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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자(者)’와 ‘당선인(人)’, 혹은 ‘무례’와 ‘예의’ 사이

by 낮달2018 2022.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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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당선 후보는 ‘당선자(者)’인가, ‘당선인(人)인가

▲ 같은 뜻인데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이를 '당선자' 대신 '당선인'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이명박 인수위때부터다.

대통령선거에서 당선한 이를 우리 언론에서는 ‘당선인’이라 부른다.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 기타 선출직 선거에서 승리한 이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호칭은 ‘당선자’인데도 대통령선거 당선자만 ‘당선인’으로 부른다. 언론 가운데선 <한겨레>만이 ‘당선자’라고 불러 다른 선출직의 호칭과 같이 쓰는 게 예외일 뿐이다.

 

주무 부서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당선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 국립국어원도 두 용어를 섞어 써도 문제가 없다고 밝혔을 정도다. 그러나 ‘당선인’이라는 용어 자체가 ‘언론이 권력을 부여한 언어’라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관련 기사 : 윤석열 당선자인가, ‘당선인인가]

 

‘놈 자(者)’ 자 쓴 ‘당선자’ 대신 ‘당선인’ 원한 이명박 인수위

 

무슨 말인가 했더니 ‘당선인’ 표현이 활발하게 사용된 계기는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당선된 직후였다고 한다. 2008년 1월 주호영 당선자 대변인이 언론에 “‘당선자’가 아니라 ‘당선인’으로 표현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당시 인수위의 주장은 인사청문회법, 공직선거법, 대통령직인수법 등에서 ‘당선인’이란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주장이고 그 이면에는 ‘놈 자(者)’ 자를 쓰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쉽게 줄이면, 최고 권력자(여기에도 ‘자’가 쓰였다)인 대통령에 당선한 이를 ‘당선자’로 쓰는 것은 무례하다, 예의에 맞게 ‘당선인’으로 써 달라는 요구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전적 의미로 ‘당선인’과 ‘당선자’는 차이가 없다. 당선자든 당선인이든 ‘당선한 사람’이라는 뜻은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접미사 ‘자’와 ‘인’의 뜻은 같고 ‘놈’은 원래 비하의 뜻이 없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두 어휘에 쓰인 ‘자’와 ‘인’이 둘 다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라고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두 낱말은 아무 차이가 없는 동의어다. 선행하는 명사가 무엇이냐에 따라 ‘자’와 ‘인’이 붙을 뿐이다. 두 접사는 호환되지는 않는다. ‘종교인’은 되어도 ‘종교자’는 안 되고, ‘노동자’는 되어도 ‘노동인’이라곤 잘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을 가리키는 ‘자(者)’의 훈(訓, 새김)은 ‘놈’이다. 이게 지엄한 지위에 오른 이를 지칭하는 말로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새김은 중세 때만 해도 ‘비하’의 뜻이 전혀 없는 말이었다. 오늘날은 “사람을 좀 낮잡아 이르는 말”로 알지만, 당시에는 모든 남자를 두루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얘기다.

 

당시 ‘여(女)’의 새김도 ‘계집’인데, 이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에는 여성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말은 세월이 흐르면서 본래의 뜻에서 조금 바뀐 것이다. 이러한 낱말의 의미 변화를 ‘어의(語義) 전성(轉成)’이라고 한다.

 

한자의 새김을 읽는 게 관습화되어 그렇지, 중학교 한문에서 이런 글자를 가르치면서 ‘놈’이나 ‘계집’이라는 비칭 대신 새김을 ‘사람 자’, ‘여자 여’라고 가르친다. 낱말 자체에 그런 비하의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는 방증이다. 

 

따라서 ‘당선자’를 굳이 ‘당선인’으로 써야 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자’는 유권자·주권자는 물론, 우승자, 권력자, 지도자 등으로 자유롭게 쓰이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선거 당선자만 따로 ‘당선인’이라 부르는 것은 평등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온당치 않아 보인다.

▲ 신지영 고려대 국문과 교수는 KBS 방송에 출연하여 '당선자'로 쓰라고 지적했다. ⓒ KBS

<언어의 줄다리기>를 쓴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언론이 이제라도 ‘당선인’ 대신 ‘당선자’를 쓰라고 지적하는 이유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통령에 당선된 자는 헌법 제67조 2항과 68조 2항에 ‘당선자’라고 지칭돼 있다. 취임 시 헌법 제69조에 근거해 헌법을 준수한다는 선서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며 “제발 언론은 헌법에 반하는 명칭으로 부르지 말아 달라”고 촉구했다고 한다.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당사자’밖에 없다

 

대통령 후보는 선거 과정에서 자신을 ‘머슴’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대통령의 권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행사하는 공복(公僕)이라는 의미이다. 비록 그게 형식과 이론에 그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이론이 무시되거나 폄훼될 이유는 없다.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국민의 버림을 받는 순간, 그는 평범한 주권자의 자리로 내려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선인이 아니라 당선자로 불리는 것은 그런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를 새롭게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당사자가 자진하여 그렇게 불러달라고 하지 않는 이상 바뀌기가 그리 쉽지 않을 듯하다. 대통령을 부르는 각하라는 호칭을 버리고 대통령님이란 새 부름말을 만든 이가 당시 대통령 김대중이었던 역사의 가르침이다.

 

 

2022. 4.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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