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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일요일(1965)’, ‘셀마 몽고메리 행진’은 끝나지 않았다

by 낮달2018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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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밀리아 보인튼 로빈슨 부부의 ‘흑인 투표권 쟁취 투쟁’

▲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이끄는 시위대는 마침내 에드먼드 페투스 다리를 건넜다.
▲ 3월 21일의 세 번째 행진에서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이끄는 시위대는 마침내 몽고메리에 입성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이후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에서 앨라배마주의 주도 몽고메리(Montgomery)는 기억되어야 할 도시다. 미국 의회가 현대 민권운동의 어머니라는 찬사를 바친 로자 파크스(Rosa Lee Louise McCauley Parks, 1913~2005)가 주도하여 흑인들의 집단 파업과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벌인 곳이다.

 

이 운동은 1955, 몽고메리의 백화점 재봉사 로자 파크스가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한 데서 비롯되었다. 인종 차별법 짐크로우법에 의해 그녀가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촉발된 이 1년여에 걸친 저항은 이듬해 버스의 인종 분리가 불법이라는 연방 대법원의 판결로 승리를 거두면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은 막을 내렸다. [관련 글 : 로자 파크스, 행동과 참여]

 

그러나 운동의 불씨 구실을 했던 로자는 몽고메리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듬해 이 도시를 떠나야 했다. 승리는 조그만 시작에 불과했다. 제도적 인종차별이 철폐되는 민권법(1964)과 투표권법(1965)이 제정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로자 파크스 이후, 몽고메리

 

10년 후, 몽고메리에서 싹을 틔운 흑인민권 운동은 몽고메리의 이웃 앨라배마주 댈러스 군의 도시 셀마(Selma)로 옮겨서 진행된다. 여전히 선거권이 없던 흑인들의 투표권 쟁취 운동을 시작한 이는 셀마에 살던 어밀리아 보인튼 로빈슨(Amelia Boynton Robinson)과 그녀의 남편이었다. 당시 셀마에서는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흑인들은 투표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다.

 

▲ 어밀리아 보인튼 로빈슨(1911~2015)

실제로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이 투표권을 획득한 것은 1870년이었다. 그러나 남부지역의 대다수 주 정부는 투표하려는 흑인들에게 투표세(Poll Tax)를 내도록 했다. 현재 화폐 가치로 20달러가량인 투표세는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 백인들이 노예 출신 흑인의 참정권을 막으려고 도입한 교묘한 장치였다.

 

남북전쟁 직후에도 모든 선거 관련 업무는 주 정부 관장이었다. 인종차별적 성향의 백인 유권자가 지배적이었던 남부의 각 주는 문맹 검사’(Literacy Test)와 투표세 제도를 운용함으로써 이들 흑인의 참정권을 박탈한 것이다.

 

셀마의 흑인 투표권 쟁취 운동

 

문맹 검사란 적법한 유권자라도 투표를 하려면 정치·사회 등의 현안에 관한 최소한의 기본 지식은 갖추어야 한다는 이유로 시험을 치르게 한 제도였다. 돈을 내야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한 데다가 문맹 검사를 통과해야 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이들은 투표에서 배제되었다.

 

이 운동은 일찍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에 참여해 힘을 보탰던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목사를 비롯하여 짐 베벨(Jim Bevel), 호시아 윌리엄스(Hosea Williams)를 비롯한 많은 저명한 미국 인권운동가들을 셀마로 불러들였다.

▲ 셀마 몽고메리 행진을 이끈 지도자들. 왼쪽부터 킹 목사, 짐 베벨, 호시아 윌리암스.

운동은 셀마에서 몽고메리로 가는 비폭력 거리행진으로 진행되었다. 3차에 걸친 행진 가운데 첫날인 37일의 행진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이날을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라 부르는 이유다. 이날 600여 명의 인권 행진대가 셀마를 출발하여 80번 고속도로를 따라 몽고메리로 향했다.

 

3주 전인 218, 인권 시위 도중에 한 경관의 발포로 지미 리 잭슨이 쓰러졌고 8일 후, 그는 상처가 악화하여 사망했다. 행진대는 이러한 사실을 포함, 투표권을 요구하는 자신들에 대한 경찰의 부당한 탄압을 주도 몽고메리에 있는 주 의회에 알리고 주지사와 면담하려고 했다.

 

셀마-몽고메리 3차례 비폭력 거리행진

 

그러나 행진은 주립 경찰대가 몽둥이와 최루가스로 행진대를 공격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행진을 주도한 짐 베벨은 비폭력을 지향했지만, 몽고메리로 가는 길목인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에는 백인 주립 경찰대가 곤봉 등으로 무장한 채 시위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앨라배마 주지사 월리스는 이들의 행진이 공공 안전을 위협한다며 비난했고 경찰은 비무장 시위대를 소몰이 막대와 말발굽, 최루가스와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함으로써 많은 부상자를 냈다. 흑인 인권운동가 존 루이스는 경찰의 폭력에 두개골 골절상을 입었다.

