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전차>의 시인 손택수
‘택수’라는 이름은 내게 묘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중학교 때에 나와 한 반이었던 아이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성은 잊어버렸고 특별히 친하지도 않았다. 선량한 친구였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 그런데도 ‘택수’라는 이름은 나를 그 시절의 교실로 데려간다.
탁구 선수 김택수가 그랬고, 손택수도 그렇다. 손택수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나는 잠깐 그 친구의 성씨가 무엇이었던가를 헤아려 보았다. 그러나 ㅇ씨 성을 가진 보수 정치인은 아니다. 나는 TV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궤변을 늘어놓는 그 퇴물 정치인에게서 욕지기를 느꼈을 뿐이다.
손택수 시인은 처음 만난 건 시 ‘살가죽 구두’를 통해서다. 그 시는 문태준이 엮은 <포옹>에 실려 있었다 (<애송시 100편> 2권에는 그의 시 ‘방심’이 실렸다). 내겐 기억도 희미한 부산역 광장의, 술에 취해 쓰러진 한 부랑자를 노래한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부산사람을 렌즈에 담은 작가 최민식의 사진 한 장을 떠올렸다.
‘살가죽 구두’는 더 볼 것 없이 그 ‘사내’의 ‘맨발’이다. 때에 절어 ‘반들거리고’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힌 그 ‘맞춤 구두’는 세상이 그에게 ‘선물’한 ‘검은 가죽구두’다. 그리고 그 구두는 오직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적빈(赤貧)’의 삶, 그러나 그것이 어디 부산역 광장뿐이랴.
인터넷 포털 다음(daum)의 인물정보는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그는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지만 시 <목련 전차>의 내용으로 미루어 부산에서 자란 것 같다. 전남 담양 출신이면 서울로 가거나 아니면 광주쯤에서 자랐을 법한데 그는 오히려 지리산, 태백산맥을 넘어 부산으로 왔고 마산에서 대학 공부를 한 것이다. 담양과 부산이라는 뜻밖의 조합은 흥미롭다.
시의 화자가 시인 자신이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는 평범한 독자로서 이런 추리는 전적으로 나의 자유다. 한전 부산지사 전차 기지 터에 전차 구경을 왔다가 아예 뿌리를 박았다는 그의 부모를 나는 아주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다.
그의 부친은 지게꾼으로 고단한 삶을 꾸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부친이 쓰러지고 난 뒤에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 자국’(시 ‘아버지의 등을 밀며’)을 확인한다.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 자국’을 말이다.
물론 나는 한전 부산지사 전차 기지 터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그러나 거기 철 이르게 찾아온 목련꽃의 행렬, ‘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과 ‘지난밤 내려치던 천둥 번개’로 동력을 얻은 그 ‘목련 전차’가 ‘한 량 두 량’ ‘떠나’는 풍경을, ‘꽃들이 전차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드는 모습을 넉넉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 ‘꽃 전차’를 따라가면 나온다는 그의 부모가 신혼 초야를 보낸 ‘동래 온천’.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5·6학년 언니들을 따라 거기 수학여행을 갔었다. 온천탕에 들어가서 욕조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정대던 기억이 아련하다. 나는 이번 휴가의 끝 무렵에 부산 동래를 찾아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나무 빨래판’은 어머니의 ‘주름’으로, 자기 허물을 ‘박박 부벼보’는 성찰의 도구로 시인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시인은 ‘나무에게 몸을 씻으러 가’는 것일까. 이제는 우리 집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그 빨래판, 시인의 따뜻해서 밝고 맑은 눈을 생각하면서 손택수를 다시 읽는다.
2009. 1.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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