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학습 부담과 한국사 학습 부담
1. “‘학습 부담’ 늘어나니 다양한 독립운동 다루지 말라”
‘학습부담’은 말 그대로 학생들이 공부 때문에 느껴야 하는 부담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집중이수제’란 제도가 바로 그 ‘학습 부담’을 줄여주겠다며 도입한 정책이다. 야심만만하게 도입했다가 중동무이가 되어 버리긴 했지만, 그 뜻이 학생들에 대한 배려에 있었다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시행하고자 하는 정책과 관련해 이 ‘학습 부담’이 매우 ‘편리하게’ 쓰이고 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제시한 국사편찬위원회와 다음 달에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병기를 정식 공고한다는 교육부 얘기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제시한 ‘2015 교육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안) 한국 근대사 영역’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30년대에 중국에서 활동한 다양한 독립운동 정당을 자세히 다룰 경우 학습 부담이 대폭 늘어날 수 있다는 지적에 유의하여 되도록 생략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한국독립당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맥락으로야 학생들의 ‘학습 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배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학습 부담을 고려하여 ‘다양한 독립운동 정당을 다루지 말라’는 것인데 이는 2009년에 제시한 집필 기준과 견주면 머리를 갸웃하게 한다.
“태평양전쟁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정치세력이 민족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였음을 유의한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2015 개정 역사과 교육과정 시안 검토 공청회’에서 고교 한국사 중 근현대사 비중을 현행 50%에서 44% 수준으로 줄이는 2차 시안을 발표한 사실로 미루어보면 위 집필 기준이 겨냥하는 게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가.
‘1930년대 중국에서 활동한 다양한 독립운동 정당’이란 민족혁명당과 김원봉, 김규식의 활동을 이른다. 결국 ‘학습부담’을 내세우고 있긴 하지만 그 뒤에 숨은 의도는 이들 좌파 민족주의 진영의 활동을 기술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침맞게 지난 광복절에 일천만 관객을 모은 영화 <암살>에서 환기된 약산 김원봉이 껄끄러웠던 것일까. 시대에 역행하는 한국사 ‘국정교과서’ 체제를 공언하고 있는 현 정부와 보수세력의 의도를 추론하기에 그것만으로도 넉넉하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근현대사 비중을 40% 정도로 줄이는 것에 대해 토론회(5.12, 연세대)에 참여한 학자와 현장 교사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근현대사를 중시하는 역사교육의 추세에 반하는 이 같은 안에 대한 역사정의실천연대와 전국역사교사모임의 분석은 날카롭다.
“헌법 전문에도 나와 있는 3·1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관련 내용을 축소하고 임시정부 활동 부분은 아예 소주제 항목에서 빠졌다. 이는 임시정부를 포함한 독립운동의 역사를 대한민국과 무관한 역사라고 강변하는 뉴라이트식 근대사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거꾸로 가는 한국사 교과서’라는 비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광복 70년’을 굳이 ‘건국 67년’으로 부르고 싶어 하는 현 정부와 보수세력의 의도대로 시방 한국사 교과서는 국정화로 일로 치닫고 있는 셈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위하여 최소한의 객관성을 견지해야 할 역사마저도 편향 서술하려는 보수 우익들의 꼼수를 지켜보는 것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이국땅에서 선열들이 감내했던 풍찬노숙의 역사는 이들 반역사적 세력의 준동 앞에서 지금 부끄럽고 민망하기만 하다.
2.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하면 학생의 ‘학습 부담’이 늘어난다”
‘학습부담’을 줄이고자 근대사 비중을 축소하고, 임정의 법통과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를 외면하려는 ‘우편향적 역사관’의 대척점에는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정책이 있다. 교육부는 한자 교육이 인문 사회 소양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뜬금없이 ‘인성교육’의 일환이라고까지 들이대고 있다.
‘한글 전용’은 이미 생활 속의 대세로 자리를 잡았다. 교과서뿐 아니라 한때는 국한 혼용을 대표하는 매체였던 신문도, 대학 교재도, 모든 공문서도 ‘오로지 한글’만 쓴다. 인터넷의 출현과 함께 한글은 문자의 정보화·기계화를 선도하는 문자가 된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의 결과를 살펴보면 ‘한자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이미 격감하고 있다. ‘한자를 모르면 생활하는 데 불편하냐?’는 질문에 불편하다는 응답이 70%(2002년)에서 54%(2014년)로 크게 줄었다.(한국갤럽 여론조사, 아래도 같음) 사람들은 이제 한자 없이 생활하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반대로 한글 전용에 대한 인식은 높아지고 있다. ‘한글과 한자를 섞어 써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한글만 써야 한다는 응답이 33%(2002년)에서 41%(2014년)로 늘어났다. 한자를 더 이상 한글을 기워[보충]주는 문자로도 필요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무엇보다도 학교 교육의 주체인 교사들의 반대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병기에 대해서 초등 교원의 65.9%가 반대했다. 지난 2월 한국초등국어교육학회가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초등 교사 1000명에게 시행한 설문 조사 결과다.(표본 오차는 95% 신뢰 수준에 ±3.1%p)[관련 기사]
참여 교사들은 한자병기 효과를 묻는 물음에도 ‘94.1%’가 학생의 학습 부담이, ‘91.5%’는 교사의 수업 부담이 늘어날 것이라고 응답했다. 인문 사회 소양을 높이자는 정책이 정작 학생과 교사의 부담을 높일 것이라며 전문가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17개 시도의 교육감도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고교생의 학습 부담을 염려해 근대사 비중을 줄이고 다양한 독립운동을 다루지 말라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집필 기준은 ‘거꾸로 가는 교과서’를 낳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 난만한 정보화 시대에 나라말 전용의 초등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자는 것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자는 것과 진배없다.
영국의 어린이 자선·운동단체 ‘어린이사회’가 발표한 ‘2015 행복한 성장기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어린이가 9.8%에 달해 15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최악을 기록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고등학생에겐 염려스러운 학습 부담을 초등학생에게 떠넘긴 형국이 되어 버린 이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는 속내는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이율배반의 뒤에는 역사를 자기 파당의 이해를 위해 농단하려는 세력과 여전히 ‘한문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국한문 혼용론자들의 정신적 ‘식민성(植民性)이 어른거리고 있다.
2015. 8.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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