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민이랄지 글루코사민이랄지?
언제부턴지 모르겠다. 아마 10년도 훨씬 지난 현상 같다. 강연이나 토론에서 가끔 들었던 표현이었다. 주로 호남 지역의 사람들이 자주 썼던 표현으로 기억된다. 그건 주로 몇 가지 예를 들어서 말해야 할 때 쓰였다.
“이는 단위 학교 분회랄지, 시군 지회랄지, 또는 시도 지부랄지 등에서 고민하고 그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주로 명사 뒤에 붙어서 쓰이는 ‘~랄지’는 굳이 분석하자면 ‘~라고 할지’의 줄임말 형태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낯선 표현이었는데 그게 ‘비문(非文)’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애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쉽게 퍼져나갔던 것 같다.
활동가들이 주로 쓰던 말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학자들과 정치인들이 쓰기 시작했고, 그예 일반인들도 서슴지 않고 사용하기에 이른 듯하다. 그런데 나는 이 표현이 여전히 낯설고 거북하다. 그 의미를 새기는 게 어렵지는 않은데 과연 제대로 쓰인 표현인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아서다.
문제의 표현에 ‘~랄지’에 포함된 어미는 ‘ㄹ지’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추측에 대한 막연한 의문이 있는 채로 그것을 뒤 절의 사실이나 판단과 관련시키는 데 쓰는 연결 어미’라 푼다. 예문도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이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덤벙거리다 시간만 보냈어.”
“내가 몇 등일지 마음엔 걱정이 가득했다.”
요즘 사람들이 즐겨 쓰는 ‘~랄지’의 표현과는 사뭇 다르다. ‘~랄지’의 표현은 어떤 문맥에서 쓰였는지에 따라 달리 새겨야 한다. 맨 앞에 든 예문에 쓰인 ‘~랄지’는 나열의 의미를 띠니 다음과 같이 ‘~나’의 형식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위학교 분회나 시군 지회, 또는 시도 지부 등에서 고민하고 그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얻은 검색 결과의 예를 보자. ❶과 ❷에 쓰인 ‘~랄지’는 보조사 ‘이나’로 바꾸어도 무방할 듯싶다. 보조사 ‘이나’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받침 있는 체언이나 부사어 뒤에 붙어)여러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도 상관없음을 나타내는 보조사”로 풀이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문학이나 음악이나 모두 소질이 있다./산이나 들이나 모두 초만원이다.”와 같이 쓰이는 경우다.
❶-1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비타민이나 글루코사민이나
❷-1 사혈 받기 전 사진이나, 부모님이나, 옆집 사람이나……
또 ❶과 ❷에 쓰인 ‘~랄지’는 발화의 의도를 고려하여 보조사 ‘든지’나 ‘든가’로 바꿀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선 이 ‘든지’를 “(받침 없는 체언이나 부사어, 또는 종결 어미 ‘-다, -ㄴ다, -는다, -라’ 따위의 뒤에 붙어) 어느 것이 선택되어도 차이가 없는 둘 이상의 일을 나열함을 나타내는” 보조사로 풀이한다.
❶-2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비타민이라든지 글루코사민이라든지
❷-2 사혈 받기 전 사진이라든지, 부모님이라든지, 옆집 사람이라든지……
❸의 경우도 ❶, ❷와 마찬가지로 ‘이나’, 또는 ‘든지’ 등의 보조사를 쓸 수 있는 경우다. 어떻게 보면 ❸은 훨씬 더 단순하다. 그냥 접속 조사 ‘와’를 붙여서 나열하면 될 문장인데, ‘~랄지’를 써서 오히려 문장의 의미를 헛갈리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랄지’의 뒤에 붙인 ‘등등’이나 ‘6, 7개 의제’를 고려하면 앞에 나열된 ‘문제’는 대등한 자격으로 연결할 수 있다. 따라서 접속조사를 붙이거나 반점(,)으로 구분해도 충분한 문장이다.
글쎄, ‘~랄지’가 쓰인 보다 다양한 사례를 가지고 확인해 보면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든 몇 개의 예는 이런 식의 표현이 굳이 쓰일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는 데 충분해 보인다.
실제로 이 표현은 발화의 의미를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기보다는 말뜻을 쓸데없이 비틀기만 할 뿐이다. 말은 단순하고 간명한 게 좋다. 복잡한 의미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말은 명확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단순명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3. 8. 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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