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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문학 교사가 만난 작가 현진건

by 낮달2018 2021.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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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실주의 소설의 기틀을 마련한 대구 출신 소설가 현진건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소설을 처음 만난 게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의 중학교로 진학한 1960년대의 마지막 해다. 그때 나는 전기 입시에 실패하고 후기인 대명동 ‘야시골’의 산등성이에 있는 공립 중학교에 들어갔다. 하교할 때마다 들르던 도서실에서 닥치는 대로 읽어댄 한국단편문학전집에서 그를 만난 것이다.

 

중1, 교과서에서 만난 현진건

 

당시 국어 교과서에 실린 「한국문학의 흐름」이라는 단원을 통하여 우리는 시인 작가들의 아호와 이름을 섭렵했는데, 현진건은 그 목록의 앞부분에, 꽤 길게 소개된 작가였다. 소개된 작품은 「빈처(貧妻)」와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등이었는데 정작 작품 본문은 실리지 않아, 우리는 더듬더듬 그 이름과 작품을 외우는 게 고작이었다.

 

도서실에서 읽은 책 가운데 현진건의 작품도 당연히 있었다. 그런데 읽은 것은 분명한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창 기억력이 좋을 때였지만 너무 어려서였을까, 「빈처(貧妻)」나 「술 권하는 사회」는 좀 심심했고, 「B사감과 러브레터」는 그나마 흥미로웠다는 느낌만이 남았다. 그러나 「운수 좋은 날」은 읽었는지 어땠는지 거짓말처럼 기억에 없었다.

 

뒷날,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중고등학교에서 30년 넘게 아이들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면서 나는 왜 까까머리 중학생에게 현진건의 단편들이 ‘심심하게’ 느껴졌는지 깨우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고자 현진건 중단편선 『운수 좋은 날』(문학과지성사)을 다시 읽으며 머리를 주억거린 이유도 같다.

 

현진건은 김동인(1900~1951), 염상섭(1897~1963)과 함께 근대 단편소설의 형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다. 이들뿐 아니라, 이 시기 작가들의 소설은 그런 발전 과정을 통해 단편 장르가 어떤 형식으로 정제되어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1921)보다 몇 년 뒤에 쓴 「운수 좋은 날」(1924)과 「B사감과 러브레터」(1925)가 현대 소설의 형식에 더 가까운데다가 읽기도 훨씬 수월한 까닭이 거기 있다.

 

「고향」과 「운수 좋은 날」로 다시 만난 현진건

 

대학에서 현대 소설을 공부하면서 다시 20년대 작가들을 만나긴 했지만, 그때에도 나는 현진건의 소설을 무심히 만났다. 그를 새롭게 만나게 된 것은 초임 시절 고교에서 가르친 「고향」에 이어 교직 20년 차, 2000년대 초반에 중학교 3학년 국어를 가르치면서였다. 교과서에 그의 탁월한 단편 「운수 좋은 날」 전편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성장’은 독자도 예외가 아니다. 교재를 연구하거나, 실제 수업을 전개하면서 저도 모르는 어떤 순간의 깨달음이 있다. 젊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작품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기도 하고, 인물과 사건의 갈피에 배어 있는 땀과 온기를 느끼게 되는 순간 말이다. 그건 전적으로 세월, 나이의 힘이다. 그때, 나는 80년도 전에 작가가 정교하게 교직해낸 서사에 숨은 소설 미학을 어렴풋하게 찾아낼 수 있었던 듯하다.

▲ 대구 두류공원에 세운 현진건 문학비 ⓒ 정만진

이 단편은 한 인력거꾼이 맞닥뜨린 ‘행운’이 아내의 죽음이라는 ‘불행’으로 역전되는 어느 비 오는 날을 반어적으로 그린다. 일제 식민지 치하 하층 노동자의 궁핍한 생활상과 기구한 운명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이 작품은 한편, 작가의 관심이 ‘개인’에서 ‘민족’으로 옮아가는 반전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서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사실주의적 경향을 일관되게 추구하는 기조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지식인 청년의 사회적 부적응과 고뇌를 다룬 「빈처」·「술 권하는 사회」·「타락자」와 같은 자전적 신변소설에서 식민지 민족적 현실과 핍박받는 민중의 문제로 시선을 옮겨간 것이다.

