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하면 짧게 써야 하는데 …
블로그를 연 지 반년이 가까워져 온다. ‘묵은 글 곳간’이라며 오래된 글까지 재탕해 가며 간신히 지붕을 얹고, 창문을 여미고, 서투르게 지게문을 달았다. 오늘까지 올린 글은 모두 아흔일곱 편, 나누어 보니 매월 열여섯 편, 이틀에 한 편쯤 글을 올린 셈인데, 언제 그리 바지런을 떨었는가 싶다.
글은 가능하면 짧게 쓰자, 하고 늘 자신에게 이르지만, 글은 마치 고삐 잃은 말처럼 손아귀를 벗어난다. 이 진부한 일상과 삶에 대한, 성글고 거친 소묘가 내 글일진대, 무엇이 그렇게 하 많은 곡절을 감추고 있는지 늘 중언부언을 거듭하고 마는 것이다.
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물에 대한 ‘단순화’이다. 단순하고 명료한 사실을 복잡하고 모호하게 포장하고 변용하는 것은 ‘먹물’들의 오래된 악습이다. ‘사랑한다’라고 말하면 될 것을 우리는 ‘지난봄에 나는 무척 외로웠다’고 고백하면서 자신도 찾지 못하는 마음의 미로를 헤매고, 그런 모습을 들키는 걸 저어하면서 출구를 잃고 마는 것이다.
나는 긴 글은 마땅히 길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글이 원고지 두께를 위한 군더더기나 사족의 나열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언젠가, 원고 청탁을 받고 글을 쓰면서, 내 글 역시 길어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청탁한 곳에서 원하는 길이로 원고를 줄이는 과정에서 1/4쯤 되는 분량을 잘라 버려야 했는데, 그걸 자르고 나도 전체 뜻이나 흐름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잘라 버려야 했던 어휘와 구절들, 그 말의 주검을 일별하면서 그것들이 꼼짝없이 부질없고 헛된 수사(修辭)였거나, 이미 내뱉은 말의 동어반복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짧게 쓸 것. 다시 자신에게 되뇐다. 내 짧은 전언 속의 함의에 대해 미련을 갖거나 안타까워하지 말 것. 독자들은 때로 우매한 듯하지만, 말의 진실과 그 명징한 울림쯤은 온전히 느끼고 온몸으로 받아들일 터이니.
시인은, 그래서 외로울지 모르겠다. 한 아름 말의 성찬에서 그들은 한 개 비의(秘儀)만을 남기고 스스로 조각조각 언어의 편린을 자르고 분지를 터이다. 이생진 시인은 그렇게 바다를 노래한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서.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2007. 6. 2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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