합헌’을 결정했다. 하지만 당시 헌재는 ‘진지한 사회적 논의’와 ‘국가적 해결책’으로 ‘대체복무제’ 도입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2005년엔 국가인권위와 유엔인권위도 정부에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했다.
국방부도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를 2009년부터 허용한다고 발표했지만, 2008년 정권이 바뀌면서 이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전면 시행을 한 달 앞둔 2008년 12월, 국방부는 ‘대체복무 전면 유보’ 방침을 밝힌 것이다.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의 ‘감옥행’이 다시 시작됐다.
2011년 2월 현재, 양심적 병역거부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사람은 모두 955명이다. 한 해 평균 600여 명이 징역형을 받는 데에 비기면 가장 많은 숫자다. 지난 반세기 동안 무려 1만 5천여 명이 집총을 거부하고 감옥에 갔다.
집총을 거부하는 교리를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아닌 사람이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란 주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자가 아니거나 다른 교파의 기독인으로서는 ‘보장받는 미래’를 포기하고 스스로 전과자가 되겠다는 이들의 선택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매년 평균 600여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병역 대신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감옥을 선택했다. 이는 양심적 병역 거부가 더 이상 국가의 형벌이 제어할 수 있는 ‘범죄’로 바라보는 관점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세계에서 얼마 남지 않은 징병제 국가 ‘대한민국’
세계에서 얼마 남지 않은 징병제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병역 문제는 매우 뜨거운 이슈다. 이른바 ‘신의 아들’들의 병역면제가 평범한 사람들의 박탈감으로 작용하는 현실, 생때같은 자식을 병영에서 잃는 일이 드물지 않은 현실은 ‘병역 가산점’ 문제처럼 일종의 ‘억하심정’ 형식으로 비약하기도 하니 말이다.
70년대만 해도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은 억지로 군대에 끌려왔다가 집총을 거부하고 군 교도소에 갔던 모양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군에서 이들을 만난 적이 없다. 비기독인들은 ‘집총 거부’나 ‘수혈 거부’ 따위의 교리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그건 ‘군대에 가지 않겠다는 수작’쯤으로 치부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교회나 종교적 신념 따위를 인식의 영역에서 고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이들에 대한 국가의 대응이 ‘폭력’ 이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최인식의 단편 ‘세상의 다리 밑’을 읽고서였다.
연병장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유월의 햇살이 뜨겁게 부서져 내렸습니다. 나는 연병장에 죽처럼 가득 들어찬 햇살을 떠밀며 그 안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제자리에 섯, 나는 우뚝 멈춰 섰습니다. 김 하사는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총 받아, 하면서 총을 내게 던졌습니다. 나는 나에게 던져진 그 총을 향해 반사적으로 손을 쳐들었습니다. 하마터면 총을 받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얼른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렸습니다. 총은 내 가슴에 맞고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이 새끼 봐라. 이건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화기다. 6·25 때는 이런 총이 없어서 우리 선배 국군 아저씨들이 빨갱이 새끼들한테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아냐? 그런 소중한 총을 니가 안 받아? 땅바닥에 내던져? 망할 새끼. 그가 발을 쳐드는가 싶었는데, 이미 군홧발이 내 얼굴을 걷어찼습니다. 나는 연병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군화는 거듭해서 내 옆구리를 걷어찼습니다.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일어서. 나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어느새 그는 다시 총을 쥐고 있었습니다. 받아. 그가 또 총을 던졌습니다. 나는 받지 않았습니다. 총은 내 얼굴에 맞고 떨어졌습니다. 한순간 눈앞이 빙글 회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개새끼. 그가 다시 내 가슴을 걷어찼고, 나는 나동그라졌습니다.
그는 거듭 나를 걷어찼습니다. 연병장의 흙먼지 속을 나는 그가 걷어차는 대로 떼굴떼굴 굴렀습니다. 일어서. 총 있는 곳으로 달려가. 나는 총 있는 곳으로 달려가 멈춰 섰습니다. 그가 다시 총을 집어 나에게 던졌습니다. 나는 총을 받지 않았고, 총은 내 입술에 맞았습니다. 입술이 터졌습니다. 그가 다시 발길질을 했고, 나는 쓰러졌습니다.
- 최인석 단편소설 ‘세상의 다리 밑’ 중에서
작품에서 김 하사의 가학성은 군 특유의 폭력문화에다 ‘총을 거부하는 이상한 병사’에 대한 일반의 경멸과 증오가 보태어진 것으로 보인다. 총을 바라보는 김 하사의 관점은 병사 일반의 눈높이에 정확히 들어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소설에서 확인한 것은 주인공이 가진 ‘신념의 부당성’이 아니라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성’이었다. 그쯤 되면 신념의 정당성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 물리력의 정당성을 물어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소설에 드러난 폭력은 당시 병역거부자들에게는 일상적이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년에 600명의 청년이 병역거부로 교도소에 간다
2001년 이후 양심적 병역 거부가 본격적 이슈가 되면서 병역거부자들은 군이 아닌 일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일률적으로 부과되는 형량도 징역 3년에서 1년 6개월로 축소되었으니 개선이라면 개선이긴 하다.