 

이는 현진건의 문학을 “식민지 근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일상을 섬세하게 살피는 관찰의 서사”로 바라보면서 그의 관찰이 “지식인인 ‘나’에서 출발하여 식민지 조선 민족의 얼굴을 형상화하는 쪽으로 확대-심화”한다는 지적(김동식 《문학과 사회》 편집위원)과 이어진다.

 

이러한 문학적 전환이 집약된 작품집이 『조선의 얼굴』(1926)이다. 이 책에 실린 「운수 좋은 날」과 성에 무지한 열다섯 살 소녀가 시집와 겪는 살인적 노역과 고통을 세밀화처럼 그린 「불」(1925), 수탈과 착취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삶의 기반인 농토를 빼앗기고 떠도는 농민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고향」(1925) 등은 1920년대 단편 문학의 탁월한 성취였다.

 

일제의 수탈과 억압에 지치고 무너진 ‘민족의 초상’, 「고향」

 

초임 시절 문학 시간에 여고생들에게 가르쳤던 「고향」은 200자 원고지로 30~40장 분량의 짤막한 액자소설이다. 그런데도 소설은 절묘한 방식으로 식민지 시기에 일제의 농촌 수탈 정책에 희생된 우리 농민의 참혹한 생활상을 폭로한다.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마주 앉게 된 “동양 삼국 옷을 한 몸에 감은” 사내를 화자는 내심 경멸하면서도 흥미롭게 관찰한다. ‘옥양목 저고리’에 ‘중국식 바지’를 입고 ‘기모노’를 두른 사내의 복식은 그가 지나온 삶의 여정과 경험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역둔토(驛屯土)를 파먹으며 살았는데, 일제 강점 이후 역둔토가 동척(東拓)에 넘어가면서 그와 고향 사람들의 삶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가 결국 고향을 떠나 서간도와 안동현, 규슈 탄광과 오사카 철공장을 전전하다가 10년 만에 돌아왔을 때 고향은 폐허가 되어 있다. 거기서 그는 유곽으로 팔렸다가 병든 몸으로 귀향한, 한때 그와 결혼 말이 있었던 처녀를 만났다고 고백하면서 우리가 어릴 때 멋모르고 부르던 노래를 읊조린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노래는 옛 민요 가락을 빌려 당대의 사회상을 풍자하는 ‘신민요’다. 이 노래는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는 지식인은 투옥되고, 여자는 먹고살기 위해 창기가 될 수밖에 없는 암울한 시대 상황과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사내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의 삶에 공감하게 된 화자가 맞닥뜨린 것은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이다. 그것은 일제의 수탈과 억압에 지치고 무너진 ‘민족의 초상’이었다.

 

그 이후, 꽤 오랫동안 나는 현진건을 잊고 지냈었다. 20년 후쯤에 그는 마침내 「운수 좋은 날」로, 얼치기 문학 교사가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작가적 역량을 보여주면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현진건과 함께 단편소설의 형식과 사실주의 문학 발전을 같이한 염상섭(1897~1963)의 장편 「삼대」(1932)를 읽고 그의 문학적 역량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다

▲ 거화 동인들.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백기만, 현진건, 이상화, 이상길 ⓒ대구교육박물관

현진건은 1917년 대구고보에 다니던 벗 백기만(1902~1966)이 이상화(1901~1943) 등과 함께 프린트 판으로 발간한 시 동인지 『거화(拒火 : 횃불)』를 함께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22년, 그는 이상화를 추천하여 홍사용·나도향·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白潮》 창간 동인이 되어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참여했다.

