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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새로 만난 시인들 - ① 안현미

by 낮달2018 2022.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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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미, <곰곰>

▲ 2006년 출간본은 절판, 사진은 걷는사람(2018)에서 출판한 시집

무슨 바람이 불었나. 문태준이 엮은 시집을 읽다가 엮여서(?) 한꺼번에 다섯 권의 시집을 샀다. 기형도와 백무산의 오래된 시집, 허수경과 문정희의 시집, 그리고 2권부터 샀던 <애송시 100편>의 1권이 그것이다. <남명 조식>과 조선조 후기의 문인 김려의 산문집 <유배객, 세상을 알다>,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뉴라이트 비판>까지 보태면 모두 8권이다. 마음이 그득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씁쓸한 기분도 어쩌지 못한다. 지난번에 산 책도 이리저리 찔끔대고 있을 뿐, 제대로 읽지 않고 있는 까닭이다. 화장실 수납대에 두어 권씩 올려두고 간간이 읽다가 말다가 하다 보니 조촐한 감동은커녕 책을 펼칠 때마다 앞부분을 뒤적거려야 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거기 푹 빠지지는 못했지만, 여러 시인의 대표작을 한 편씩 여러 번 되풀이해 읽으면서 그 뜻을 새록새록 새기는 기쁨은 유별나다. 개인 시집이 아닌 앤솔러지(anthology, 사화집 詞華集) 형식의 시집이 갖는 강점이다. ‘한 권의 시집에서 좋은 시 두어 편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라는 얘기는 빈말은 아닌 듯하다. 이는 시작(詩作)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앞서 소개했듯, 민음사 판 <애송시 100편> 1·2권은 각각 한국 대표 시인 100명이 추천한 시를 묶은 것이고, <포옹>은 문태준 시인의 애송시 69편을 엮은 것이다. 시인의 추천을 받거나 시인이 사랑한 시니 그 작품성은 더 말할 게 없겠다. 거기다 시인의 해설이 양념처럼 붙어 있으니 나처럼 시 읽는 눈이 어두운 사람에게 그건 등댓불에 비길 만하다.

 

<애송시 100편>은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는 부제가 붙었다. 1권은 정끝별 시인이, 2권은 문태준 시인이 해설을 맡았다. 한국 대표 시인 100명이 추천한 시니 당연히 김소월부터 최근의 현역 시인까지를 망라한다. 젊은 시인들에게는 그 빛나는 시인들의 시편 가운데 순서 없이 이름자를 올리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겠다.

 

김경주, 송찬호, 김영승, 안현미, 김기택, 이정록, 김중식, 손택수, 신용목, 김경미. 내가 <애송시 100편>에서 만난 낯선 이름이다. 이들이 언제 등단했는지, 나이가 얼마쯤인지를 나는 전혀 모른다. 이미 좋은 시를 쓰고 있는 중견일지도 모르는데, 이들을 낯설게 바라보는 자신이 정말 부끄럽다. 좋은 독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20대의 끝을 나는 겸연쩍게 추억해 본다.

 

1권 끝에 실린 안현미의 시를 읽다가 나는 거기 오래 머물렀다. 그의 시 ‘거짓말을 타전하다’는 두 문단으로 된 산문시다. ‘여상 졸업’, ‘더듬이가 긴 곤충’, ‘아현동 산동네’, ‘고아’, ‘청춘’, ‘비키니 옷장’, ‘연탄가스 중독’ 등의 시어가 환기해 주는 익숙한 풍경을 나는 떠올렸다.

 

나는 ‘여상 졸업’에서 ‘연탄가스 중독’에 이르는 고단한 청춘의 삶을 이해하고,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아현동 산동네’나 ‘아현동 시장’의 ‘순댓국밥’을 이해한다. 그녀가 더듬대며 내뱉는 말, ‘우우, 우, 우’를 기억하고, 그녀가 ‘불 꺼진 방’에서 ‘타전’하는 ‘거짓말’, ‘거짓말 같은 시’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해설에서 정끝별은 이 시가 안현미의 삶과 다르지 않고, 그녀는 ‘씩씩하고 싹싹하’다고 소개한다. 인터넷에서 검색했더니 시인의 신상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1972년 강원도 태백 출생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2001년 계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 곰곰 (랜덤하우스)

 

뜻밖에 그녀의 시를 싣고 있는 블로그와 카페가 여러 곳이었다. 그이의 시 몇 편과 거기 뜬, 후덕해 뵈는 시인의 사진도 내려받았다. 역시, 그녀는 강원도 태백 출신이다. 시에서 그녀가 밝히고 있는 신상과 시는 에누리 없이 겹치는 것이다.

 

넉넉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천연색 사진을 자르다가 실수로 사진이 흑백으로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천연색보다 흑백의 이미지가 그녀에게 더 잘 어울리는 듯해 그대로 두었다. 시인과 독자 사이란 건 원래 그런 법이다. 시를 통하여 독자는 자신의 느낌대로 시인의 이미지를 교직(交織)해 나가는 것. 그게 설령 시인과는 상관없는 이미지라 할지라도.

안현미의 다른 시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도 스스럼없이 마음에 감겨온다. 설명이 군더더기가 되고 말 시다. ‘엄마의 통장’과 ‘까치’의 조합도, ‘상처’, ‘가난’, ‘눈물’, ‘밥’, ‘아픔’과 ‘열매’도 저마다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게 마음의 현을 가만가만 흔들어 주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시집 ‘곰곰’을 온라인 서점의 서재 보관함에다 매입 예정 도서로 올려놓았다. 작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지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혹 안현미 시인을 만날 수 있으면, 그이를 아현동 시장, 순댓국밥집에서 만날 수 있으면 소주 1병 반을 나누어 마시고 싶다. 그냥 사는 이야기나 객쩍게 나누면서.

 

 

2009. 1.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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