법학자 김두식은 자신의 책 <불편해도 괜찮아>(창비, 2010)에서 ‘1년에 600명의 청년들이 교도소에 가는 나라’라는 제목으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권의 영역으로 조명했다.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란 부제대로 그는 몇 편의 영화를 예로 들면서 양심적 병역 거부가 인권의 문제임을 역설한다.
김두식은 일반 영화팬의 눈높이로 주제를 조곤조곤 파헤친다. 무엇보다도 그가 주류 기독교인으로서 자기 입장을 넘어 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은 만만찮은 미덕이다. 그는 ‘객관의 눈으로 종교를 바라보면 언제나 이상하고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다’라고 하면서 ‘종교인들 스스로도 그 사실을 망각할 때가 많다’라고 말한다.
자신은 ‘언제나 정상이고 주류’이므로 다른 사람을 억압할 수 있다고 믿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행태가 바로 그런 망각의 좋은 예라고 그는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는 소수 종파 기독교인에게 마음 놓고 돌을 던지는 주류 기독교인들’도 같은 부류다.
김두식은 이들 주류 기독교인의 행태가 ‘출발 당시 소수자였고 늘 오해 속에서 박해받았으며 그래서 약자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던 초기 기독교’와 너무 멀어졌음을 지적하고 이를 깨달으면 기독교인들은 다른 소수자를 훨씬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여러 기본권 중에서 ‘종교의 자유’가 특별히 더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 ‘비정상성’에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는 ‘종교는 외형적으로 가장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종교인의 인식도 넓혀 준다(아주 쉽고 흥미롭게 ‘인권’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을 ‘강추’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은 주류 기독교에 따르면 ‘이단’으로 불리지만 ‘신앙행태 면에서는 아주 극단적인 보수 기독교인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들은 오히려 주류 기독교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지켜야 할 규범이 많은 교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징병제를 시행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를 들면서 우리가 어느 쪽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하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와 관련하여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군 복무와의 형평성’ 문제다. 그러나 이는 ‘군대 안에서 비전투 복무를 하거나 소방, 산림 감시, 장애인 수용시설 봉사, 동사무소 근무 등 민간 대체복무를 허용’하면 해소되는 문제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수 기독교가 앞장서서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해 왔다. 그러나 사실 초기 기독교는 평화주의 전통을 지녔고, 존 스톳 목사, 대천덕 신부 등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친 교회 지도자들도 젊은 시절에 양심적 병역 거부를 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여호와의 증인뿐 아니라 불교와 가톨릭 등에서도 병역 거부자가 나오면서 이런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지고 있는 것도 고무적이다.
김두식은 소수자에 대한 관용이야말로 병역을 마친 ‘어제의 용사’들이 지켜온 ‘자유, 평등, 평화의 가장 값진 열매’라면서 이제 주류와 다수자들이 소수자들에게 대체복무를 통한 삶의 길을 열어줄 때가 되었다고 강조한다. 이제 ‘대체복무제’의 실시는 때가 무르익다 못해 이미 시기를 놓쳤다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대체복무제 기약 없이 미뤄져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법조인이 아니라 수형인이 되어야 하는 백종건 씨에겐 ‘군 복무’ 문제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병역면제를 받으려고 중3 때 자퇴할 생각도 했고, 사법시험 포기도 고민했다고 한다. 참여정부 때 그는 ‘국민과의 대화’에 나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더니, 대통령이 그의 손을 잡고 “힘내라”고 말해줘 잠시 희망을 걸기도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면서 대체복무제 도입은 기약 없이 미뤄졌고, 이제 그는 법률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범죄에 대한 형벌을 살아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그의 선택 앞에 선배와 동기들의 고민도 적지 않다. ‘신념에 동의하지 않지만, 신념을 지키려는 걸 존중한다’라고 격려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동의하지 않는 타인의 신념을 존중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같은 사회적 관용을 통해서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은 자못 시사적이다. 대체복무제는 병역면제처럼 소수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수자들이 소수의 양심과 신념을 지켜주는 지킴이의 역할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 해 전 일이다. 인근 시군에 근무하던 초등교사 최 선생이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했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그는 전쟁과 무기를 반대한다고 했다. 대체복무제 논의가 계속되던 때라 우리는 제도의 변화에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상황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학교에서 쫓겨나 감옥으로 갔다.
그는 지금 어디선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과는 무관한 다른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가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는 상황은 백씨가 법조인으로 일할 수 없는 상황과 그대로 겹친다.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와 대체복무제는 이제, 21세기 한국 사회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2011. 2.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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