 

현진건은 <시대일보> 기자로 일하다 1925년 이 신문이 폐간되자, <동아일보>로 옮겼다. 1932년, 사회주의자로 상하이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3년간 복역한 셋째 형 정건(1887~1932, 1992 독립장)이 출옥 반년 만에 옥고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1936년,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있으면서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형 정건처럼 독립운동에 투신하지는 않았지만, “식민지 시대의 현실 대응 문제를 단편 기교와 더불어 탁월하게 양식화한 작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로서 민족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동아일보사를 사직한 뒤 창작에 전념했지만, 총독부의 검열과 탄압으로 연재 장편 「흑치상지(黑齒常之)」를 강제 중단당하고 금서로 지정된 『조선의 얼굴』이 판매 금지당하는 등 불우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 치하 민족의 수난과 하층민의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을 ‘조선의 얼굴’로 비유하며 강렬한 민족의식을 표현한 사실주의 작가의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어떤 글로도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

 

중일전쟁(1937) 발발 이후 많은 문인이 황민화 정책과 대동아공영권의 신체제론에 협력하는 친일문학이 본격화되었을 때도 현진건은 거기 가담하지 않았다. 김동인이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에 호응, ‘히가시 후미히토(東文仁)’가 되어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선동하고 징병제 시행 이후 학병을 권유하는 등 친일 부역에 나섰지만, 염상섭도 일제강점기 말기 10여 년간 만주·신징(新京)에 살면서 절필하고 친일 부역에 일절 가담하지 않았다.

 

이완용의 비서로 일제의 강제 합병을 도운 신소설 「혈(血)의 누(淚)」의 이인직,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최남선, 자유시 「불놀이」의 주요한, 현대 소설 「무정(無情)」의 이광수 등 이른바 ‘최초’의 타이틀을 지닌 문인들이 있다. 한국 신문학의 서장을 연 이들이 모두 『친일 인명사전』에 오른 ‘반민족행위자’라는 슬픈 현대문학사 앞에 일제에 끝내 협력하지 않은 작가 현진건과 염상섭은 의연히 서 있다.

 

대구는 어떻게 이들을 기리고 기억해야 할까

 

1943년 4월 25일, 현진건은 폐결핵과 장결핵의 합병증으로 마흔셋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독창적인 소설 미학으로 형상화”(김동식)한 장·단편 20여 편과 번역소설 7편, 그리고 수필과 비평문 여러 편을 남겼다. 같은 날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그의 오랜 벗 이상화도 대구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두 사람은 오래된 문우를 각각 돌아오지 못하는 먼 길을 동행할 길동무로 선택한 것일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로 국권 상실에 대한 울분과 회복의 염원을 격정적으로 노래했던 이상화도 문학으로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 현진건의 형 정건과 마찬가지로 이상화의 형 상정(1897~1947, 1977 독립장)도 독립운동가였다. 비록 독립운동에 투신하지는 않았지만, 현진건과 이상화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사후에 현진건(2005 대통령 표창)과 이상화(1990 애족장)의 수훈(受勳)은 그에 대한 나라의 응답이었다.

▲ 서울 종로구 부암동 325-2에 있는 현진건 집터 표석

이들 자랑스러운 작가와 시인을 배출한 지역이 대구다. 그러나 지자체마다 유명 문인은 물론, 생존 문인의 문학관도 다투어 여는 시대지만, 현진건과 이상화는 고월 이장희와 함께 대구문학관 ‘명예의 전당’에 상설 전시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손꼽히는 대도시 대구의 지역 문학관에 곁방살이로 기려지고 있는 셈이다.

 

이상화 고택이 있는 계산동 근방에 작가 현진건과 이상화 시인의 문학관(또는 공동 문학관)이 세워질 날은 언제쯤일까. 이들의 삶과 문학을 문학관으로 복원하는 것은 한갓진 관광 자원 하나를 더하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시민들은 거기서 작가가, 그의 시와 소설이 역사의 ‘도전’에 어떻게 ‘응전’하는가를 배우며 우리 시대를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1. 12. 24. 낮달

 


▲ 현진건을 새로 읽고자 산 중단편선 <운수 좋은 날>(문학과지성사)과 윗글이 실린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

*이 글은 한국문화분권연구소가 대구문화재단 문화예술인현창사업의 지원을 받아 발행한 근현대 대구의 문학 예술 풍경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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