▲ 3월 7일(피의 일요일) 첫 행진에서 주립 경찰대가 행진대를 무차별 진압하고 있다.
▲ 3월 7일, 주립 경찰대가 몽고메리로 가는 길목인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에서 시위대를 기다리고 있다.

두 번째 행진은 마틴 루서 킹의 주도로 이틀 뒤인 39일에 이루어졌다. 이날은 첫 행진보다 4배나 많은 대략 25백 명 정도의 시민이 참여했다. 이날 저녁, 아프리카계 미국인 시위에 동조하여 시위에 참여한 백인 중 제임스 리브(James Reeb)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로부터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셀마의 병원들은 리브의 치료를 거부했고, 결국 그는 311일에 사망했다.

 

그러나 두 번째 행진도 목적지로 가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시민 불복종 운동이 벌어지자 315일 린든 존슨 대통령은 흑인들의 투표를 막는 법규·관행을 금지하는 역사적인 투표권법도입을 제안했다. 그리고 321일에 거행된 세 번째 행진에서 비로소 25천 명의 시위대는 육군의 호위를 받으며 주 의사당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는 87km. 시위대는 마지막 행진에서 비로소 몽고메리에 닿을 수 있었다.
▲ 셀마에서 몽고메리로 이어지는 길은 지금 셀마 몽고메리 국립 '역사로(路)'로 기념되고 있다.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는 87km, 그러나 셀마의 시위대가 몽고메리에 이르는 데는 무자비한 탄압에 따른 적지 않은 희생이 필요했다. 셀마에서 몽고메리로 이어지는 행진로는 이후 셀마 몽고메리 국립 역사로(Selma to Montgomery National Historic Trail)로 기념되고 있다.

 

투표 권리법 쟁취, 그러나 행진은 끝나지 않았다.’

 

존슨이 제안한 투표 권리법(Voting Rights Act)’은 이 행진에 힘입어 그해 8월 발효됨으로써 흑인들은 비로소 제한 없는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투표 권리법은 소수 인종의 선거권 제한을 막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과거 인종차별이 심했던 일부 남부지역의 주 정부가 선거법을 수정할 경우 연방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했다. 또 읽기 및 쓰기 시험에 의하여 투표권을 거절 또는 제한하는 것을 전국적으로 금지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법안 통과된 지 5년 후인 1970년에는 메릴랜드주에서 최초의 흑인 시장이 당선되었다. 이후 정·관계에도 흑인들의 진출이 이어졌다. 콜린 파월과 콘돌리자 라이스 등이 국무장관을 지냈지만, 상하원에 진출한 흑인의 비율은 초라하다.

 

미국 전체 인구 가운데 흑인의 비율은 13%지만 2015년 현재 하원에 진출한 흑인의원은 44명으로 전체 435명의 10%에 그치고 상원의원 100명 중 흑인은 단 2명이다. 200844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버락 오바마가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이 되었다. 오바마는 2012년에 재선에 성공했다.

▲ 2015년 3월 7일 행진 50돌 기념행사에 참석한 오바마가 보인튼 여사(103세)와 함께 걷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다. 201537, ‘셀마-몽고메리 행진’ 50돌을 기념하는 행사가 4만여 명의 인파가 몰린 가운데 앨라배마주 셀마의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에서 열렸다. 이 행사에서 당시 대통령 오바마는 연설에서 지난 50년간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미주리주 퍼거슨 사건에서 보듯 인종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셀마의 행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그것이 여전히 내연하고 있는 미국의 인종차별, 그 현주소다. 퍼거슨 사건(2014)으로 사망한 마이클 브라운 외에도 에릭 가너(2014), 12살 소년 타미르(2015) 등 경찰의 총격 등으로 흑인이 희생되는 사건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 현재, 미국

▲ 2018년 3월 22일 'Black Live Matter(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대가 새크라멘토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최근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 지방검찰청은 휴대전화 불빛을 권총으로 오인해 20대 흑인 청년을 사살한 경찰관 2명에게 정당방위를 인정,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지난해 3, 흑인 청년 스테폰 클라크(22)는 손전등 불빛이 새어 나오는 아이폰을 들고 있다가 출동한 경관들이 쏜 총탄 20발을 맞고 자신의 할머니 집 뒷마당에서 숨졌다.

 

사건 뒤에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등 인권단체들은 휴대전화 들었으니 쏘지 마!”라는 구호를 외치며 새크라멘토 등지에서 시위를 벌였다. 퍼거슨 사태 때 손들었으니 쏘지 마!”라는 구호를 재연한 것이다. 당시 숨진 마이클 브라운도 18세 흑인 청년이었다.

 

클라크 어머니의 반발은 말할 것도 없고,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도 우리 사법 시스템은 젊은 흑인과 라티노를 백인과 달리 대우한다반드시 바뀌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것이 지적하는 것은 여전히 진행 중인 미국의 인종차별, 그 어둡고 부끄러운 현실이다.

 

 

2019. 3.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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