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로도 집값은 지켜야 한다?
오늘자 <한겨레>에 “지적 장애인에 이사 강요한 주민들 ‘실형’”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수원지법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지적 장애인 가족에게 이사를 강요한 혐의로 기소된 아파트 부녀회장과 노인회장에 대해서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는 소식이다.
장애인 쫓아낸 아파트 자치회 간부 실형
기사에 따르면 이들 피고인이 장애인 가족에게 저지른 짓은 끔찍하다. 원고인 지적 장애인과 주민 사이에 폭행 사건이 있은 뒤부터 이들 가족을 찾아가 해당 장애인이 “알몸으로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는 등 주민들에게 위험이 되고 있다”라며 이사를 가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피고인들은 이들 장애인 가족에게 이사를 강요하고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불러주는 대로 각서를 받아쓰게 강제하는가 하면 이들 집 앞에 확성기를 틀어놓고 농성을 벌였다. 또 ‘정신질환자가 부녀자를 폭행하는 사건이 있어 주민 회의를 소집한다’라는 아파트 단지 내 방송을 여러 번 내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지적 장애인 가족들이 이들을 고소했고 법원은 이들의 범죄사실에 대해 단죄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기사 말미에 실린 소식은 씁쓸하다. 법원은 뒤늦게 장애인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견디다 못한 이들 장애인은 지난해 4년 동안 살던 집을 떠나 다른 동네로 이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법의 구제는 현실의 폭력을 넘지 못한 것이다.
피고인들이 이들 장애인 가족에게 이사를 강요한 까닭은 기사에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다. 또 그 아파트 단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기사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파트 단지 자치조직의 장인 이들 두 사람이 주민들을 대표하여 장애인 가족을 내쫓으려 했다는 것이다.
주민 자치조직에서 이들 장애인 가족의 이사를 강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장애인과 한 울타리 안에서 사는 게 부끄러워서? 그들 말마따나 장애인이 저지를지도 모르는 우발 행동이 위험해서? 아니면 그런 모든 것들이 장차 가져다 올지 모를 ‘동네의 평판’ 때문에?
주민 자치조직의 간부들에 의해서 자행된 이 조직적인 폭력의 동기가 경제적 욕망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 ‘경제적 욕망’이란 곧 동네의 ‘평판’이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는 ‘집값’의 문제는 아닐까.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은 그들이 표면에 내세우는 ‘위험성’ 때문이 아니라 소유 재산의 가치 하락은 아니었을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
‘장애인 배제’라는 이 폭력은 주민들의 묵시적 동의, 용인, 혹은 방관 속에서 이루어진 듯하다. 그 단지의 인구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 가운데 이들의 폭력에 분노한 사람이 없기야 했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꼭 이래야 돼?’,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 거야’라고 중얼거리면서 장애인 없는 ‘안전한 아파트 단지’를 추인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내 짐작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 같은 씁쓸한 현실은 우리가 아무리 ‘선진’을 지향한다고 할지라도 넘을 수 없는 한계처럼 보인다. 장애인이나 노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배제’와 ‘차별’의 그늘을 벗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백오십 명이 서울의 강서 재활원이 너무 좁아 이사하기로 하고 근처 다른 지역에 집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장애인들이 오면 주거 환경이 나빠진다고 하며 온갖 방법을 써서 건축을 방해하고 심지어 장애인들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았다. 그때 신축 건물에서 오십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어떤 중학교 교장은 주민 대표라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학생들과 같이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의 학생들이 장애자들을 자주 보게 되면 교육적 측면에서 나쁜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듯이 수많은 장애자들이 학교 바로 앞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교육환경이 좋지 않은 학교에 어느 부모님들이 그 자식들을 보내려 하겠습니까?
장애자들이 어린 학생들의 눈에 띄는 것을 보는 많은 사람들은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외국의 경우라면 장애자들에 대한 인상이나 인식이 긍정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가 그와 같이 되려면 앞으로 이십 년 내지 삼십 년 더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학교 앞에다 장애자 수용 시설을 설립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 김찬호 <사회를 본다 사람이 보인다>(고려원미디어, 1994) 중에서
‘주거 환경’, ‘교육환경’이 좋지 않다는 말은 ‘평판이 나빠져 집값이 떨어진다’로 바꾸어 읽으면 된다. ‘집값’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소수를 배제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다. 집값은 자유와 권리, 민주주의 따위의 사회적 가치를 넘는 최고의 가치고, 그것을 위해서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권도 얼마든지 ‘유예’할 수 있다. 그것이 천민자본주의 대한민국의 초상이다.
‘사람값’보다는 ‘집값’
자유와 민주주의는 주민들은 단결시키지 못하지만, 현존하는 ‘집값’의 위기, 그것을 지키는 데 전체 주민의 이해는 행복한 일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걸 반드시 나쁘다고 매도할 수는 없긴 하다. 그러나 어느 한쪽의 이해가 다른 쪽의 희생을 강제하는 상황이라면 이건 다른 문제다.
오래전의 이야기라고 내칠 수도 없다. 여전히 이런 상황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바다에 쉽게 접근해 휴가를 즐길 수 있도록 한 서울시의 중증 장애인 휴양시설 ‘희망들’ 건립 사업이 제자리걸음인 이유도 비슷하다.
서울시가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하조대’ 해안에 지으려는 이 사업은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면 관광지 이미지가 실추돼 생계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는 현지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장애인을 배타적으로 바라보느냐’는데 대해 주민들도 부담을 느끼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
전북 전주시가 중증 장애인을 위해 짓는 ‘장애인 전용 목욕탕’이 주민 반대로 공사가 중단되고 있는 상황도 비슷한 사례다. 주민들은 주차난과 소음 등을 반대의 이유로 들고 있지만 ‘내 집 앞에 혐오시설은 안 된다’라는 ‘님비(NIMBY) 현상’이 아니냐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라 한다.
님비 현상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장애인 시설을 ‘혐오시설’로 바라보는 주민들의 의식은 여전히 문제다. 이는 주민들이 결국 같은 지역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장애인을 ‘배제’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가끔 법원의 판결 제동이 걸리기도 하지만, 법은 때로 뒷북이기 쉽다. 갈등 과정을 통해서 패인 사람들의 상처만 깊어질 뿐, 그것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중증 장애의 한국 유학생을 위해 그 학생이 공부하게 될 대학 건물을 통째로 리모델링했다는 이야기는 좀 묵은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장애를 바라보는 한 사회의 시선의 깊이가 이른바 ‘선진’의 가늠자라는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 주는 사례다.
공화정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의 민주주의는 반쪽이다. 제도의 문제만은 아니다. ‘공공선’을 바라보는 사회구성원의 의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이다. 차별과 배제가 마치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일종의 역설처럼 기능하는 2011년, 장애 때문에 정든 동네를 떠나야 했던 지적 장애인에게 대한민국의 시계는 몇 시일까.
2011. 9. 22. 낮달
그때의 댓글로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블로그에서 붙인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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